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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근두목사 설교

    영상주소
    http://vod.upcweb.net/pastor/2019_1013_정근두.mp4
    성경본문
    누가복음 19:10
    설교일
    2019-10-13

사랑하면 전도합니다

누가복음 19:10

구주대망 20191013, 찬송 8, 138, 49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울산교회는 다음 주일부터 구주대망 2019년 가을 이웃초청 잔치를 하려고 합니다. 사실 울산교회 성도들이 전도를 하면 바깥사람들은 묻습니다. 울산교회는 큰 교회인데 왜 전도를 합니까?” “전도를 안 해도 많이 모이는 교회인데 왜 또 전도를 합니까?”라고 질문합니다.

 

혹시 같은 생각을 하는 분이 이 자리에 있을까봐 걱정됩니다. 울산교회는 더 전도하지 않아도 이미 많은 성도들이 모이는 교회 맞습니다. 많이 모일 뿐 아니라 성도들을 내어보내어 분립개척도 해왔습니다. 게다가 지금 남아있는 성도들을 돌보는 일도 벅찹니다.

 

그런데 왜 올 가을에도 이웃초청 잔치를 하려고 합니까? 이웃초청 잔치는 울산교회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없이는 행복할 수 없는 이웃들을 위해서 마련하는 잔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와 같은 시대를, 같은 지역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소개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끼리 찬송하고 기도하고 우리만 복 받고 만다면, 교회가 세상에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잃어버린 자를 찾아구원하기 위해 세상에 오신 주님의 말씀이 새롭게 들려질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소중한 존재이며, 우리에게도 소중한 존재입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을 소중히 생각할 때에만 우리는 비로소 성도라고 불릴 자격이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서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너무 쉽게, 너무 자주, 아무런 근거도 없이, 하나님께 쓸모 있는 사람과 쓸모없는 사람으로 구분하려고 합니다. 당연히 우리는 중요한 사람이고, 하나님의 눈에 사랑스러운 것들이고,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별 볼일 없는 중요하지 않는 범주에 넣어서 분류해 버리고 맙니다.

 

우리는 한 주간 동안 저기 밖에 있는 사람들을 거의 생각하지 않고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아주 위험한 발상입니다. 동시에 세상에 오신 주님께서 가장 싫어하는 생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정말 중요한 사람들은 오늘 이 자리에서 예배하는 사람들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엑스트라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들을 은근히 하고 있습니다.

 

물론 주인공에 해당하는 여러분들로서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전혀 나쁠 건 없습니다. 기분이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러분의 생각일 뿐이지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웃초청 잔치를 한 주간 앞두고 무엇보다 먼저 우리의 생각을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이 생각을 깨트려야 합니다. 사람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이 변해야 합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을 새롭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에게도 쉽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바깥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대단히 애를 쓰셔야 했습니다. 베드로는 신앙이 좋았습니다. 남의 집에 손님으로 가 있으면서도, 그 집 옥상에 올라가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하루 세 차례씩, 유대인들의 기도시간을 지켜서, 기도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하늘로부터 보자기가 내려오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유대인들로는 온갖 먹을 수 없는 짐승들이 그 안에는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늘의 음성이 먹어라.”는 것이었습니다. “먹어라, 잡아먹어라.” 그러나 베드로는 무슨 말씀입니까? 유대인으로 이 나이 되도록 살면서 나는 그런 것을 한 번도 입에 댄 적이 없습니다. 못 먹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다시 보자기가 올라갔습니다. 잠시 후에 또 보자기가 내려왔는데 역시나 유대인으로는 먹을 수 없는 짐승들이 가득했습니다. “잡아먹어라.” 재차 명령하는데도 쉽게 동의가 되지 않았습니다.

 

세 번째 그 일이 있고 난 다음에, 갑자기 바깥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러면서 묻습니다. “이 집에 베드로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가이사랴에 있는 이방인 군대 장교가 사람을 보내서 베드로를 찾는 것입니다. ‘참 이상하다. 내가 본 환상하고 이 사실이 무슨 관계가 있지?’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난 저 이방사람들 하고는 가까이 하기 싫은데 왜 이런 환상을 세 차례 보여주고 날 오라 그럴까?’ 그런 의문을 갖고 따라 나섰을 것입니다. 가이사랴에 도착해서 복음을 전하는데 분위기가 달랐습니다. 말씀을 전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성령이 임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도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초대 교회에서 가장 유명한 선교 사역을 했던 바울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바울 역시,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셨습니다. 바울은 당시에 사울이라는 이름으로 통했습니다. 자기 고향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멸하기 위해서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 끔찍한 핍박자 위에 갑자기 환한 빛이 비치면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정말 충격이었습니다. 그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기 위해서 가고 있었지 한 번도 하늘의 하나님을 거역한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가 그리스도인을 핍박하기 위해 나선 것은 다 이유가 있어서입니다. 나사렛 출신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 이 무식한 것들, 설명을 하여도 통하지 않는 것들은 아예 싹쓸이를 하는 것이 제일 좋은 방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이런 것들을 이스라엘에서 씨를 말리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하늘의 음성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다그쳤던 것입니다. 얼마나 충격이 되었는지 그 순간 앞을 보지 못했습니다.

 

옛날 성도들뿐만 아닙니다. 지금 교인들도 그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바꾸어야 하나님의 손에 들려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주님이 세상에 오셔서 가장 힘들어했던 문제는 바로 이 문제였습니다. 그 옛날 주님의 사역이나 오늘날 목회사역의 핵심은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어느 날 꽤 큰 수도권 지역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여느 때처럼 많은 군중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그 도시에 사는 도덕적으로 타락한 사람들, 돈 때문에 힘들어 하는 사람들, 병으로 신음하는 사람들, 일회용 신자들, 별 볼일 없는 사람들, 확신을 갖지 못한 사람들, 영적으로 혼란을 겪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그런 무리들에게 둘러싸인 예수님을 바라보며 속이 불편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소위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렇게 쓸데없는 무리들에 둘러싸인 그가 선지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이 자신을 향해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 꿰뚫어 보셨습니다. 그래서 소위 버려진 무리들을 이끌고 거룩한 밀담을 나누는 그들에게 접근하셨습니다. 그리고 침착하고 힘찬 어조로 그들의 문제의 정곡을 찌르는 이야기를 펼쳤습니다. 연속적으로 세 개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5장 전장에 그 세 가지 이야기가 나와 있습니다. 정말 예수님은 입담이 좋은 이야기꾼이셨습니다. 여기 누가복음 15장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이야기의 뼈대만 추려놓은 것이고, 실제 예수님께 이야기를 들었다면 모두 넋을 빼놓고 들었을 것입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잃은 양의 이야기라고 말합니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라고 요약되어 있지만 예수님께서 설교하시던 순간에는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쩌면 한 사람이 백 마리의 양을 갖게 되는 과정에 대해서 실감나게 설명하셨을지 모릅니다. 양 하나하나가 태어날 때마다 요놈이 살아줘야 스물다섯 마리째 되는데. . .’ 하고 계산했을지 모릅니다. 올 연말까지 가면 오십 마리 채울 수 있는데. . .’ 재산 늘려가는 것처럼 그렇게 양 한 마리 한 마리 새끼 낳을 때마다 생각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백 마리가 되었을 때에 그의 그 감격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때부터 그 사람은 양을 먹이러 나가면 다른 일보다 양의 수를 세어보는 재미가 쏠쏠했습니다. 하나, , 셋 이렇게 시작해서 구십구, 백 이래야 되는데 세다가 보니 구십구에서 끝나버리는 겁니다.

 

그 순간 얼마나 긴장했을지 여러분 생각을 해 보십시오. 다시 한 번 더 세어봅니다. 역시나 아흔아홉 마리에서 끝이 납니다.

 

여러분,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한 마리가 어디 갔는지 정말 눈이 휘둥그레지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아흔아홉 마리의 양은 눈에 안 들어오고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서 나선 것입니다. 사람들이 가끔 이렇게 충격을 받으면 가치 판단이 잘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아흔아홉 마리가 더 소중한데도 그것을 놔두고 한 마리를 찾아 떠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얼마나 헤매고 다녔는지 모릅니다. 마침내 찾아서 어깨위에 걸치고 오면서 너무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친구 양치기들을 불러 모아서 , 오늘은 잔치 한번 하자. 먹고 마시자.”고 했다는 이야기가 여기에 실려 있습니다.

 

그 다음 이야기는 동전을 잃어버린 이야기입니다. 요즘의 한국은 잘 살게 되어서 동전을 잃어버린 것으로 크게 신경 쓰는 사람은 잘 없습니다. 저는 옛날에 미국 사람들이 방을 청소하면서 나온 동전을 쓸어서 쓰레기통에 버린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정신이 나간 사람들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한국 사람들이 그런 모습을 닮아가고 있습니다. 적어도 확실한 것은 백 원짜리 동전 하나를 잃어버렸다고 불을 다 켜고 침대 밑까지 뒤집고 책상 밑까지 수색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동전은 2천 년 전의 이 여인에게는 굉장히 의미 있는 동전이었던 것 같습니다. 열개, 어쩌면 그녀에게 누군가가 준 특별한 선물이었을 수 있습니다. 예컨대 사랑의 정표와 같은 특별한 선물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서로의 마음을 다짐하는 물건이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찾고 찾은 여인의 심정을 이해할 것입니다.

 

거기에서 하나가 빠져나간다고 하는 것은 전체가 다 없어지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뒤졌는지 불 켜고 마당 쓸고 부엌 쓸고, 방 쓸고, 찾을 때까지 찾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찾아서 너무 기뻐서 친구들을 불러 축하파티를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이 길을 가다가 걸음을 멈추시고 사람들이 따라오면서 이야기를 잘 듣고 있는지를 살피고 나서 세 번째 이야기, 소위 탕자의 이야기라고 하는 누구나 다 들었을법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습니다. 그런데 첫째 아들은 착한 아들, 교과서였습니다. 부모를 실망시키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첫째가 그렇게 착하면 둘째가 비 규격품으로 태어날 가능성이 큽니다. 상당히 방랑벽이 있습니다.

 

게다가 제 나름대로의 삶을 살고 싶어 합니다. 하긴 집에 있어봤자 2등이니까, 둘째 아들이니까 그리 뭐 정줄 일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아버지한테 가서 일찌감치 유산을 달라고 해서 받아서 현금화시켜 떠났습니다.

 

자유롭게 살아보고 싶어서 떠나갔고 돈이 있는 동안에는 주위에 친구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돈을 보고 몰려든 친구들이 제대로 된 친구들이었겠습니까? 어쨌든 돈 있을 때야 잘 살았습니다. 이제 돈이 떨어지고 나니까 친구들도 다 떠나버렸습니다.

 

먹고 살아야 되는데 돈이 다 떨어지고 나니 결국은 품팔이를 해야 되는데 품팔이 중에서도 유대인이면 제일 마지막에 선택하는 돼지 치는 일을 결국 하게 되었습니다. 돼지는 그들에게 부정한 짐승이었습니다. 돼지를 돌보는 일은 한다는 것은 완전히 밑바닥까지 내려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돼지를 치면서 돼지가 먹는 사료조차도 먹을 수 없게 되자 비로소 정신이 들었습니다. ‘? 우리 집에 가면 풍성하게 먹고 일하는 일꾼들이 수없이 있는데. 내가 아들 대우 받을 생각은 말아야지! 하지만 가서 품꾼의 하나가 되어도 이보다는 나을 건데.’하는 생각이 들어 고향을 향해 돌아갔습니다.

 

아들이 돌아오기를 날마다 기다리던 아버지는 집 밖 저 멀리서 걸어오는 아들을 발견했습니다. 몰골은 험악해졌지만 아버지의 눈이 그것을 놓칠 리 없습니다. 달려 나갑니다. 달려 나가서 그냥 가까이 나가서 얼싸 안습니다.

 

제가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아버지, 전 이제 아들의 대우를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말하면서 자신의 경솔함과 미숙함에 용서를 빌면서 지금, 아들 대우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하고 말하는데 , 무슨 이야기 하는 거야! 난 네가 돌아와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

 

아버지는 기뻐하여 종들을 불러서 새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워주고 신발을 신겨주고 아들로서 정상적인 대우를 다 해주면서 동네사람들을 불러 모아서 잔치를 했다는 이야기가 세 번째 이야기입니다.

 

한 가지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렇게 연속적으로 세 가지 비유를 한 경우는 드물었습니다. 어쩌면 예수님은 이런 심정으로 말했을지 모릅니다.

 

모두를 위해서 분명히 밝혀둔다. 이 문제에 대해서 다시는 혼란이 없기를 바란다. 나는 너희들이 누가 정말로 하나님께 중요한가를 분명히 이해하게 할 수 있도록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닌 세 개의 이야기를 연속해서 들려주마.” 그런 심정이었을지 모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기록된 이야기들의 공통요소가 무엇입니까? 첫째 요소는 중요한 가치가 있는 것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소중한 그 무엇을 잃어버린 것이 이야기의 공통요소입니다.

 

길 잃은 양은 목자에게 매우 소중한 것입니다. 생계의 중요한 몫을 차지합니다. 게다가 지금까지 삶의 목표가 100마리의 양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100마리의 양을 키우는 목자로 사는 것이 인생의 소망이었는데 한 마리가 갑자기 안보이니 얼마나 당황했겠습니까?

 

잃어버린 동전은 여인에게 매우 소중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받은 증표였다면 더욱이나 그것은 목숨처럼 귀한 것입니다. 등불을 켜들고 찾도록 찾은 이유는 그게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말할 필요도 없이 비 규격품 아들은 아버지에게 소중한 존재입니다.

 

예수께서는 당대 사회의 버림받은 사람들을 영접했다고 사람들이 멸시했습니다. 그래서 단순한 세 가지의 이야기를 통해서 방랑자, 길 잃은 자,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고 사는 사람들 모두가 하나님 아버지에게는 얼마나 소중한 자들인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들판에 두고 한 마리를 찾아 나선 그 목자의 심정을 통해서 아홉 개의 동전을 한손에 쥐고서는 나머지 한 개를 찾아나서는 그 여자를 보여주면서 너희들은 나한테 그처럼 소중한 존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나는 아닐 거라고 생각하는 분은 없습니까? 하나님에게는 모두가 소중한 존재입니다. 혹 사회가 여러분을 향해서 도무지 쓸모없다는 결정을 내린다고 해도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여러분 스스로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존재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너무 자주, 바리새인들과 같은 생각을 합니다. 우리만 잘났다는 것입니다. 우리만 선택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만 천국이 예약되어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바깥사람들은 와주면 고맙고, 안 오면 너희 문제지 뭐!” 이런 태도로 살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에 대해서 너무 쉽게 저건 아니다고 제쳐 버립니다. ‘나는 한번 끝이다 하면 끝이다라고 그것을 또 아주 소신껏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를 딱 한번 눈에 틀어져서 끝이야그랬으면 오늘 이 교회에 한 사람이라도 남아 있었겠습니까?

 

그들이 여러분에게 불친절 했던지, 불쾌하게 했던지 상관없이 하나님께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에게 중요합니다. 어떤 인종이라도 소중합니다. 남자든 여자든, 월급을 얼마나 받는 사람이든지, 교육을 얼마나 받았든지 관계없이 하나님께는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런 시각으로 사람들을 바라본다면 사람들을 대하는 여러분의 태도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하신 주님의 이야기는 다른 사람들을 놓고 무가치한 사람이라고 판단하는 잘못을 범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왜 살고 있습니까? 사는 날 동안 하나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새롭게 사람들을 대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살아가는 궁극적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을 창조하신 그분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우리와 같은 것들을 찾으시고 우리와 같은 자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깨우쳐주신 그분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배워가는 것, 그것이 인생의 목적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오늘이라도 우리는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아직도 우리를 살려 놓았겠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사실 자체만 보아도 우리는 하나님께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해도 속으로 아직도 의문을 포기하지 않고 있는 분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도대체 하나님께 사람들은 얼마만큼 소중한가 하는 것입니다. 세 가지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님이 거기에 대해 답하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은 아흔아홉을 들판에 두고 찾아 나설 만큼 소중합니다. 그 양을 찾을 때까지 온 들판을 두루 헤매고 다닙니다. 잃어버린 동전 하나는 등불을 켜들고 집 안 밖을 샅샅이 찾을 만큼 중요합니다.

 

제 나름대로의 길을 나선 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의견을 존중해 주고 무언가 배울 수 있기를 바라셨기에 당신의 행동을 자제하셨습니다. 나 같으면 재산을 달라고 하면 언제 맡겨놓은 재산이 있어?”라고 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탕자의 아버지는 주었습니다. 스스로 깨닫기를 바라고 당신의 행동을 자제하고 기다려 주었습니다. 하지만 아들이 떠나간 그 후로 정작 그의 눈은 아들이 돌아올 것을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나면 쉽게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땅위에 있는 인생은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는 존귀한 자들입니다. 소중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끝까지 찾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분명히 말씀 하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사람을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예수께서는 길 잃은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고 분명히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나서 돌아가시기 전에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셨듯이 이제 나는 너희를 보낸다.”라고 유언처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보내서 잃은 자를 찾게 하시듯이 나는 이제 너희들을 보내서 잃은 자를 찾기를 바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출세하고 가족들을 먹여 살리고 훌륭한 시민으로 사는 것보다 더 큰 목적을 가지고 이 땅을 사는 자들입니다. 이것을 인식하지 못하면 삶은 어딘가 공허하다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자식들은 다 커서 결혼했고, 자기 밥벌이 하면서 살고 있는데 지난 명절에도 와서 이제는 세뱃돈 받는 대신에 용돈입니다.”하고 드리고 가지만 혼자 생각해보면 인생은 이게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비록 이처럼 주일날 교회에 나와서 예배에 참석하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고 되뇌지만 무언가 빠진 것 같은 느낌을 지워버릴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 예배하는 일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며 열심히 신앙생활 하고 살아가지만 허전한 마음을 없앨 수 없을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가장 중요한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잃어버린 자를 찾아 나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긴급하고도 막중한 사명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대리자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님을 대신해서 세상을 바라보고 주님을 대신해 사람들에게 접근하고 주님을 대신해서 잃어버린 자를 찾는 이 사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여기에 모인 우리만큼이나 아직 여기에 오지 않은 사람들도 소중하다는 것을 우리는 인식해야 합니다.

 

이런 인식의 전환이 있어야 이웃초청 잔치가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 마음에 남은 삶은 전도자로 살겠다는 결단과 헌신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전하십시오.

 

마침내 온 세상이 우리 주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십시오.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햇빛을 받는 곳마다 주 예수 왕이 되시고 이 세상 끝날 때까지 그 나라 왕성하리라고 소원하며 노래하는 자들입니다.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는 작전수행 중입니다. 특급 명령을 받아서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밭도 사고, 소도 사고, 시집가고, 장가도 가야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삶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닙니다. 시집 장가를 가도, 밭을 사고 소를 사도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뿐입니다.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임무가 완수될 때 우리는 기뻐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천사들 앞에서 크게 기뻐할 것입니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늘 아버지께서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날 하늘 축하향연은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나 지금 우리는 그 큰 임무를 수행 중에 있습니다. 잃은 자를 찾아서 나서야 하는 임무를 부여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십시오. 사람들은 하나님께 소중합니다. 총력수색을 할 만큼 가치 있는 존재입니다.

 

세상에 오셔서 잃은 자를 찾아나선 주님의 임무를 수행할 사람을 주님은 찾고 있습니다. 잃은 자를 발견하는 것이 하늘 아버지의 기쁨이듯이 그들을 찾아내는 것을 자신의 지극한 기쁨으로 삼기를 소원하는 이들은 결단하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이 이처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그래서 독생자를 보내어주셨다는 것을 믿습니까? 그가 오셔서 잃은 자를 찾도록 찾으셨다는 사실, 그 임무가 우리에게 맡겨졌다는 사실을 믿으시는 분은 결단하십시오. 그리고 사랑하면 전도하는 거룩한 사역에 자신을 드리는 헌신의 기도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