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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근두목사 설교

    영상주소
    http://vod.upcweb.net/pastor/2018_0128_정근두.mp4
    성경본문
    눅 3:15-17
    설교일
    2018-01-28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

3:15-17

구주대망 2018121일 주일 울산교회 찬송 10, 183, 191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은 세례요한이 백성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한 기록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을 띠고 세상에 왔습니다. 그러므로 그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 무슨 말로, 어떻게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소개할 것인지 많이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어떻게 소개했습니까? 먼저 그 정황을 살펴봅시다. 성령에 사로잡힌 세례 요한의 사역은 놀라운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요단강 부근 각처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요단강 부근 뿐 아니라,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들까지도 그에게 나아와 말씀을 듣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의 설교는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능력으로 전달되었습니다. 사람 사람마다 행동의 변화가 뒤따랐습니다. 일반 서민들은 물론 세리와 군병들의 생활까지 변했습니다. 당시 돈 좋아하는 세무공무원과 칼을 믿고 살던 군인들의 삶까지 변했다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이런 엄청난 요한의 사역은 자연적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이 분이 오실 메시야가 아닐까하는 추측을 하게 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하여 심중에 논의했다는 기록은, 더 적극적으로 이해하면, 사람들이 그의 설교의 결과로 더욱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도록 했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요한의 설교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오실 그리스도를 대망(待望)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대망(待望)의 불길이 요한의 설교를 듣는 가슴마다 일어났습니다.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렸다는 구절은 이런 상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말하고, 주의 이름으로 행하는 사역의 목표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임재를 느끼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오늘 제 설교도 여러분으로 하여금 오실 그리스도를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을 일으키기를 바랍니다. 또한, 은사의 발견, 사역의 기쁨을 향해 나가는 여러분들의 삶이 주위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 일으켰으면 합니다.

 

또한 요한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에 대한 궁금증이 있을 때에, 그 분을 분명히 소개할 기회로 삼았습니다. 요한은 인기와 덕망을 이용해서 사람들을 갈취하지 않았습니다. 분명한 대답을 함으로써 오시고 계신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말할 기회로 삼았습니다.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16)란 말씀은 그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 앞에서 말하는 엄숙한 순간이요, 공적으로 모든 이스라엘 앞에서 예수가 누구신지 증언하는 순간입니다. 메시야가 오시기를 기대하는 유대인 앞에서 결정적인 증언을 하는 순간이 지금 다가온 것입니다.

 

그러면, 요한은 그리스도를 어떻게 소개하고 있습니까? 첫째로, 1 자신과 그리스도의 신분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자기가 하는 일과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을, 자기가 베푸는 세례와 예수님이 베푸는 세례가 어떻게 격이 다른지를 말해줍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소개하는지 살펴봅시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오나니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능력에 있어서 탁월한 분이 오시고 있다고 소개합니다. 능력으로 말하면, 자신과 도무지 비교할 수 없는 분이 지금 오고 계신다고 소개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신분이 워낙 탁월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요한은 이 점을 알아듣도록 하기 위해서 비록 나는 여러분들에게 물로 세례를 베푸는 일을 하지만, 능력 많으신 이와 나를 비교하면,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소라고 합니다.

 

이 표현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상황을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요즘은 대학 들어가서 공부 좀 하려면 먼저 돈 걱정부터 해야 합니다. 어떤 코스에 등록해서 강의를 들어도 등록금을 내야 합니다.

 

하지만 그 때 팔레스틴에서는 돈을 받고 선생들이 학생들을 가르쳐 주질 아니했습니다. 당시는 지식을 돈과 맞바꾸던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돈 없이도 공부할 수 있었던 좋은 시대였습니다. 대신 학생들이 가르치는 스승의 고마움을 여러 가지 일들을 함으로써 표시했습니다.

 

이런 저런 스승의 일을 해 줌으로써 보답을 하던 것이 그때 제자들의 형편이었습니다. 그래서 종들이 주인에게 하는 모든 일을 제자들이 스승에게 다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단 하나의 일 만은 하지 아니했는데, 그것은 스승의 신발을 벗겨 주는 일이었습니다.

 

신발을 벗겨 준다는 것을, 우리처럼 구두를 신고 다니는 사람들에게는 전혀 이해되지 않습니다. 남이 벗겨주는 것보다도 자신이 벗는 것이 훨씬 쉬운 단화가 아니라, 군화 같은 것을 연상하면 좀 이해하기 쉬울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처럼 단화 형태로 된 구두가 아니었기 때문에, 누군가가 구부려서 신발 끈을 풀어 주는 것이 쉬웠고, 종들이 있는 사람은 그런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기록을 보면,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같은 이스라엘 사람의 종이 되면, 주인의 신발을 벗기는 일을 하지 아니했습니다. 동족 사이에서는 비록 종이라도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고, 이방 사람이 종이 되었을 경우에는 그 일을 하도록 허용했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로서 스승의 고마움을 보답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일을 해 주었지만 신발을 벗겨 드리는 일은 제자들이 하기에는 너무 심한 일로써 여겼습니다.

 

그러나 요한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나는 그 분의 신발을 벗겨 드릴 자격마저도 없다고 말합니다. ‘내게는 그 일도 과분하다는 말입니다. “오시고 있는 그 분이 워낙 위대한 분이기 때문에, 나는 신발 벗겨 드리는 일조차 시중들기에 부족한 사람이다는 것이 요한의 고백입니다. 그렇게 표현함으로써 주님이 얼마나 탁월한 분인지를 소개합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의 마음속에, 오시는 그 분의 위대함을 시원스럽게 알아듣도록 표현한 것이, 여기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설명 없이는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때 당시 사람들로서는 모두 다 오시고 있는 그 분이 얼마나 위대한 분인지 완전 실감나게 소개한 것입니다.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사랑하는 청중 여러분, 오늘 여러분이 예배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은 선지자 중 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 분은 세계 4대 종교의 창시자 중 한 분이 아닙니다. 그 분은 인류의 스승 중의 한 분이 아닙니다. 그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고백하고 있습니까? 세상은 인류의 4대 성인 중의 한 사람으로서 말합니다. 사도 요한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예수님은 결코 스승 중의 한 분이 아니며, 성인 중의 한 분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인들이나 스승들과는 전혀 비교할 수 없는 분입니다. 그는 한 번도 인류에게 살길을 가르쳐 주는 분이라고 자기를 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한 번도 생명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 주는 분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느니라.”하고 선언합니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선언합니다.

 

오늘 우리가 예배하는 주님을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이 없이는 우리의 삶이 헛되다고 말합니다. 주님을 알지 못하면 우리의 삶은 소망이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이르는 유일한 길은 당신을 통해서 만이라고 선언합니다.

 

여러분,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주장을 하는 예수께 대해서 어떻게 결론을 내릴 수가 있습니까? 예수님이 정말 그러한 분이든지, 아니든지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예배하기 위해 모인 성도들은 모두 예수님이야말로 유일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합니다. 그 분을 통하지 않고는 하늘나라에 가지 못한다고 우리는 고백합니다. 어떤 인간도 그 분의 신발을 벗겨주는 일조차 할 만한 자격을 갖춘 자가 없습니다. 그는 하늘이 땅에서 높은 것같이 류가 다른 분입니다.

 

여러분이 이 시간에 예배드리러 왔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십시오. 이 고백이 없이 드리는 예배는 가증한 것입니다. 그 분은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복스러운 소망이시요 우리의 크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분을 찬양하고 그 분께 경배 드립니다.

 

두 번째로, 요한의 소개는 2 그 분의 사역에 관련해서 입니다. 처음에는 자기의 신분하고는 다른, 탁월한 분인 것을 말씀해 주고, 이제는 하는 사역을 비교했을 때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자기가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오실 그 분, 그 능력이 많으신 그 분이 베푸실, 성령과 불로 주실 세례와 비교조차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그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요간단히 말하면 물세례와 불세례의 차이입니다.

 

요한은 그리스도 예수를 백성 앞에 선포할 때에, 2.1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라고 소개합니다. 성령 세례는 능력 많으신 이가 주시는 능력의 세례입니다. 성령과 능력을 부어주는 세례가 성령 세례입니다.

 

옛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들은 그 직분을 맡을 때 성령의 능력주심을 상징해서, 황소의 뿔에다 기름을 채워서 머리에 부었습니다. 왕이나 선지자, 제사장이 그 직분을 감당해 내기에 충분한 능력을 받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 기름부음입니다. 주님이 오셔서 하시게 될 특징적인 사역으로서 성령 세례는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요한은 예수가 누구인지를 소개해 주시기 위해 세상에 왔습니다. 마치 강사를 소개하는 사회자와 같습니다. 잠깐 등단해서, ‘지금부터 말하게 될 사람은 누구입니다라고 소개하고 내려가는 것이 요한의 직무였습니다.

 

그러기에, 요한은 지금 오셔서 사역하실 분이 누구인지를, 그 분이 하시게 될 중요한 사역을 확실히 소개해야 합니다. 어떤 말로써 예수를 소개할 것인지에 대해서 요한은 미리 생각했음에 틀림없습니다. 오시는 분이 하시게 될 일을 충분히 드러낼 수 있는 소개여야 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개가 요한복음서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가리켜서 1)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확실히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알게 했습니다.

 

수없이 드려졌던 희생제물로서 어린양을 모두들 알고 있습니다. 어린양이 상징적으로 보여준 그 일을 친히 실제로 감당하시는 분으로 소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완전히 처리해주실 분이라는 것을 선포했습니다.

 

또 하나는, 예수님이 오시면, 2)“성령과 불로써 세례를 주실 것이다하고 소개했습니다.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라고 표현한 곳은 요한복음 한 곳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라고는 복음서마다 소개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상식적으로 결론을 내릴 때에,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사역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한 사역이라고 세례요한은 생각했겠습니까?

 

세례 요한의 편에서는 예수야말로 성령으로써 세례를 주시는 분인 것을 소개해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복음서의 기자들 역시 그것은 빠뜨려서는 안 된다고 보았습니다.

 

예수께서 우리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세상 죄를 담당한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의 사역을 완수하셨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40일 동안 지상에 계셨습니다.

 

40일이 다 되어 가는 데도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다.’는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을 받으리라. . . .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내 증인이 되리라.고 자기 제자들에게 마지막 말을 남겼습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역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서 마음으로 고백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살리신 그 분의 능력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믿는데도 불구하고, 그 능력이 우리의 삶에 역사하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의 고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을 세상에 가서 전달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능력으로 전달하지 못한다는 것이 우리의 고민입니다.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세례 요한이 증거 합니다.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하고 증거 합니다. 능력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라고 그 때는 말했지만 이미 그 분은 오셔서 능력의 세례를 베푸시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능력의 세례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우편에 지금도 앉아 계십니다. 그 영광과 권능의 자리에 계신 것은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시기 위해서 거기에 계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소개하기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라고 소개합니다. 능력 많으신 분께서 오신 것은, 우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도, 신자들은 이 세례는 나와 아무 관련 없는 것처럼 살고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입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주심은 능력을 공급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것이 내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힘에 의해서 이루어지도록, 하나님은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고 싶어 하십니다.

 

어떤 때는 여러분 나름대로 기도하려고 노력하고 발버둥 치는데 말이 이어지지 않습니다. 정말 여러분이 애를 쓰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바람을 거슬려서 노를 젓고 있는, 항해하고 있는 선장처럼 힘 드는 기도를 드릴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때는 하나님이 도와주시니까 무릎을 꿇기도 전에 여러분이 해야 할 말들을 하나님이 주십니다. 그래서 기도에서 기도로 이어 나갑니다. 정말 그런 자리에서 일어날 때는, 오늘 아침에는 하나님과 이야기했다는 느낌을 갖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날은 나 혼자서 하나님과 이야기하려고 발버둥 치다가 수화기를 놓고 마는 것 같은 때가 있는가 하면, 정말 하나님과 내 마음을 열고 모든 것을 다 털어놓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렇게 만날 때도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이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수준이 있습니다. 어떤 때는 설교를 들으면 들을수록 마음이 괴롭습니다. 그 기준은 한없이 높은데, 내 삶은 아직도 계속해서 밑바닥을 헤매고 있다는 것 때문에 오히려 듣는 것이 더 괴로워 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의 영을 우리를 새롭게 하시면, 내 안에 말씀을 준행하고 싶은 욕망이 샘솟아 납니다. 그럴 때는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그것은 내게 복이 됩니다. 말씀이 분명하게 제시하면 제시할수록 내가 가야할 길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율법은 더 이상 나를 속박하는 것이 아니라 내게 가야할 길을 알려주는 방향 지시판과 같은 것입니다. 내게 이정표를 보여 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열심히 걸어가려고 할 때에, 이정표가 보이면 어떻습니까?

 

때론 몇 km 남았다고 보여줌으로써 나는 오히려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지쳐 있으면 남은 이정표는 보기도 싫습니다. km 남았다는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귀찮습니다. 내가 왜 이 길을 들어섰던고 하는 생각 밖에는 안 드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마찬가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최단 코스가 어디에 있는지 보여 주기 위해서 선포됩니다. 그러나 능력이 내 안에 없을 때는 괴롭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는 계명이 무거운 짐과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3)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괴로운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새롭게 하는 날개를 달아 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힘이 있을 때에 날개라는 것은 빠르게 날 수 있는 도구입니다. 그러나 힘이 빠지면, 날개는 없는 것이 홀가분하게 느껴질지 모르겠습니다. 그 자체의 무게조차도 견디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능력입니다. 예수는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살아나심으로써 우리를 위해 일을 다 마치질 아니했습니다.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 돌아가셨지만, 우리로 하여금 새 삶을 살 수 있는 힘을 주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은 우리 죄를 위해서 돌아가신 것 뿐 만 아닙니다. 다시 살아나셨고 당신을 죽음에서부터 살린 그 힘을 우리에게도 주시려고 아버지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보좌 우편에 앉으신 그 분은 거기에서부터 성령을 부어 주셔서 당신을 죽음에서부터 살렸던 그 힘으로 우리가 죄에서부터 이기는 삶을 살기를 바라십니다. 얽매기 쉬운 모든 것을 떨쳐 버리고 달려 나갈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 주시고자 원하십니다. 그것을 공급해 주시기 위해서 주님은 지금도 보좌 우편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 답답한 우리의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세례 요한이 소개해 줍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베푸시는 성령의 세례입니다. 이 성령의 세례는 능력이 덧입혀지는 사건입니다. 능력 많으신 이가 능력을 베푸시는 세례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초대 교회 공동체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모였습니다. 모여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하기를 힘썼습니다.

 

그리고 기다리고 있을 때에 한 날, 성령이 부어졌습니다. 이 사람들이 딴사람들이 되어버렸습니다. 이 사람들이 세상을 놀라게 하는 사람들이 되어버렸습니다. 이 사람들이 가는 곳마다 파격적인 일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지금은 한 사람 전도해서 데리고 나오려고 해도 힘이 드는데, 사람들이 먼저 와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성령으로 일할 때의 모습입니다. 바람이 우리를 향해서 부는 것입니다. 돛만 달면 그냥 됩니다.

 

그물만 던지기만 하면 그물이 찢어질 만큼 던질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이 함께 할 때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방법을 찾으려고 하지 아니하고 어쨌든 우리의 방법을 가지고 몇 마리든 낚아 올리려고 발버둥칩니다. 그러나 요한은 주님의 중요사역으로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사역을 증거 합니다.

 

마지막으로 요한은 예수님을 2.2 불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라고 소개합니다. 요한은 여인이 낳은 자 중에 가장 위대한 설교자였지마는, 천국에서는 아무리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다 했습니다.

 

요한은 아직 하나님의 나라를, 구약 선지자의 관점에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 그 일들이 이뤄질지 몰랐습니다. 주님의 초림으로 말미암을 것인지, 언제 그 일이 주님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것인지 구별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라고 소개하고, 불로써 세례를 주시는 분으로 동시에 소개합니다. “손에 키를 들고 자기 타작마당을 정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손에 키를 들고 자기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곡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주님이 다시 오셔서 하시게 될 중요한 사역은 쭉정이와 알곡을 갈라놓는 일입니다. 처음 오셔서 성령의 세례를 주시는 분이 다시 오실 때는 불로 세례를 주십니다. 쭉정이를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입니다. 심판의 불은 아직도 붙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되심을 신뢰하지 않고 그로 말미암는 구원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누구든지 이 불에 던져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운 말씀을 듣고 나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여러분의 인생에 모셔 들이지 않으면 장차 이 불에 던져질 것입니다. 한 주간, 사는 것은 여러분 맘대로 살고 주일날 여기 나오는 것만이 다른 사람과 구별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면, 여러분은 쭉정이로 분류될 것입니다.

 

쭉정이와 알곡의 차이는 겉이 문제가 아니라, 안이 문제입니다. 이 차이는 내실의 문제입니다. 겉으로 보면, 쭉정이도 그렇고 알곡도 그렇고 껍질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껍질 속에 알이 들어 있느냐에 따라서 알곡으로 분류될 수도 있고, 쭉정이로 분류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내면에 삶이 있는냐 그것입니다. 내면에 생명이 있느냐 하는 것이 알곡과 쭉정이로 갈라놓습니다. 겉으로 보면 여러분 모두가 예배의 자리에 다 나와 있습니다. 함께 찬송을 부르고 기도할 때에 아멘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내면을 보십니다. 주님은 여러분의 심령을 보십니다. 여러분의 삶의 참 모습을 꿰뚫어 보십니다. 온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는지, 아닌지를 살펴보십니다. 적당하게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지 아니면 여러분 안에 주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지 살펴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평가절하 할 수 없습니다.

 

죄인은 결코 하나님의 심판의 자리에 설 수 없습니다. 악인의 길엔 꺼지지 않는 심판의 불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이유를 모르는 사람일수록 가장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가 그 필요를 느끼든 말든 심판은 다가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오시나니라고 세례 요한이 소개합니다. 처음 약속대로 오신 주님은 약속대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처음 오실 때는 죄인을 구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오실 때는 죄인을 심판하기 위해 오실 것입니다. 누가 그의 위엄 앞에 설 것입니까? 지금 여러분에게 기회가 주어졌을 때에, 지금까지 살던 삶을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죄악 된 삶이라고 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무엇을 잘못하는 삶을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악인이라고 말할 때는 하나님 없이 사는 자를 말합니다. 죄악 된 삶의 본질은 하나님을 여러분의 인생의 중심에 모시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이 악인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하나님을 내 전부로 여기지 않는 것을 지칭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을 지어서 여러분을 여러분 되게 하시고, 지금도 살아가게 하시는 분은 대 주재 하나님이십니다. 다른 조그마한 은혜를 입으면 고맙다고 보답하면서, 내게 생명을 주시고 나를 살아가게 하시는 그 하나님에 대해서, 나를 위해서 살길을 마련해 주시고 부르고 계신 하나님에 대해서 전혀 무관심하게 사는 것이 죄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바울은 선포합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느니라 바울이 이 말을 선포하고 있는 것은, 지금 주님이 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돌이켜 사랑하지 아니하면 기다리는 것이 저주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임박한 주님 오심에 관심 없이 사는 결과는 저주와 파멸과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 밖에 없습니다. 그가 처음 오시는 것을 세례 요한이 증언했듯이 예수님은 지금도 오시고 있는 분입니다. 다시 오실 것입니다. 곧 오셔서 이제는 우리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의 오심을 내다보면서 살고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너희가 믿음에 있는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는다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여러분은 예수님이 여러분 안에 계신 것을 알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중심에서 살아 계셔서, 그 분을 영화롭게 하는 소원의 불을 붙이고 있습니까? 스스로 알지 못하면 버리운 자라고 경고합니다.

 

요한은 오시는 주님을 소개하면서 인생을 둘로 구분합니다. 알곡과 쭉정이로 구분합니다. 여러분은 알곡이든지 쭉정이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제 3의 영역을 허용하질 않습니다.

 

여러분이 알곡이든지 쭉정이든지 둘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주를 사랑함으로 그의 나라에 합당한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무도 그의 진노의 불에 던져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세례요한이 소개한 오시고 계신 분은 누구입니까? 그 신분에 있어서 탁월하신 분입니다. 그 사역에 있어서 탁월하신 분이십니다. 그는 능력의 세례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불로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오시는 그 분을 영접하셔서 오늘을 능력 가운데 살아가십시오. 오시는 그 분을 영접하셔서 심판 아래 내일 빠지지 마십시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