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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근두목사 설교

    영상주소
    http://vod.upcweb.net/pastor/2018_0121_정근두.mp4
    성경본문
    사도행전 2장 42-47절
    설교일
    2018-01-21

성령이 임한 공동체

2:42-47

구주대망 2018121, 새해 셋째 주일, 찬송 8, 36, 182

 

새해 세 번째 주일예배에 나오신 여러분에게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을 부어주시길 원합니다. 예배 중일 수도 있고 다른 활동 중일 수도 있습니다. 기도하는 중에 오순절 성령강림은 임한 것이 아니라, 그냥 모였을 때에 갑자기 임한 것을 우리는 확인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 어느 순간이라도 성령은 임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은 흔히 초대교회를 들먹이곤 합니다. 그것은 초대교회를 우리의 이상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령이 임한 공동체로서 초대교회의 이상적인 모습을 오늘 본문을 통해 살펴보길 원합니다.

 

성령이 임한 공동체의 첫 번째 특징은 그들이 1 사도의 가르침을 받는 일에 힘썼다는 사실입니다. 여기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우리 번역에는 마지막 구절 오로지 . . . 힘쓰더라.”는 기도하는 데에 관련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헬라어는 말할 것도 없고 영어만 살펴도 오로지 힘쓴 첫 번째 대상은 사도들의 가르침입니다.

 

하여간 우리는 오로지 . . . 힘쓰더라.”는 표현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누가는 사도행전 1장에서 이 표현을 사용한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 강림을 위한 기도와 관련해서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1:14)

 

사도행전 6장을 읽어보면 또 한 번 누가가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6:4) 여기서도 동일한 오로지 . . . 힘쓰리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 동사는 확고부동한 결의를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초대교회가 확고부동한 결의를 가지고 힘쓴 것을 살펴보면 새로운 공동체의 특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누가는 이 단어로서 성령이 임한 교회의 특징적인 요소들을 보여줍니다.

 

성령이 임한 교회의 특징적인 요소 그 첫째는 사도의 가르침을 받는 일이었다고 밝힙니다. 사도의 가르침이란 사도들에 의해서 공적으로 선포된 나사렛 예수에 관한 메시지입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폈던 대로 이 사도의 가르침에는 나사렛 예수님의 지상 사역과 천상 사역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나사렛 예수님의 지상 사역의 극치는 그의 수난 당하심과 부활입니다. 그리고 그의 천상 사역의 극치는 승천하셔서 성령을 부어주시는 일입니다. 그리고 사도들이 선포한 메시지는 이 나사렛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삼으셨다는 내용이 그 극치를 이루고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이 사도의 가르침을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는 유전이라고 불렀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창조적 예언을 하는 선지자들과 이 가르침(전통)을 보존하는 역할을 맡은 교사들이 함께 사역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의 가르침은 지금 우리에게 신약성경으로 전달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사도들의 가르침에 돌아간다는 것은 신약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날의 교회가 성령이 임한 공동체의 모습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사도들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도록 합니다. 우리는 지금껏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회를 통한 여러 가지 가르침을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배워왔던 것들이 과연 신약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하는지 다시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은 전달되는 과정에 있어서 왜곡되기도 하고 불완전하게 축소되거나 부당하게 강조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그러한가 하여 성경으로 돌아가던 베뢰아 사람들의 모범을 본받아야 합니다.

 

성령 충만한 공동체는 신약의 가르침을 배우는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주일 설교를 통해서 그 가르침에 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제자훈련을 통해서 그 가르침을 되새기고 실천하는 자리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가르침에 순종할 때에 신약교회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울산교회가 초대교회처럼 되길 원하십니까? 여러분의 삶이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활활 타오르길 원하십니까? 기쁨 기도 감사의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맨 먼저 우리들이 사도들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성령이 임한 공동체의 두 번째 모습은 무엇입니까? 2 교제하는 공동체입니다. 우리 본문은 서로 교제하기를 오로지 힘쓰니라.고 기록합니다. 우리말 번역에는 생략된 정관사가 교제라는 말에는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 교제를 서로 나누었다는 의미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빈번한 모임에는 무엇인가 특별한 점이 있었다는 것을 암시해 줍니다. 하루에 삼천 명이 느는 폭발적 상황 속에서도 그들의 교제에는 그 나름의 특징이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성령이 임한 공동체의 두 번째 특징을 소개하는 교제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 째로, 그 교제는 거룩한 것을 공유하는 교제입니다. 리스도인들은 무엇을 서로 공유합니까? 우리가 공유하는 거룩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입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요일 1:3). 이 자리에 나와서 예배하는 우리는 성삼위 하나님을 함께 사귀는 거룩한 교제를 서로 나누는 자들입니다.

 

둘째로 성도들이 나누는 교제는 우리가 받는 것뿐만 아니라 주는 것을 포함합니다. 성령이 임한 공동체는 거룩한 분을 공유하는 넘치는 기쁨으로 인해서 세상의 것을 함께 나누어주는 일에도 기꺼이 함께합니다. 본문은 이 두 번째의 교제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가는 성령이 임한 초대교회가 서로의 소유를 나눈 방식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기술하고 있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2:44-45). 여기 재산과 소유라는 말은 요즈음 우리들이 흔히 쓰는 표현으로 바꾼다면 부동산과 동산을 각각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성령이 임한 공동체에 나타난 두 번째 특징을, 그러면 오늘 우리의 삶 속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우리도 가진 부동산을 팔고, 매월 받는 월급을 나누어 가져야만 합니까? 성령이 임한 예루살렘의 공동체에서도 재산과 소유를 나누는 것은 자발적인 결단이었음을 주목합시다.

 

보십시오. 모든 사람들이 자기 집을 다 판 것은 아닙니다. 46절이 보여주는 대로 그들은 성전에서 모였을 뿐만 아니라 집에서 떡을 떼었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자기 집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모든 성도들이 다 집을 판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팔아서 나누어주는 일도 단 한 번만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특별한 필요에 따라서 수시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이런 사실에 비추어볼 때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양심적인 결단을 해야 합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팔아서 나누어주는 일에 어떻게 참여해야 할 것인지 결단할 양심의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에 대하여 자비를 베풀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구약 전통에 따르면 매 삼년마다 소산의 십일조를 레위인과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에게주어야 했습니다.

 

성령이 임한 신약 공동체는 구약 성도들보다 더 관대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었고, 그 결과로 그들 가운데 핍절한 사람이”(4:34) 없었다고 기록합니다. 그 당시 세상에서 가난한 사람이 없었다는 기록은 대단한 예외적인 기록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교제는 그리스도인의 돌봄이며, 그리스도인의 돌봄은 그리스도인의 나눔입니다. 사도 요한은 후에 그 서신 서에서 성도들을 향해서 이와 같이 권면합니다.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7-18).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는 공동체는 서로 시샘하거나 인색하게 굴지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들도 가진 것이 없다고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으며, 부자들도 가졌다고 거드름을 피우지 않는 공동체입니다. 성령이 임한 공동체는 형제의 궁핍을 돌아보며 평균케 하는 일에 기꺼이 함께 합니다.

 

성령이 임한 공동체의 세 번째 특징은 3 예배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들이 . . . 떡을 떼기를 오로지 힘쓰니라.” 성도의 교제는 서로 돌보는 일에서 뿐만 아니라 공동으로 드리는 예배에서도 나타납니다. 여기 떡을 뗀다.’는 말이나 기도한다.’는 말에도 원문에는 정관사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떡을 떼는 일은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 논란이 있지만 문맥상 단순한 식사만을 의미하기 보다는 주의 성찬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편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이 단어는 사도적 가르침과 교제 그리고 기도라는 예배적 상황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여간 초대교회 예배에는 흥미 있는 측면들이 서로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공식적인 것과 비공식적인 것이 둘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들은 성전에서도 모였고 집에서도 모였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처음 한동안 성전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물론 성전의 제사 의식에 참여했으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죽음이 성전 제사의 완성인 것을 그들은 깨닫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계속 성전의 기도 모임에는 참석을 한 것 같습니다(3:1). 물론 기도하러 올라갔다기보다 설교하러 올라갔다고도 생각할 수 있는 여지는 충분히 있습니다.

 

하여간 그들은 성전에서 모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집에서도 모였습니다. 공식적인 모임뿐만 아니라 비공식적이고 자발적인 모임들도 가졌습니다. 공식적이고 엄숙한 예배 뿐 아니라 훨씬 더 비공식적이고 활기 있는 가정 모임이 공존했습니다. 가정 교회의 원형이 거기에는 있었습니다.

 

성령이 임한 공동체는 조직적인 것과 비조직적인 것을 양극화시키지 않았습니다. 전통적인 것과 자발적인 것을 대립시키지 아니했습니다. 성령이 임한 공동체는 두 가지 형태의 예배가 다 필요했습니다.

 

또한 초대교회의 예배에는 한 편으로 거룩한 두려움이 모인 회중에 임하여 있었지만 동시에 모인 성도들의 마음에 기쁨이 넘쳤습니다. 경건하면서도 넘치는 기쁨이 그들 모임의 특징을 이루었습니다. 그들이 느끼는 그리스도의 임재하심이 예배의 경건을 주도했고, 그들이 아는 그리스도의 구원하심이 그들의 기쁨을 지배했습니다.

 

그들은 기뻐할 이유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자로 그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구원 사역의 전파를 위해 성령을 그들에게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또한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성령이 임한 공동체의 예배 의식에는 거룩한 두려움과 순전한 기쁨이 공존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권능의 역사가 나타날 때, 사람들은 두려워하는 동시에 그것은 또한 즐겁게 경축되어야만 합니다. 공적 예배는 엄숙해야 하지만 따분해서는 안 됩니다. 활기와 기쁨이 넘치는 예배는 불경건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진정한 성령의 사역이라면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도 성령의 사역입니다. 예배는 공식적인 것과 비공식적인 것이 결합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이 함께 하는 예배에는 기쁨과 두려움이 공존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임한 공동체의 네 번째 특징은 4 성장하는 공동체입니다. 지금껏 우리는 성령이 임한 예루살렘의 신앙공동체의 특징을 살펴보았습니다. 사도의 말씀, 성도의 교제, 성찬과 기도로 구성된 예배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서 성령이 임한 공동체의 모든 특징을 다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42절의 기록만 보면 그렇게 결론을 내릴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47절 하반 절을 보면 교회 내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외적인 성장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초대교회는 어떻게 성장했습니까? 전도를 위한 특별한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전도 폭발 훈련이나 이슬비 전도편지를 부지런히 띄웠을까요? 새생명 훈련이 자리 잡고 있었을까요? 초대교회의 역사적 양상을 기록한 오늘 본문에는 그런 기미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다만 성령이 임한 공동체에 두려움이 모든 사람 위에 임하여 있었고 사도들로 인한 기사와 표적이 백성들의 관심을 끌었을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이 임한 공동체의 특징적인 삶의 양식이 사람들의 호의를 받을 만 했습니다.

 

자기 것을 팔아서 나누어주는 삶의 양식도 감동적이었을 것이고. 기도하고 찬미하는 성도들의 모습도 백성들의 칭송을 받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특별한 전도 프로그램이나 성장 세미나는 없었지만 그들이 나머지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습니다.

 

이런 일반적인 상황을 염두에 두고 47절 하반 절을 살펴봅시다.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들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당시 예루살렘 성도들은 배우고 나누고 예배하는 일에 너무 전념한 나머지 세상을 향해 증거 하는 일을 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성령이 임한 공동체는 세상을 향한 사명을 잊어버릴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는 선교하는 공동체를 만들어 내시는 선교하는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임한 예루살렘의 공동체의 성장 비결은 무엇입니까? 먼저 주님 자신이 공동체를 성장하게 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께서 . . . 더하게 하시니라

 

물론 주님께서는 사도들의 설교를 사용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성도들의 삶의 모범을 사용하셨다. 성도들의 열심 있는 전도를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공동체를 성장하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교회의 머리시기 때문입니다.

 

주님만이 사람들을 성도로 변화시키고 죄인들을 구원하실 특권을 행사합니다. 우리는 복음전파를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재능과 기술을 사용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교회의 주인이신 주님을 의지하면서 이 모든 것을 사용해야 합니다.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는 표현을 한 번 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은 구원받은 자들로서 교회를 성장시켰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을 구원하지 않은 채 교회에 더하지 않았습니다.

 

동시에 교회에 더하지 않은 채 구원만 하지도 않았습니다. 신앙생활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과 부부생활은 혼자서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태어날 때부터 신앙 공동체의 일원으로 태어납니다. 교회를 어머니로 하지 않는 성도는 신앙 안에서 정상적인 성장을 할 수 없습니다. 주일 교회 출석이 없는 신자는 소속이 없는 군인과 같습니다. 구단이 없는 선수와 같습니다. 가출한 아이와 같습니다.

 

물론 혼자서도 예배드릴 수 있습니다. QT라고 말하기도 하지요. 전통적으로는 경건의 시간이란 말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함께 예배하면 혼자 드릴 때의 예배보다 훨씬 더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매주일 함께 모이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매주일 예배당에 오는 것은 선택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적 유익을 위해서는 필수적입니다. 매일 세끼 밥을 먹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그건 필수적입니다. 우리가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릴 때에 영적으로나 정서적으로 회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인터넷으로 혼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면 되지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면 모르지만 온전한 회복의 축복을 맛보려면 함께 모여서 주일마다 예배해야 합니다. 우리가 모여서 함께 드리는 예배의 유익은 다양합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이면 더 큰 기쁨과 보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배는 축제입니다. 예배는 억지로, 의무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기쁨이 되어야 됩니다. 함께 예배하면 기쁨만 커지는 것이 아니라 시각도 넓어집니다. 우리가 예배드릴 때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면 우리의 시각이 넓어집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더욱 커지면 우리가 안고 뒹구는 문제가 점점 작아진다는 사실을 경험해 보셨습니까?

 

혹시 무거운 짐을 지고 오늘 예배의 자리에 오신 분은 없습니까? 다른 성도들과 함께 예배할 때에 여러분이 이 계단을 올라오면서 느꼈던 그 중압감을 버리고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삶은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내게 샘솟는 기쁨으로 함께해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을 만나기를 바랍니다.

 

예배의 자리는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을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믿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거룩한 예배를 드릴 때, 그들이 지금껏 살아왔던, 만났던, 속했던 어떤 자리보다도 다르다는 것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곳에는 무언가가 있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예배는 좋은 전도의 수단이 됩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주일 예배에 헌신하고 있습니까? 한가할 때만 교회에 옵니까? “바쁜 일이 없으니까 오늘 교회 가자이럽니까? “요새는 삶의 여유가 없으니 하루쯤 쉬어야 하겠네?” 그래서 교회로 옵니까?

 

날씨가 좋을 때는 교외로 나가고, 날씨가 흐리면 교회로 옵니까? TV에서 재미있는 것을 하지 않는 날은 교회당으로 나옵니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매주일 예배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가족이 함께 모여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찬송하도록 원하셨습니다.

 

혹시 여기 왔다가 돌아가는 것이 예배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또 예배만 참석하고 돌아가는 것은 주일 성수가 아닙니다. 주일을 거룩히 지키는 것은 몸과 마음과 영혼이 온전한 쉼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평일에 바빠서 못하던 구역원이나 이웃을 돌아보는 일에 참여하십시오. 저는 울산교회에 소속된 모든 성도들이 다른 건 몰라도 일주일에 하루 온전히 쉴 수 있는 복을 나그네의 삶을 사는 동안에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저는 여러분이 올 한 해 동안 주일 예배에 빠지지 않겠다는 결단을 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자신만 나오기로 결단하지 말고 모시고 올만한 사람들은 함께 손잡고 오시기 바랍니다. 누군가를 데리고 예배의 자리에 나오면 여러분이 예배드리는 자세가 달라집니다.

 

주께서는 날마다 사람들을 더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임한 공동체는 전도를 간헐적으로 시행하지 않았습니다. 창립 5주년이나 10주년 등 기념사업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예배를 드렸던 것처럼 날마다 예수를 증거 했습니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 했고 큰 은혜를 받은 무리들이 나아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날마다 쉬지 아니했습니다.

 

특별한 훈련을 받은 적은 없지만 은혜 입은 성도들은 침묵할 수 없었습니다. 위협을 당하고 채찍을 맞았지만 은혜 받은 성도들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간구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공동체는 누구나 할 것 없이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했습니다. 열심히 복음을 전했기에 끊임없는 회심 자들이 생겨났습니다. 특정한 방법은 없었지만 성령이 임한 공동체에 어우러진 특징이 교회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끝으로 성령이 임한 공동체의 이 같은 특징을 살펴보면 모든 것이 관계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로 그들이 집착한 신령한 가르침은 사도들과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성령 충만한 교회는 예수님과 사도들이 가르친 것을 믿고 순종하기를 소원했습니다.

 

둘째로 그들이 나눈 교제는 그들 서로 서로와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서로를 격려해주고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면서 지속적인 사랑의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성령이 임한 공동체는 사랑하고 돌보며 나누는 공동체입니다.

 

셋째로 그들이 드린 예배는 하나님과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성전과 집에서 성만찬과 기도에서 두려움과 기쁨으로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성령이 임한 공동체는 예배의 영광을 회복한 공동체입니다.

 

넷째로 공동체의 성장은 세상과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지속적으로 복음 전도에 힘을 다했습니다. 자기중심적이고 세상과 동떨어진 교회는 성령이 임한 공동체일 수 없습니다. 성령은 선교하는 영이시기에 성령이 임한 공동체는 선교의 열기를 회복합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했습니다. 성령이 강림하심으로 오늘 우리가 아는 초대 예루살렘 교회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예루살렘 교회의 모든 특징은 성령이 강림하신 결과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우리 울산의 교회들도 초대교회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소속된 교회가 초대교회를 닮길 원하십니까? 아니 여러분 자신이 초대교회 성도답게 새롭게 되길 원하십니까? 정말 교회가 교회답게, 성도가 성도답게 되기를 소원하신다면 예루살렘 교회에 임한 성령께서 오늘 우리 지역 교회에도 임하여 주시기를 소원하고 간구합시다. 그 때 모든 지역 교회마다 성령이 임한 공동체의 모습을 회복할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