칼럼
2014-01-01 좋은 친구들
좋은 친구들
새해 첫날, 여러분의 신앙생활을 위해서 그동안 제가 사귄 좋은 친구들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성도들은 모두 거룩해 지기를 소원합니다. 아니 그런 소원이 있으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마음 깊숙이 그런 소원이 아직 없다면 오늘 이 자리에 나와 있어도 여러분은 성도가 아닙니다. 다만 감사한 것은 기독교의 진리를 지금 찾고 있는 구도자이고, 하나님 아버지로 돌아가야 할 사람이 틀림없습니다. 오늘 이 예배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게 되기를 감히 요청합니다.
제 신앙에 큰 도움을 준 친구들은 오늘 새벽에 좀 더 자세히 소개한 기도와 말씀입니다. 우선 말씀을 만나게 된 사연은 반신욕조 이야기로부터 시작해야 하겠네요. 아마 8년은 족히 되었나 봅니다. 당시 어떤 집사님께서 감사하게도 반신욕조를 선물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따뜻한 물에 십 분씩이나 두 차례를 그냥 앉아있기가 힘들어서 욕실에 선반을 만들어 빠른 속독테이프를 듣게 되었습니다. 빠른 속도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성우의 목소리는 처음에 거부감이 들었지만 적응하니까 일 년에 4~5차례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모든 성경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다만 ‘듣는 것도 읽는 것과 같이 쳐줄 수 있는가’하는 의문은 한 해가 다 지나가도록 따라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순간 기억나더라고요.^^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그렇습니다. 지난 1,500년 넘도록 교회역사에서 성도들은 예배 자리에서 듣는 것 말고는 아무런 선택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믿음을 지켜왔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의 신앙에서 듣는 것은 읽는 것보다 먼저 자리한 전통적인 방법입니다. 성경통독이란 읽는 방법은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발명된 후에 점차 성경이 보급되면서 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테이프를 듣든지 음성파일로 듣든지 듣는 일에 새로운 시도를 새해에는 하십시오.
그리고 좋은 두 번째 친구를 소개하겠습니다. 지난 8월부터 만난 친구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다시 살아난 지 일주일이 넘었습니다. 의식이 회복되고 서서히 정신을 차리면서부터 이제는 새로운 삶을 살고 싶어 했고, 그 구체적 표현으로 기도하는 일을 앞자리에 두고 싶어 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확실한 수단으로 이처럼 글로 기도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를 불러 첫 줄을 쓰기까지 끔찍하게도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자판에 앉아서 손끝으로 이처럼 기도하면서 제 삶은 많은 열매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계획보다 더 나은 일과라는 놀라운 위업을 달성하면서 자판 기도라는 새로운 제 친구를 소개합니다. 음성기도와는 달리 자판에서 글로 드리는 기도가 갖는 유익은 큽니다. 다만 지면이 없어서 다음 기회에 말씀드리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