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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근두목사 설교

    영상주소
    http://vod.upcweb.net/pastor/2018_0204_정근두.mp4
    성경본문
    눅 11:11-13
    설교일
    2018-02-04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 . . ?

11:11-13

구주대망 201823일 주일 낮 울산교회당, 찬송 43, 185, 368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주일 세례요한의 소개를 따르면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는 분입니다. 오늘은 예수님 자신이 하신 도전의 말씀, 누가복음 1113절 후반부,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라는 중심으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이 땅을 사는 성도들에게 가장 긴급하고 중요한 기도의 제목이기 때문입니다.

 

살아 숨쉬는 성도들에게는 성령을 구하는 기도야말로, 가장 긴급하고 중요한 기도의 제목입니다. 성도답게 세상을 살기 위해서는, 올해의 울산교회 목표인 은사의 발견, 섬김의 기쁨을 맛보기 위해서는 성령의 능력이 우리의 삶에 가장 절실합니다. 이 땅의 교회가 민족의 희망이 되기 위해서 성령을 구하는 기도에 집중해야 합니다.

 

기도의 응답으로 성령께서 동시 다발적으로 신앙공동체에 임할 때 우리는 그것을 부흥이라고 부릅니다. 부흥하면 부흥회혹은 부흥사경회아니면 심령부흥회를 떠올린다면 여러분은 부흥에 대해서 새롭게 생각해야 합니다. 부흥이란 강사를 초빙해서 집회를 마련한다고 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부흥은 동시다발적인 성령의 부어주심입니다. 부흥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이고, 부흥이 일어나면 우리는 다만 그것을 의식할 뿐입니다. 달리 말해 사람이 부흥을 기획하거나 연출할 수 없습니다. 부흥은 정의상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부흥이란 하나님께서 성령의 능력을 교회에 특별하게 부어주시는 일입니다. 성령의 능력을 부어주시면, 무기력하던 성도들이 새롭게 됩니다. 능력을 입어 놀라운 증인으로서 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의 능력을 교회에 특별하게 부어주시면, 이미 주님을 믿고 있던 성도들이 새로워질 뿐만 아니라 바깥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 결과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리대로 살기 시작하고, 선한 영향을 사회전반에 끼치게 됩니다.

 

이런 부흥을 대망하며 10여 년 전에는 평양 대부흥 100주년을 앞두고 “Again 1907”을 소원하는 모임을 만들고 “Again 1907, 부흥이여 다시 오라는 찬양을 보급하고, 부흥을 위한 연합기도운동을 했습니다. 하지만 평양 대부흥 100주년이 되는 2007년뿐만 아니라 10년을 훌쩍 넘긴 아직까지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고 지나갔습니다.

 

어느 해에는 해운대백사장에서 모여서 회개운동을 하면서 하나님의 역사를 사모했습니다만 그날 비는 내렸지만 영적인 은혜의 단비는 내리지 않고 지나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관심을 가질 일은 무엇인지를 살피기 위해 부흥이란 무엇인지를 바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평양 대 부흥 100주년인 훌쩍 지난 지금까지 부흥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여전히 오늘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사모해야 할 일은 부흥을 위해 기도하는 일입니다. 성령의 부어주심을 위해서 함께 기도하기로 다시 한 번 서원하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개인적으론 성령 충만한 삶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교회적으로는 부흥이 임하는 역사를 간구합시다.

 

마치 주님이 승천하고 성령이 강림하시기까지 열흘 동안 초대교회 성도들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고 기록된 것과 같이 기도에 마음을 합하기로 결단하고 자신을 드리는 일입니다. 마치 축복해 주시지 아니하면 보내드리지 않겠다고 사생결단하던 야곱의 씨름처럼 기도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부흥을 구하는 기도는 결코 일상적인 기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일용할 양식, 일상적인 축복을 구하는 기도는 늘 해야 하지만 부흥을 구하는 기도는 이런 수준의 기도일 수는 없습니다. 일상적이지 않는 무언가 특별한 소원을 그 가슴에 품는 성도들을, 그 때처럼 일백 이십 명정도만 주신다면 새로운 부흥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1세기의 속화된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의 기도의 제목이, 그리고 우리의 기도의 자세가 바뀌어야 합니다. 교회가 세상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강하게 도래하기 위해서 우리의 기도가 바꾸어야 합니다. 사단이 기승을 부리는 세상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으려면 사생결단하고 주님께 매달려야 합니다.

 

그러면 이제 13절 끝 부분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라는 주님의 마지막 도전의 말씀에 기초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 성령에 대해서 몇 가지를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첫째로 1 성령은 아버지께서 자녀에게만 주시는 선물입니다.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여기서 너희란 하나님의 자녀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에게만 주시는 선물에 관심을 갖고, 무엇보다 우선순위를 두고 성령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말고는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고귀한 선물을 아무에게도 주시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11장 앞부분까지 성령에 대한 언급은 일체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지금 기도에 대한 교훈을 하신 후에야 비로소 성령에 대하여 말씀하신다고 생각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제목이 많겠지만 성령보다 더 절실하고 중요한 것이 없음을 새삼 깨우쳐 주시기 위함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 순간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꼭 이루어지기를 소원하는 기도 제목 한 가지씩 말하라고 한다면 무엇을 구하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중직자 여러분, 그리고 교역자 여러분, 우리 모두 여기에 일치된 소원을 가져야 합니다.

 

지난 1월부터 각 공동체를 위해서 요일마다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대체로 일상적인 기도제목들이지만 우리 모두 성령을 구하는 것보다 더 절실하고 중요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함께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일상적인 필요를 응답받든 말든 우리는 땅에서 하늘을 살게 될 것입니다. 지금 세상에서 하늘의 은혜 속에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은 우리 모두가 밤낮없이 생각하고 사모하며 기도하는 제목이어야 합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에게 성령 충만보다 더 절실한 기도제목은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주여, 성령을 주옵소서.”라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부르짖기 바랍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사람들은 주님의 이 도전의 말씀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 믿을 때 이미 성령이 그 마음속에 들어와 계시는데 무슨 성령을 또 달라고 하느냐?’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가끔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령을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을 보면 신학적으로 무식한 사람 취급을 종종 합니다. 특히 우리 보수주의 전통에서 자란 사람들 가운데 그런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하지만 무식한 사람들은 바로 그들 자신입니다. 이 땅에 복음이 들어와서 처음 세워진 평양 장로교 신학교에서는 중생과 성령세례는 서로 다른 은혜이고 중생한 성도가 성령체험을 하지 못하면 무능함을 면치 못한다고 처음부터 가르쳤습니다.

 

보십시오. 오순절 날 성령이 강림하셔서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 믿을 때에, 성령께서는 각 사람에게 믿는 순간, 임하셔서 세상 끝 날까지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은 분명한 진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을 통해 예수님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런 주장을 펼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은 오순절 성령강림 이전이었다고!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겠다.”고 도전하신 누가복음의 이 기록은 오순절 이후에 기록되었다는 것을 망각하지 마십시오.

 

만약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겠다.”는 도전이 오순절 이전의 제자들에게만 유효한 것이라면 오순절 이후에 기록된 누가복음에서 이처럼 상세하게 분명하게 기록할 이유가 없습니다. 비록 우리에게 1차적으로 말하지 아니했다고 하더라도 모든 성경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기록된 말씀인 것은 꼭 기억하십시오.

 

우리 자신의 경험을 한 번 돌아봅시다. 우리의 신앙이 성숙해짐을 따라 더욱 절실하게 느끼게 되는 사실이 있습니다. 아무리 제자훈련을 받고 성경을 많이 공부하고 기도를 많이 한다 해도 해결되지 않는 영적인 영역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흔히들 제자 훈련을 받고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면 인격과 사역에서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아름다운 모습을 갖춘다고 생각하지만 모양은 그럴 듯한데 그 속에는 능력이 없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닙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이상의 수준이 있습니다. 능으로도 안 되고 힘으로도 안 되고 오직 성령으로만 되는 그런 영역이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4:6).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구하라고 말씀하셨다고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까?

 

성령을 달라는 기도 말고는 모두 2차 적인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성령의 성령을 구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기도하라고 권해야 합니다. 하지만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바로 기도하도록 권면해야 합니다. 특히 성령을 달라는 것이 가장 절실한 소원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둘째로 2 성령은 아버지께서 주시는 가장 좋은 선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태복음에는 본문과 평행을 이루는 구절이 있습니다. 소위 산상 보훈 가운데 나옵니다. 마태복음 71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오늘 우리 본문 13절과 대조해 봅시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두 곳을 대조해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에 좋은 것이란 단어가 오늘 우리 본문 13절에 성령로 바꾸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해서 성령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좋은 선물 중에서 가장 좋은 선물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악한 인생들도 자식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을 압니다. 어떤 아비가 생선을 먹고 싶어 하는 자식에게 독뱀을 주며, 알을 달라는 자녀에게 무서운 전갈을 주겠습니까? 자식의 손에 알처럼 보이는 움츠린 전갈을 쥐어줄 부모는 없습니다. 우리 악한 자들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을 안다면 하물며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실 줄을 아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늘 아버지께 그동안 무엇을 구해왔습니까? 생선과 달걀, 아니면 빵을 구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까? 이제 가장 좋은 선물인 성령을 구해 보십시오. 여러분과 저는 성령을 구하도록 초대받은 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궁극적인 선물은 그 분 자신입니다. 이제부터 하나님 자신의 영을 구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아버지를 주십니다. 지금 예수께서는 아버지와 함께 성령을 구하라고 초대하십니다. 우리를 인도하시고 보호하시고 복 주시는 성령님을 구하십시오. 성령께서는 이미 모든 성도들 가운데 거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또 다른 모습으로 우리 속에 찾아오시기를 원하십니다.

 

요한복음 1416, 17절에서 주님은 다음과 같이 약속합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지금)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장차)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14:1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버지께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면 우리의 삶은 변합니다. 평소에 불만스럽게 여기던 것들이 감사와 찬양으로 바뀝니다. 성령의 은혜가 임하면 평소에 나는 못해하고 체념하던 삶이 바뀝니다. 불가능이 없는 삶으로 변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4:13)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능력을 받는 것만큼 좋은 것은 없습니다. 성령의 은혜는 좋은 것 중의 좋은 것이요 하나님이 주시는 것 중에 가장 좋은 선물입니다. 주님이 친히 제자들에게 일러주신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14:12).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세상 죄를 담당하신 주님이 부활, 승천하여 아버지께로 가셔서 영광을 받으시면 성령이 제자들과 함께 계시는 새로운 차원의 교제가 시작됩니다. 그때 성도들은 새로운 차원의 사역을 행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성령은 아버지께서 아무에게나 주시는 선물이 아니고 구하는 자녀에게 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아버지께서 자녀에게 주시는 선물로서 성령에 대해서 살피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 믿고 중생 받을 때 우리 마음에 오시는 성령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 오신 그 성령께서 다시금 능력으로 은혜를 베푸시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 믿을 때 한 번 성령을 모시는 것으로 평생 동안 성령 충만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땅에서 경험하는 천국생활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경험으로 보나 많은 위대한 선배들의 삶을 두고 보나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특별히 성령을 구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을 구해야 합니다. 구하지 않으면 성령 충만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잘못된 장로교 신학의 틀에 안주하는 사람들은 성령을 구하라는 말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성령이 이미 우리 안에 계신데 감사하면 되지 무슨 성령을 또 구하느냐?’는 생각에 사로잡혀 성령을 구하라는 말이 귀에 잘 안 들어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우리 한국장로교의 가장 원천적인 신학의 요람이던 평양신학교에서, 당시 조직신학교수인 이율서 교수가 감수와 서문을 쓴, 1931년에 교재로 번역된 가옥명의 책에서는, 중생과 성령세례가 구별되는 은혜임을 밝히며, 성령세례를 받지 않으면 신자가 무능함을 면치 못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해 기도에 힘쓰도록 강조한 것이 처음부터 우리 한국 장로교의 입장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귀담아 듣지 않고 있는 가운데 지난 20세기 초반부터 세계 교회 역사에 새로운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별로 건전한 신학이나 체계적인 교리도 없는 사람들이 다만 성경에 있는 말씀 그대로를 붙들고 주여 성령을 주옵소서.”라고 간절히 구하자 하나님께서 놀랍게 응답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한 번 있다가 사라지는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통해서 시작된 성령의 불길은 20세기가 끝나도록 전 세계로 확산되어갔던 것입니다. 남미를 휩쓸고 아프리카를 강타했습니다. 우리 기성교회가 잘못된 교리의 틀에 갇혀서 성령을 구하지 않으니까 하나님께서 엉뚱한데서 불을 지피신 것입니다.

 

대체적으로 말하면 오늘날 전 세계 기독교인 가운데 3분의 1은 성령을 구하여 성령의 역사를 실제로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나머지 3분의 2는 성령을 알고는 있지만 아직 구하지 않아서 성령이 어떤 분인지 실제적으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장로교 인이 성령을 구하지 않는 것은 자신의 교리와 역사를 망각한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과 같습니다. “성령하면 오순절 파의 독점물인양 생각하는 무식이 판을 치는 현실을 우리는 안타까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 세기 영어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장로교 신학자로 인정받는 워필드는 이렇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발전된 성령교리는 배타적으로 신교 교리이며, 좀 더 자세히 말하면 개혁주의 교리이며, 더 정확히 표현하면 청교도 교리라고 선언합니다.

 

주님, 성령을 주십시오.”라고 구하는 것은 결코 이상한 기도가 아닙니다. 주님은 구하는 자에게성령을 주시겠다고 주님은 도전하십니다. 성령 체험은 그리스도인이 제대로 사역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제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능력 있는 증거와 탁월한 봉사를 하는 사람 치고 성령 체험을 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전도를 빼어나게 잘 하는 사람, 목회와 선교에 탁월한 사역을 하는 사람은 모두 성령체험을 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축복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것을 향한 소원을 아뢰어야 합니다. 그 분을 찾으십시오. 그 분을 사모하십시오. 그 분 없이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 분을 항상 갈망하십시오. 이 축복은 기도로 얻어지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하이델베르그 교리 116문답은 이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왜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도가 필요합니까?” 거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분의 은혜와 성령을 마음으로 끊임없이 탄식하며 구하는 자들과,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들에게만 주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하늘로 올라가시고 기도하기 시작하던 그 첫날 제자들처럼 성령을 기다립시다. 성령 안에서 기도하며, 성령을 달라고 구하는 긴박한 기도를 주 임무로 삼읍시다.

 

더 많은 성도들과 교회들이 더 긴박한 심정으로 구하게 될 때 새로운 부흥이 이 땅에 임할 것입니다.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그리고 이 땅의 회복을 위해서 중보의 기도를 드리기로 결단합시다. 그러면 하늘의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긍휼히 여기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시급한 일은 우리 자신이나 민족의 상태의 심각성을 깊이 인식하고, 자신을 이 숭고한 사역에 드리는 사람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 하나님의 직접적인 활동인 부흥의 징조이기 때문입니다. 첫 부흥인 사도행전의 오순절 역사로부터 시작해서 교회사를 보면 부흥이 일어나기 전에는 항상 이렇게 능력을 구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대개 백년을 주기로 일어나는 새로운 부흥이 이 수년 내에 반드시 일어나야 이 민족이 다시 한 번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에 쓰임을 받을 것입니다. 평양 대 부흥이 일어난 지 꼭 100주년을 11년이나 넘긴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부흥이 이 땅에 시작되면 깊은 죄악의 잠에서부터 교회를 불러 깨우는 하나님께 쓰임 받는 놀라운 도구가 될 것입니다. 그 때 잦아든 교회의 영적 생명의 흐름이 폭포수와 같이, 대하(大河)와 같이 민족역사의 중심흐름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영광스런 미래를 사모하기 때문에 오늘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혹시나 하는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지만 이 모든 사역의 중심에 우리 자신이 너무나 부각되어 있다는 불안감을 떨쳐 내기가 힘듭니다.

 

여러 조직은 만들어졌고 대회도 많이 구상되었지만 과연 그것이 다시 한 번 이 땅에 부흥을 가져오는 마중물 역할을 할 것인지에 대한 의구심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부흥은 하나님의 주도적인 개입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조직을 만드는 일에 열정을 쏟는 대신 오히려 이사야가 드린 것처럼 기도에 자신을 드리는 주의 종들이 나타난다면 이 땅을 새롭게 하는 부흥의 도래, 그 분명한 조짐이 될 것이라고 믿으며 그 옛날 이사야처럼 여러분과 함께 기도드리고 싶습니다.

 

주여 하늘에서 굽어 살피시며 주의 거룩하시고 영화로운 처소에서 보옵소서 주의 열성과 주의 능하신 행동이 이제 어디 있나이까 주께서 베푸시던 간곡한 자비와 사랑이 내게 그쳤나이다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하지 아니할지라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옛날부터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라 하셨거늘 . . . 우리는 주의 다스림을 받지 못하는 자 같으며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지 못하는 자 같이 되었나이다”(63:15~16, 19)

 

이제 말씀 맺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은 구하는 자들에게만 주십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은 그것으로 인해 감사하는 자들에게만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으로 끊임없이 탄식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마음으로 탄식하며 구하는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의 내용과 기도의 모습은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기도하는지 바로 인식한다면 이제 우리는 새롭게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누구에게 기도하는지 바로 인식한다면 이제는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정말 우리가 궁극적으로 성령의 능력을 구한다면 우리는 강청하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그 때 우리는 자신을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사단을 이기는 성도가 될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성령의 능력을 소유한 성도로 세상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이 특별한 능력을 공급받는 것은 얼마든지 반복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