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일곱 번씩이나(2010년 5월 16일 주보 정근두목사 칼럼)
말이란 참 묘합니다. 앞뒤 문맥을 잘라내면 뉘앙스가 완전히 바뀌기도 합니다. 최근에 어떤 교회에서 어느 장로님이 어머님께 “권사님은 일곱 번씩이나 교회를 옮겨 다녔다면서요!”라는 질책을 하셨답니다. 어머님의 삶을 가까이서 보아온 아들로서는 그 말을 전해 듣는다는 것은 참으로 놀랍고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신앙생활의 시작은 삼십 리 떨어진 남해읍에 있는 교회를 다니면서 시작되었고 그 때가 제 나이 다섯 살이었습니다. 그리고 약 3년 후에 고향 면소재지에 #설천교회#가 개척될 때 개척멤버였습니다.
그러다가 5학년 때 남해에서 하동에 있는 외가 마을로 이사를 가서 살다가 두 서너 해 후에 면소재지로 이사를 나와서 우리 집 대청마루에서 #노량교회#를 시작했습니다. 요즈음도 가끔 그 때 이야기를 하십니다. 며칠 전에도 금식 이야기가 나왔을 때 당신이 사흘 금식을 하고 그 쌀 한 되, 보리 한 되를 양식으로 주어서 참석시킨 젊은이가 그 때 주님을 만났고 뒤에 장로가 되었으며 그 일가가 복음을 받았던 자랑스러운 기억을 들추어 내셨습니다. 그 때 어머니 주변에 어머니가 섬겼던 분들 가운데 여러 사람이 고신에서 장로로 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두레교회#를 개척할 때 함께 했고 두 번째 개척교회 #탄포리 교회#에도 함께 했습니다. 당시 연세 든 할머니는 거의 모두가 어머님이 전도한 분들이었습니다. 옆에서 지켜보니 어머님의 전도방법은 소위 생활전도였습니다. 절대 먼저 복음을 제시하지 않고 고달픈 그분들의 사연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다만 시장도 같이 가고 목욕도 함께 하면서, 자식들 때문에, 아니면 본인들의 건강 때문에 문제를 내어 놓으면 그 때 구원자 예수님을, 그의 몸된 교회를 대안으로 제시하셨습니다.
칠십을 넘긴 어느 해 어머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제 할 만큼 일을 다 했다” 그러고 나서 고향에서 또 하나의 새로운 교회 개척에 가담을 했습니다. #노량제일교회#입니다. 그 뒤에는 교사인 둘째 아들의 임지였던 거제도에 살 때는 막 개척을 시작한 #소동교회#가 부흥하기를 위해 힘을 보태셨고 또 얼마 전에는 수년 동안 #동해중앙교회#가 약하다고 힘껏 섬겼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곳에서도 문제를 일으켜서 이 교회 저 교회를 다닌 적은, 아들이 아는 한,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권사님은 일곱 번씩이나 교회를 옮겨 다녔다면서요!”라는 질책을 들으셨다니. . . 그러므로 저는 최후의 심판을 믿습니다.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