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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근두목사 설교

    영상주소
    http://vod.upcweb.net/pastor/2018_0325_정근두.mp4
    성경본문
    누가복음 23장 50-56절
    설교일
    2018-03-25

예수께서 장사되시다.

23:50-56

구주대망 2018325일 주일예배 찬송 33, 88, 150

 

봄의 한 가운데 3월 마지막 주일부터 4월 말까지 누가가 전하는 예수님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을 살피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을 살피고, 누가복음 마지막 장으로 들어가서 서너 차례 더 살피면, 그동안 참 오래 동안 살피던 누가복음 강해설교를 모두 다 끝내게 됩니다.

 

물론 매 주일 누가복음 강해설교를 하진 않았지만 울산교회에서 첫 설교를 한 것으로 기점을 삼아도 22년 동안 계속한 설교를 모두 끝내게 되는 셈입니다. 그동안 기도해 주시고 매주 기다려 주신 성도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바로 앞부분은, 지난해 4월에 살폈던 십자가 위에서 하신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였습니다. 주님은 마지막 기도를 드리고 십자가에서 운명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의 반응을 누가는 간결하게 기록했습니다.

 

먼저 형을 집행한 백부장은 예수님의 운명을 지켜보고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47)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다음에는 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들의 반응입니다. 그들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치며 하나둘씩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아는 자들과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의 반응을 누가는 기록합니다. 비록 예수님을 아는 자들이고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추종자들이지만, 그들은 모두 다 멀리 서서 이 일을 보니라”(49)고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서슬 시퍼런 형 집행의 불똥이 튈까봐 그랬는지 모두 다 멀리 서서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습니다. 십자가형은 집행되고 예수께서 숨을 거두셨지만 그 시신을 거둘 사람은 주변에 아무도 보이지 않는 황당한 상황입니다. 남편이 숨을 거두었는데, 젊은 아낙이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는 처지를 떠올려 보십시오.

 

제자들은 도망가고, 나머지 예수님을 아는 자들과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은 다만 멀리 서서 바라보기만 하는 상황에서 오늘 우리의 본문이 이어집니다.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23:50) 좀 갑작스런 느낌이 드는 구절입니다.

 

그것을 부드럽게 연결하기 위해서, 사실 헬라말 원문에는 , 보라라고 번역할 수 있는 접속구절이 있습니다만 번역자들은 별 생각 없이 생략한 듯 보입니다. 보십시오. 지금 범죄자로 형이 집행된 사형수가 숨을 거두었지만 수습할 사람이 가까이 아무도 없습니다. 몇 시간 후 밤이 찾아오면 안식일이 시작됩니다.

 

이 막막한 상황에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누가는 두 절(50~51)을 할애해서 그를 소개합니다. 마치 보라! 요셉이라는 사람을!”하고 소리치는 것 같습니다. 비록 제자들을 떠나가고 평소에 아는 사람들, 갈릴리에서부터 따르던 여인들마저 멀리 서 있는 난감한 상황에 *하나님이 준비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이름은 요셉이고 유대인의 최고의결기관 칠십인 가운데 한 사람인 공의회 의원입니다. 사 복음서가 예수님의 장례를 치룬 이 사람을 소개할 때 모두 아리마대 사람이라고 합니다만 누가는 유독 착하고 의로운 사람이라고 그를 소개합니다.

 

마태와 요한은 그를 가리켜 예수의 제자라고 소개하고, 마가와 누가는 존경받는 공회원” “공회 의원으로 각각 소개하는 동시에 둘 다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으로 그를 소개합니다. 그러나 오직 누가만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라고 그를 소개합니다.

 

그리하여 누가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성도들은,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에 나온 선하고 의로운 사람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의 생애의 중요한 시점, 그의 탄생과 죽음을 배경으로 누가는 의인들을 등장시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항상 의롭고 경건한 사람들을 통해서 전개되나 봅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탄생을 배경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었던 사가랴와 엘리사벳, 의롭고 경건한 자 시므온,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겼던 선지자 안나를 우리는 기억할 수 있습니다.

 

의롭고 경건한사람들이 예수님의 탄생을 전후해서 주님을 맞이하는 일을 했다면, 예수님의 장례를 받드는 인물도 선하고 의로운요셉이라는 것은 캐스팅에 있어서 신의 한 수라고 우린 고백해도 좋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캐스팅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신분이나 위치를 돌아보기에 앞서서 여러분의 삶의 자세를 먼저 살펴보십시오. “선하고 의로운요셉은 그 삶의 지향점이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데 있었습니다. 올 들어 두 달을 보내면서 여러분은 어떤 복을 빌고, 빌어주고 있습니까?

 

선하고 의로운 성도의 시선은 멀리 하나님의 나라를 대망하며, 동시에 바로 눈앞에 일어나는 일들 가운데서도 불의한 일에 가담하지 말아야 합니다. 보십시오. 선하고 의로운아리마대 요셉은 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한 자라”(23:51)고 기록합니다.

 

6월 지방선거에 참여할 때나 혹시 있을 수 있는 헌법개정투표라면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세상의 결의와 행사에 우린 찬성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방향과 목적에 함께 할 수 없다면 성도의 목소리를 분명하게 나타내어야 합니다.

 

특히 여기서 누가는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라고 아리마대 요셉을 소개하면서도 마태가 소개한 부자라는 사실은 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누가가 명시적으로 요셉을 부자라고 밝히지는 않았지만 그는 부자였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개인무덤을, 그것도 바위를 파서 준비할 수 있을 만큼 엄청난 부를 가진 사람입니다. 요즈음도 자연훼손을 해가며 가족묘원을 만드는 사람들은 돈이 있는 사람들이 틀림없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야 공원묘지에 자기 누울 자리하나 미리 마련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2천 년 전에 바위를 파서 무덤을 만드는 일은 정말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다이나마이트도 포클레인도 없던 시절에 바위를 파서 무덤을 만드는 일에는, 오늘날 가족묘원 마련하는 것과는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비용이, 들어갑니다. 상위 1%가 아니라 상위 0.001%라야 할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늘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따뜻한 마음을 갖고 있던 누가는 지위와 부를 가진 요셉이었음에 틀림없지만, 요셉의 지위와 부를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그의 더 고귀한 품성을 강조해서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예수 잘 믿으면 부자가 된다고 말하는 곳이 아닙니다. 예수 잘 믿으면 부자가 된다고 말하면 신도들에게 사기를 치는 것입니다. 어떤 종교든지 자기 종교를 잘 믿으면 무병장수(無病長壽)하고 부귀공명(富貴功名)을 누린다고 부추기면,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사교(邪敎)가 틀림이 없습니다.

 

부자가 되는 일은, 더더욱 상위 영점 몇 %의 부자가 되는 일은, 위에 계신 대 주재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목표를 정해서, 밤잠 자지 않고 노력한다고 성취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부자가 되게 하셨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살피는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부하든 가난하든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 되도록 교회가 권면하고 성도들이 애써 노력하는 일은 모두가 지향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 존귀하게 여김을 받는 곳이어야 합니다. 가진 사람이나 잘 나가는 사람보다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 인정받는 교회가 되도록 노력합시다.

 

오늘 우리 본문에 등장한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특이한 점은 그가 가진 부에 있질 않습니다. 잘나가던 그의 신분에도 있질 않습니다. 그는 그가 가진 것을 모두 아낌없이 주님을 섬기는 일에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보십시오. 아리마대 사람 요셉그의 신분을 사용하여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서 발 벗고 나서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본문은 이 사람이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신을 내어 달라고 요청하였다.”(52, 새번역)고 기록합니다.

 

그러나 요한의 기록을 보면,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19:38)라고 합니다. 그동안 요셉은 유대인을 두려워해서 자신의 신앙을 그동안 드러내지 못한 숨은 제자였습니다.

 

그래서 의회의 결정과 처사에찬성하지 않으면서도 제자의 신분을 숨기고 처신하던 그 자리에서, 이제 커밍아웃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기다려온 산헤드린의 숨은 제자 요셉은 이제 예수님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15:43)고 요청합니다.

 

비록 그가 마음으로 따르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처형되었지만 오히려 이 사건 이후에 자신이 제자임을 당당히 드러냅니다. 거짓 신앙은 기대가 어긋나면 움츠려듭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은 자신의 기대가 비껴가도 하나님께 더욱 자신을 의탁합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라는 표현은 신앙의 진수를 드러내는 말입니다.

 

이 신앙은 다니엘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3:17,18)

 

왕후 에스더의 고백에 담겨있습니다.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4:16)

 

그뿐 아니라 하박국의 고백 속에도 자리하고 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3:17, 18)

 

4복음서 모두 아리마대 요셉의 담대한 모습을 같은 어조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죄인으로 언도되어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자신의 신앙과 소속을 드러내는 행동이며, 그로 인해 자신에게 돌아올 불이익을 달게 받아드리는 자세입니다.

 

지금껏 제자로서 그의 처신은 누가 보아도 칭송받을만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는 이 절박한 상황에서 공의회 의원이란 자기의 신분을 사용해서 장례를 위해 나섰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자기가 가진 엄청난 재산조차 선뜻 내어놓고 있습니다.

 

아직 아무도 묻힌 적이 없는, 바위를 파서 만든 무덤에다가 주님의 시신을 모신 것은 오늘 우리의 문화에서 어떤 의미일까요? 돈 벌어서 마음먹고 새로 지은 전원주택을 딱한 처지의 친구에게 선뜻 내어주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직 자기도 타보지 않는 새로 뽑은 외제차를, 친구에게 선뜻 내어주는 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아리마대 요셉은 이런 상상을 초월한 헌신을 공동체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우린 이런 사람을 일컬어 연보의 은사를 가진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을 향해서, 그의 익명성을 누가 비난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이와 같은 관대함은 그에게 주신 은사를 생각하게 만듭니다.

 

후한 연보의 은사를 행사하는 것 이상으로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서 헌신합니다. 비록 한 때는 제자인 것을 감추고 살았지만, 하나님이 감동하실 때 두려움 없이 당돌하게 요청하기도 하고, 사람들이 상상을 초월한 고귀한 헌신을 했습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나서지 않았다면 예수님의 시신은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해 보십시오. 어두움이 깔리자 십자가에서 내려지긴 했을 것입니다. 비록 처형당한 죄수의 시신이지만 밤에 나무 위에서 이슬을 맞도록 하는 것은 식민지 유대문화를 거스른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별 것 아닌 것으로 다스리는 백성들과 불화를 조장하는 것은 통치자에게도 지혜로운 일이 아닙니다. 게다가 뒷날은 유대인들에 성스러운 안식일이자, 유월절이었으니 십자가에 시신을 매달아 둔 채 예배하도록 방치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군병들을 시켜서 시신을 내려서 거적으로 싸서 어딘가에 내던져 두었을지도 모릅니다.

 

임시방편으로 공동묘지에 가매장(假埋葬)하듯이 취급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여간 뒷날 새벽에 몸이 다시 살아나셨든 들, 부활로 인정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런 상상을 통해서 우리는 아리마대 요셉의 헌신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비록 한 때는 숨어있던 제자였지만 본문의 아리마대 사람 요셉을 향해서 과연 누가 비난의 돌을 던질 수 있을까요? 그는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려서, 삼베로 싼 다음에, 바위를 파서 만든 무덤에다가 모셨다.”(53절상, 새번역) 어떤 제자도 엄두를 낼 수 없는 소중한 사역을 본문의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감당했습니다.

 

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어 두니”(53절상, 개역개정)는 기록을 좀 더 자세히 살펴봅시다. 누가는 다른 어떤 복음서 기록보다 간결하게 이 부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려서,”라는 기록도 좀 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비록 그가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려서라고 기록되었다고 해서 꼭 문자적으로 아리마대 요셉이 혼자서 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문자에 매인 생각입니다. 혼자 힘으로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어쩌면 로마의 군병들이, 아니면 그의 개인 일꾼들이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시신을 내리는데 힘을 합했을 것으로 보아야 타당합니다.

 

십자가에서 내린 후에 *삼베로아니면 세마포로”* 싸기 전에 피로 얼룩진 시신을 깨끗이 씻는 일도 생략할 수 없는 순서입니다. 그러고 나서 비로소 천으로 싸는 절차가 따르게 됩니다. 누가의 본문은 간략하게 언급하지만 삼베로만 싼 것이 아니라 요한복음에 의하면 엄청난 분량의 향품을 넣어 삼베로 쌌다고 보아야 합니다.

 

또 전에 예수를 밤중에 찾아갔던 니고데모도 몰약에 침향을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왔다. 그들은 예수의 시신을 모셔다가, 유대 사람의 장례 풍속대로 향료와 함께 삼베로 감았다.”(19:39, 40)고 기록합니다. 만약 요셉 자신이 준비한 것이 없었다 하더라도 백 근쯤이란 약 32.5킬로그램입니다.

 

이 분량은 왕의 장례식에 사용되던 향품의 양이라고들 말합니다. 요셉에 의해서 치러진 예수님의 장례는 예수님의 죽음이 죄인의 치욕스런 죽음이 아니라 고귀한 왕의 죽음이었음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요셉의 이런 적극적인 행위는 예수님의 시신이 신명기의 율법을 어기지 않도록 했습니다.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21:22, 23)

 

요셉은 시신을 다루는 일이 안식일을 앞둔, 유월절을 앞둔 자신을 더럽히는 행동임에도 불구하고 신신하게 잘 감당하는 섬김의 은사를 보여 줍니다. 계명을 핑계해서 눈앞에 있는 일을 피해가는 대신에, 비록 자신은 부정해지더라고 자기 외에는 할 사람이 없는 절박한 섬김으로부터 도피하지 않는 것이 바른 신앙인의 모습이요 섬김의 기쁨을 맛보는 지름길입니다.

 

그러면 이제 유대 사람의 장례 풍속대로 향료와 함께 삼베로 감은 시신은 무덤으로 옮겨집니다. 누가는 예수의 시신을 모신 무덤에 관해서 몇 가지 정보를 우리에게 제공합니다. 첫 째로 그 무덤은 바위를 파서 만든 무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린 그런 무덤을 별로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릴 적에 바위를 파서 만든 무덤에 대해서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제가 본 무덤은 주로 밭 주변이나 아니면 산에 있는 많은 무덤들은 모두 둥그런 봉오리 형태였기 때문입니다. 틀림없이 우리 가운데도, 바위를 파서 만든 무덤이라고 설명해도, 무덤하면 흙을 파서 관을 묻고, 지면 위에 둥그렇게 봉분을 한 것을 계속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당대에 바위를 파서 만든 무덤이라면 아무나 가질 수 없는 무덤입니다. 정말 엄청난 부를 가진 사람만이 소유할 수 있는 호사입니다. 이 시대라면 전용비행기라도 가질 만한 사람들이나 소유할 생각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이사야의 예언의 성취를 또한 떠올립니다. 그는 폭력을 쓴 일도 없었고 거짓말을 한 적도 없었지만 세상이 그를 죄인들과 함께 처형하고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53:9) 의미를 살리기 위해서 현대어 성경과 개역성경 번역을 짜깁기했습니다.

 

누가가 밝힌 두 번째 사실은 그 무덤은 아직 아무도 묻힌 적이 없는 것이었다.”(53절하, 새번역)는 사실입니다. 아무도 묻힌 적이 없는 바위를 파서 만든 새 무덤에 주님의 시신을 안치함으로 주님의 부활은 더 분명히 확증될 것입니다.

 

아무도 장사한 일이 없는 곳이기에 다른 사람이 아닌 예수님의 부활이 확실하며 바위를 판 무덤이기에 다른 통로가 전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은 그 입구를 연자 맷돌 같은 돌로 된 문으로 막고 군병들이 지켰으니 예수님의 시체는 도둑을 맞을 수도 없고 처음으로 묻혔으니 다른 시체와 바꿔치기 할 수도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이 부활의 확실성을 입증하기에 바위로 판 무덤은 안성맞춤입니다. 부활을 부인하는 이들의 말이 근거 없음을 보여주고, 예수님의 시신이 왕과 같이 존귀하게 안치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거룩한 장례는, 마치 예수님의 출생이 그 어머니 마리아만의 독점사역이듯이, 예수님을 장사하는 일은 아리마대 요셉의 독점사역입니.

 

한 때 숨어있었다고 해서 그를 비난하는 것이 온당치 못한 것처럼 혹 지금 여러분의 기준으로 볼 때 마음에 들지 않는 신자를 비난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합니다. 대 주재 하나님께서 언제 어디에 그를 들어 쓰실지 우리는 모릅니다.

 

오늘 우리의 눈에 흡족하지 못해도 그 때 우리 누군가도 할 수 없는 일을 위해 주께서 남겨두신 카드일 수 있습니다. 자기를 기준으로 남을 판단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오늘 숨어있는 자신의 게으름을 둘러대는 핑계로 사용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다른 사람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위해서 꼭 기억하십시오.

 

 

은사란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신 특별한 능력으로 다른 사람들을 내 기준으로 판단하면 마음에 흡족하지 못한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에게만 주신 특별한 능력으로 우리를 평가하면 우리의 행동인들 형제의 마음에 흡족할까요? 자기의 은사로 남을 판단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옳지 못합니다.

 

하여간 한 때 숨어있던 제자 아리마대 요셉은, 주님의 장사지냄과 관련해서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는 독보적 사역을 감당한 것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의 마지막 문단을 살필 차례입니다. 본문 첫 네 절은 요셉에 대한 설명과 요셉의 사역에 대한 기록이었다면, 본문의 뒷부분, 나머지 세 절은 여자들의 처신과 마무리 준비에 대한 기록입니다.

 

본문 54, 55. 56절로 가봅시다. 첫 구절과 끝 구절에서 안식일이라는 단어가 반복됩니다. 그 날은 준비일이고, 안식일이 시작될 무렵이었다.”(54) “여인들은 계명대로 안식일에 쉬었다.”(56절하)

 

안식일이란 시간 배경이 반복 언급되어서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날은 준비일이란 언급도 안식일에 관련한 준비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리고 그 시간은 안식일 준비로 바쁜 시간입니다. 이제 막 해가 질 것이고 이어서 안식일이 시작될 것이기에 서둘러 장례를 집행해야 합니다.

 

물론 오늘날 우리들은 공적으로 자정을 새날의 시작으로 간주합니다. 하지만 아직도 관습적으로는 아침 해가 뜨면 하루가 시작하는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오늘 우리와 달리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라고 창세기에서부터 표현하는 문화입니다.

 

해가 꼴깍 넘어가고 서쪽 하늘에 별이 뜨면 새날이 시작하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십자가에 처형되고 십자가에서 내려진 금요일 시간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 날은 준비일이고, 안식일이 시작될 무렵이었다.”54절은 긴박하게 장례를 진행했던 요셉의 행동을 설명해 줍니다.

 

그 날은 준비일이고, 안식일이 시작될 무렵이었다.”54절은 동시에 이어지는 여인들의 바쁜 행동을 설명해 줍니다. 긴급하게 필요한 모든 것들은 해 질 때까지 남아 있는 짧은 시간 안에 다 마쳐져야 합니다.

 

오늘 우리 본문의 요셉과 여인들은 모두 이 준비일을 준비일답게 보내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준비일은 안식일에 안식하기 위해 준비하는 날입니다. 하지만 본문에 나오는 이들은 자신들의 안식일 준비에 사용하지 않고 참된 안식을 주시는 예수님을 위해서 이 날을 준비하는 일을 위해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는 예배하는 주일 앞의 날 토요일이 준비일입니다. 토요일을 예비일로서 알고 있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아예 그런 개념을 갖고 있지 않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우리 모두 그런 개념을 갖지 말도록 권장하는 것이 옳을까요? 아니면 토요일을 예비일로 삼는 일을 권장하는 것이 옳을까요?

 

저는 울산교회 담임 목사로서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이 수천 년 전부터 지켰던 예비일을 지키도록 권장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성경의 기록은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것은, 우리에게 교훈을 주려고 한 것이며, 성경이 주는 인내와 위로로써, 우리로 하여금 소망을 가지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15:4)

 

하긴 예비일은 그만두고 예배하는 주일 당일조차도 아무런 구별 없이 사는 분들도 적지 않은 현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대로 살기로 결심하는 성도들을 위해서, 그들의 유익을 위해서 신앙인의 규범을 가르치는 일에 게으르지 않도록 목자의 사명에 끝까지 충실하겠습니다.

 

마지막 문단에 등장한 여인들은 누구이며 그들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를 따라다닌 여자들이라고 누가는 기록합니다. 오늘 우리 본문 바로 앞 49절에는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를 따라다닌 여자들이란 동일한 표현이 나옵니다.

 

사도행전의 표현을 빌리면 사도의 천거기준으로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를 들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 남자들에 맞먹는 기준이 바로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를 따라다닌 여자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여인들은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라서 여기까지 온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지켜봤고 요셉이 어떻게 예수님의 시신을 모셨는지를 지켜본 여인들입니다. 요셉의 뒤를 따라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두었는지를 보고돌아가서 그 짧은 남은 시간 안에 향품과 향유를 준비한 재빠른 여인들입니다.

 

각자 본문연구를 해 온 다음 교역자 다섯 명이 함께 나누는 시간에 누군가가 질문했습니다. 왜 여인들은 따로 향품과 향유를 준비했는가를 물었습니다. 앞서 설명한대로 이미 니고데모의 도움으로 준비해서 세마포와 함께 쌓던 향품과 향유의 양이 엄청났는데 왜 여인들은 그 바쁜 시간에 또 왜 향품과 향유를 준비했을까요?

 

남자들이 하는 것을 지켜보면 저래가지고는 안 된다 싶은 마음이 왜 들지 않았겠느냐는 여인들의 입장을 옹호하는 목사님들도 있었고, 아니면 돌아가신 분에 대한 예의는 각자가 성의를 다하는 것이기 때문일 거라는 추측도 있었습니다. 하여간 왕의 장례에 어울릴만한 양을 보고도 나름 또 준비한 것을 보면 우린 어쨌든 여인들의 마음을 다 알지 못하는 남자들일뿐입니다.

 

어쨌거나 안식일이 지나고 아침이 되는 새날 이른 아침에 예수님의 시신에 정성껏 준비한 향품과 향유를 드리려고 준비를 완료했습니다. 부활에 대한 기대가 애시당초 조금도 없었던 그들로서는 정성껏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는 것을 매우 중요한 마지막 예를 표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도망친 자리에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를 따라다닌 여자들을 등장시킴으로 누가의 따뜻한 시선이 여인들에게 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인들은 제자들이 도망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사실 복음서의 많은 기록은 여인들의 눈이 관찰하고, 여인들의 입이 전해준 결과로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서쪽 하늘에 별이 반짝입니다. 이제는 안식일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누가는 여인들은 계명대로 안식일에 쉬었다.”고 기록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고 싶은 뜨거운 마음은 있었지만 하나님의 율법 또한 범하지 않으려는 그녀들의 모습에서 우리가 배울 점은 없을까요?

 

율법의 규정 안에서 사랑의 실천을 하려는 태도가 아닐까요? 진리 안에서 사랑을 말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자세를 우린 배우고 싶습니다. 우리의 간절함이 솟구칠 때도 하나님의 말씀의 범위 내에서 실천하기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우리의 욕망의 크기가 아니라 말씀의 범위가 행동의 지침이어야 합니다.

 

정말 우리는 급한 일에 쫓겨서 하나님이 명하신 말씀을 소홀히 하는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하루해가 뜨면 꼭해야 하는 일이 있는 사람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아무리 급박해도 하나님이 금하신 선을 넘어가지 않는 사람이 선하고 의로운사람입니다.

 

모든 것을 아버지께 맡기고 지옥의 고통까지 맛보고 이제 무덤에 머물러 죽음을 맛보셨습니다. 오로지 하나님만 기다리고 아버지의 일하심을 바랄 뿐입니다. 우리도 우리가 모든 것을 다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 밖에 없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보십시오. 여기 죽을 수 없는 분께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존귀한 자처럼 시신을 다루도록 하시고 부자의 무덤에 장사되도록 하셨습니다. 그 모든 절차에도 율법의 세세한 부분까지 구약예언을 성취하십니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완벽한 계획서입니다. 앞으로 일어나는 모든 우주적인 구원까지 성경대로 이뤄질 것입니다.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난리와 난리의 소문이나 지진과 온갖 천재지변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아버지의 계획을 넘어가는 일은 하나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보십시오. 하고 싶은 일도 밀쳐두고 여인들은 계명대로 안식일에 쉬었다.”고 기록합니다. 율법을 따라 사는 삶이 가치 있는 삶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삶이 의미 있는 삶입니다. 마지막 기록, 여인들은 계명대로 안식일에 쉬었다.”는 것을 우리의 삶의 기준으로 삼기 바랍니다.

 

이 기록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예수님의 부활도 반박할 수 없는 진리의 반석위에 세운 여인들에 대한 누가의 찬사입니다. 여인들은 계명대로 안식일에 쉬었다.” 올해는 계명대로 주일을 지키는 복된 자리로 나아가서, 하나님의 찬사를 듣는 성도들이 되길 빕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