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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Jan 04, 2005

제 나이 스물아홉 살 때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유학길을 나선 남정네들 셋이 함께 떠난 길입니다. 몇 년이 걸릴지 모르지만 4, 5년은 족히 걸릴 것이기에 집 사람을 거창고등학교에 교사로서 일하도록 자리를 얻어준 다음 어머니와 아들 둘을 아내에게 맡기고 훌쩍 유학을, 그것도 미국도 아니고 유럽의 어느 나라도 아닌 남아프리카로 간 것입니다. 그런데 가족도 없이 젊은 남자들만 생활하는 것을 보던 그곳 교회의 어느 장로님 부인의 마음에 부담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도울 길이 없는지 꺼내보면 모두 하나 같이 “참, 안 됐네.” 하고 나면 끝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만학을 하고 있던 신학생 한 사람이 “우리가 뭔가 도울 길을 찾아보면 안 될까요?”라고 반응하므로 놀랍게도 8개월 만에 식구들과 재회를 하게 되었고 8년을 거기서 살았습니다. 두 살, 세 살 반 되는 두 아이를 데리고 오는 아내를 맞이하기 위해서 공항에 나갈 때의 감격을 생각하면 우리를 돕기 위해 나선 “한국인의 친구들”에 대해서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사랑의 빚을 지고 있습니다. 거기서 있었던 8년은 정말 저의 생애에 있었던 황금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4, 5학년 때 귀국을 했습니다. 본래 신학박사 학위를 받으면 가기로 약속된 교수의 길이 막히고 교회를 섬기는 목회의 길을 나섰습니다. 신학교를 가지 못하니까 청빙하는 교회가 없어서 개척교회를 하게 된 셈입니다. 서울 장승백이 한 아파트 거실에서 20명이 채 안 되는 사람들과 첫 예배를 드렸고 그 교회가 자라서 출석 160명이 된 2년 반 만에 정릉에 다시 분립개척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50명 가까이 함께 나갔기에 1년이 채 안 되어서 주일 출석 160명 가까이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를 비롯한 모든 남자들이 아프리카를 사모하는 향수병이 나서 한 달 그 때도 다녀왔습니다.


그 일 이후에 두 아들의 향수병은 치유가 되었는데 아직도 저는 가끔 그곳을 생각하곤 합니다. 다행이 이번에 중남부 아프리카 한인선교대회에 주강사로 초대를 받아서 가는 김에 울산극동방송 운영위원과 울산광역시 교회협의회 목사님들이 함께 가게 되었습니다. 첫 주간 저는 선교대회에 참여하고 대회가 끝나는 대로 아프리카 방문 팀에 합류해서 한 주간 함께 “리빙스턴의 발자취를 따라서” 여행을 하게 됩니다. 처음 두 주간이 지나면 저와 아내는 남아공화국에 조금 더 남아서 옛 친구들을 만나려고 합니다. 옛날처럼 아프리칸스라는 그들의 모국어로 설교할 기회도 있을 것입니다. 좋은 교제와 격려의 기회가 되길 기도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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