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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근두목사 설교

    영상주소
    http://vod.upcweb.net/pastor/2018_0401_정근두.mp4
    성경본문
    눅 24:1-12
    설교일
    2018-04-01

말씀을 기억하라

24:1-12

구주대망 201841일 부활주일예배, 찬송 25, 160, 161

 

부활의 첫 새벽, 무덤을 향해서 가고 있는 여인들이 있습니다. 손에는 정성껏 예비한 향품을 들고 종종걸음으로 무덤을 향해서 가고 있습니다. 열린 무덤 안으로 들어가면서도 예수의 시체를 찾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부활의 첫 새벽에도 그들의 마음은 시체에 있습니다. 무덤이 열린 것을 보면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열린 무덤 안으로 들어가면서도 계속 시체를 찾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여인들의 사랑과 정성을 아무도 비난할 수 없습니다.

 

갈릴리에서부터 주님의 사랑 때문에 함께 올라온 이들이고, 비록 십자가에서 그들의 소망과 기대가 무너져 내렸지만,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던 예수에 대한 사랑을 아직 그 가슴에 품고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사랑 때문에, 극진한 정성으로 향품과 향유를 마련하고 지금 이 순간을 기다렸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빨리 가서 향품과 향유를 그 시체에 바르고 싶었지만, 계명을 좇아 안식일에 쉬던 여인들입니다. 그래서 지금 새 날이 밝아오기가 무섭게 그 무덤을 향해서 가고 있습니다.

 

본문을 유심히 살펴보십시오. 누가는 여기 의도적으로 안식일과 안식 후 첫날을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56절 마지막 부분에는 계명을 좇아 안식일에 쉬더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241절에는 안식 후 첫 날 새벽에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 일부러 안식일을 말하고 안식 후 첫 날을 대조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좀 더 꼬집어주기 위해서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기운 것을 보고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뵈지 아니하더라.”라고 했습니다. 예수의 시체도 아닌, 하필 주 예수의 시체가 뵈지 않더라.”라고 말함으로서 이들이 하고 있는 행동을 생각해 보도록 합니다.

 

신약성경을 보십시오! 죽은 자들 가운데서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된 분을 묘사하는 칭호가 ()’였던 것입니다. 권능으로 재림하심을 묘사할 때에 예수께 대해 쓰는 호칭이 ()’입니다. ()’라는 호칭은 능력을 가지신 분이고 전능하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라는 말과 시체(屍體)’라는 말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 말입니다. 그가 죽음에 사로잡혀 있는 분이라면, 시체가 되었다면 그는 주가 될 수 없습니다. 그들이 찾고 있는 것이 주 예수의 시체였다고 누가가 말함으로서, 그들이 하고 있는 행동이 그들이 믿고 있는 것과 그들이 들었던 복음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꼬집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고 하는 천사의 선언을 위한 배경으로 이 부분이 등장합니다. 그리하여 여인들의 앞뒤가 맞지 않는 행동을 은근히 노출시켜주고 있습니다.

 

안식 후 첫 날 새벽인데도 무덤을 찾아가고, 돌이 굴러간 열린 무덤에서, 그 빈 무덤 속에서 지금 주 예수의 시체를 찾고 있는 이 안타까운 여인들을 먼저 그리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너무나 걸맞은 조국 교회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부활절 축하예배의 포스터는 곳곳에 붙어있는데 성도들의 발걸음은 계속 무덤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부활의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아직 주 예수의 시체에 바를 향품 준비에 몰두해 있는 모습입니다.

 

부활의 새벽의 그 여인들처럼 그 열심, 애정, 정성에는 아무도 여기 조국의 성도들을 능가할 사람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정성과 열심을 가지고 말하면 조국의 성도들을 능가할만한 사람들이 세상에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상식을 초월한 정성과 열심히 문제입니다.

 

살아있는 이웃들은 자기 몸을 뉘일 자리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죽어서 자기 누울 자리를 마련해서 부활의 동산이라고 이름을 붙이곤 했습니다. 오늘 한국교회는 살아있는 이웃의 아픔에 대해서 좀 더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의 새벽이 이미 밝았습니다. 예비한 향품을 바를 시체는 이미 없습니다. 여러분이 정성껏 준비한 그 향품을 바를 시체는 이미 없습니다. 주님은 다시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산 종교를 죽은 종교 섬기듯이 섬겨서는 안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공동체는 살아계신 주님을 섬기는 공동체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에 의해서 이룩된 신앙의 공동체인 형제자매를 위해서 예비한 향품을 사용할 때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요한에게 여기 네 어머니라.”고 마리아를 맡기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자기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우리가 섬기도록 남겨두셨습니다. 이제야말로 삼백 데나리온이 넘는 향유를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마음껏 사용할 때입니다.

 

더 이상 열린 무덤 속에서 주 예수의 시체를 찾지 마십시오. 부활절 기념행사로 바쁜 조국 교회가 들어야 할 메시지는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하는 것입니다. 손에 향품을 들고 찾고 있는 그 자리에 계시지 아니하고 그는 이미 살아나셨습니다.

 

이미 안식 후 첫 날이 되었습니다. 이 시대는 더 이상 의문이나 계율로 섬기는 시대가 아닙니다. 오직 진리와 성령으로 예배할 때가 도래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나타내십시오. 모든 성도를 당신의 사역자로 삼아서 그 나라를 이룩하시려고 성령을 물 붓듯이 부어주신 새 시대가 시작된 지 이미 이천 년이 지났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조국 교회가 지금 해야 할 것은 더 비싼, 더 고급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국 교회가 해야 할 일은 주 예수의 시체를 발굴해 내는 데 있지 않습니다. 시급히 민족 교회가 살 수 있는 길은 주 예수의 무덤을 발굴해서 아름답게 단장하는 일이 아닙니다.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그것만이 조국 교회가 살길이고 새로워질 길입니다. 이미 들려준 주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더 이상 텅 빈 무덤에서 정성어린 향유를 들고 주 예수의 시체를 찾는 대신에 지금은 그가 해주신 말씀이 무엇인지 기억해야 할 때입니다.

 

이제는 성령과 진리로 예배할 때입니다. 더 이상 다른 사람의 환상이나 계시에 의존해서 살 때가 아닙니다. 이 말 들으면 이리 가고 저 말 들으면 저리 가는, 언제까지 그렇게 우왕좌왕하고 있어야 합니까?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고 천사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들, 우리 각 사람에게 무엇을 말씀하셨는지 기억해야 할 때입니다. 이제는 남의 판단에 의존해서 살 때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읽고 깨달아야 할 때입니다. 스스로 말씀을 읽고 배우고 판단할 때입니다.

 

부활의 날, 우리가 기억해야 할 주님의 말씀을 천사가 되풀이해주고 있습니다.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오늘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핵심 메시지는 거기에 다 담겨져 있습니다. 거기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기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기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의 수난에 대해서 말하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자(人子)”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사람의 아들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죄인의 손에 넘기웠다는 것이 주님이 당한 수난을 묘사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항상 인자(人子)”라고 부르기를 좋아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 말함으로서 본래 그가 누구였는지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본래 하나님의 아들이셨던 그 분이 우리 인생을 위해서 사람의 아들이 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의 아들이라고 말함으로서 아버지의 계시에 따라서 깨달은 사람들만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영접할 수 있도록 그는 사람 가운데서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주님이 스스로 사람의 아들이라고 부를 때 우리는 신앙 안에서 영광중에 계시던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대신해서 사람의 아들이 되신 것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광중에 계신 하나님이, 그 거룩하신 분이 죄인의 손에 넘기어졌다는 것이 그의 수난이었습니다.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이를 삼키는 불의한 세상에 오셔서 그 수난을 자신이 직접 당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 날 이후 주님이 남긴 고난의 발자취를 따르는 신자들은 그의 수난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 이름을 위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은 크리스천의 특권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받는 은혜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것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서 당하는 고난에 참여하는 것도 은혜입니다.

 

이 은혜가 부활을 기념하는 예배에 새롭게 증거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예수 믿고 출세하는 은혜가 아닙니다. 예수를 위해서 환난을 당하는 그것이 은혜라는 것입니다. 세상과 타협함으로서 고생을 회피하는 것이 신자가 누리는 축복이 아니라 주를 위하여 고난 받는 것이 신자의 축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자답게 살기 위해서 고통을 당한다고 하면, 신자답게 살기 위해서 어려움을 당한다고 하면, 신자답게 살기 위해서 직장을 제대로 갖지 못한다고 하면 여러분은 복 받은 자입니다.

 

더 나아가 천사가 말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말씀은 수난 뿐 아니라 죽음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람의 아들이 되신 분은 섬김을 받으려고 세상에 오시지 아니했습니다. 오히려 섬기기 위해서 세상을 사셨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삶을 위해서 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정말로 사람의 아들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삶의 목적은 많은 것을 움켜쥠으로서 달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누어줌으로서 남을 부요하게 만드는 것이 인생이 걸어야 할 길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를 따르는 우리의 삶이 세상에서 섬기는 삶으로 나타나고 있습니까? 피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흘린 그리스도의 죽음을 여러분은 바로 이해해야합니다. 전능자의 힘을 빌려 더 높은 건물을 세우고 더 많은 것을 손아귀에 넣으므로 복 받는 종교가 아닙니다.

 

가진 이는 가진 대로, 없는 이는 빈손으로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는 종교가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는 손에 가진 것이 있을 때에만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는 그런 종교가 아닙니다. 가진 사람은 가진 것으로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손에 가진 것이 없어도 어려운 이웃을 볼 때는 함께 손을 붙잡고 기도함으로서 도울 수 있는 종교입니다.

 

우리로 사람답게 살도록 자기의 삶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우리는 부활의 주일에 기억해야 합니다. 그의 죽음 외에는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할 수 있는 길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목숨을 내어주셨습니다. 그가 포기하지 아니하시면 인생에게 소망이 없었기 때문에 자기 삶을 내어놓았습니다.

 

그러기에 그의 죽음을 믿는다는 고백은, 우리 자신의 삶을 타인을 위해서 내어주는 것으로 생활 현장에서 확인되어야 합니다. 그가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사람들을 위해서 내어주었다는 것을 전하는 우리의 복음전도가 우리의 내어주는 삶으로 확증되어져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내세를 소망하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삶이 여기서 끝난다고 하면, 제 삼일에 다시 살리심이 없다고 하면 정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집 평수 늘리고, 더 많이 움켜쥐는 사람이, 더 많이 돈을 모우는 사람이 똑똑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은 보여주시고 싶어 했습니다. 비록 부활의 새벽 빈 무덤 속에서 주 예수의 시체를 찾아 향품을 준비하던 여인들이지만 천사의 증거를 들었을 때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했다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8절은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라고 말합니다. 저는 그들의 정성이, 열심히 헛되지 아니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아침에 예비했던 향품을 가지고 찾아갔기 때문에 천사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천사가 전하는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습니다.

 

왜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그가 살아나셨느니라. 그가 하신 말씀을 기억하라 천사가 그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말해주었을 때에 그들이 주 예수의 말씀을 기억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복된 순간입니다.

 

그 다음 사건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제자들이 아직도 믿지 못하던 때였습니다. 수제자라고 늘 앞장서던 베드로가 아직 기이히 여길 그 때에 이 여인들은 천사의 말로 인해서 주님의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기억한다는 것은 지적인 기억이 아닙니다. 그것은 환희와 감격에 벅찬 순간이었습니다. 마태복음이 기록할 때 그들이 큰 두려움과 기쁨을 가지고 제자들에게 돌아갔다고 되어있습니다. 이 부활주일 예배의 자리에 나아온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도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예수의 부활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부활을 머리로 시인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을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서 시인하는 것입니다. 내가 비록 주의 이름 때문에 고난을 당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제 삼일에 살리셨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긍정을 승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와 함께 수난 당하고 죽더라도 하나님의 정한 시기에 다시 살리심을 믿는 믿음의 삶을 살므로 우리는 응답해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제가 이 자리에 전한 메시지는 의미가 없습니다. 여러분도 여기에서 시간을 보낸 것은 헛될 뿐입니다.

 

그리스도의 다시 살리심을 매일 시인하는 삶의 현장은 수난과 죽음에로의 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길만이 부활에로의 길입니다. 하나님의 인정받는 삶의 길은 그 길 밖에 없습니다. 수난과 죽음을 나의 것으로 소유하지 않고 그의 새 삶을, 영원한 삶을 나의 것으로 소유한다고 하는 것은 기독교의 메시지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없이는 면류관을 쓰지 아니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그는 부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인정받는 삶의 길은 비록 하나님의 뜻대로 오늘 고난당하나 내일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길입니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을 망하리로다.”

 

그렇습니다. 의인의 길을 걷는 사람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며 그분의 고난에 참여하고 그분의 죽음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 나도 부활하는 것입니다” (3:10-11, 새번역).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향해서 편지하면서 자기의 소원을 이렇게 피력해놓고 있습니다. 공동번역은 그 부분을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리스도와 고난을 나누고 그리스도와 같이 죽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기를 바랍니다.”

 

부활주일예배에 나오신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를 알고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고난을 나누고 함께 죽는 자리에서부터 다시 사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이것을 믿고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길 원하는 성도들은, 잠간 기도 후에, 주님의 몸과 피를 나누는 성찬의 자리로 초대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