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정근두목사 설교

    영상주소
    http://vod.upcweb.net/pastor/2018_0415_정근두.mp4
    성경본문
    눅 24장 36-43절
    설교일
    2018-04-15

너희에게 평강이 . . .

24:36-43

구주대망 2018415일 주일, 찬송 35, 86, 41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누가복음 설교는 막바지로 치닫고 있습니다. 지난 주 본문과 이번 본문은 곧 바로 서로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지난번에 교역자 몇 분이 함께 모여서 각자 정리해온 것을 나누는데, 누군가가 마치 2부작 드라마의 1부가 끝이 나고, 2부가 시작되는 것 같다고 했는데 두 본문의 연관성을 잘 표현한 것 같습니다.

 

누가는 부활사건 후, 빈 무덤을 확인한 여인들과 베드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오늘 본문에는 세 번째로 열한 제자가 함께 있는 곳에 나타나신 예수님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빈 무덤에서, 다음은 길에서 대화하며, 여기서는 제자들이 모인 방에서 자신을 갑자기 나타내시고 있습니다.

 

첫 장면에서는 천사가 두 여인에게, 두 번째 장면에서는 예수께서 (남자)제자들에게, 세 번째 장면 오늘 본문에서는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에게 예수께서 나타났습니다.

 

처음에는 부활의 증거가 천사들의 입을 통해서 예수께서 살아났다는 사실을, 다음에는 예수님 자신이 성경을 가지고 메시아가 고난 후에 영광을 얻으셔야 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께서 직접 그들의 눈앞에 갑자기 나타나셔서 손발을 보이시고 물고기를 잡수시며 부활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 그러면 오늘 본문 여덟 절을 어떻게 나누어 볼까요? 40절을 어디에 포함시키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고 봅니다. 저는 처음 36~37절을 주님의 나타나심과 문안, 38~39제자들의 반응과 주님의 말씀, 40~42절을 제자들을 안위하시는 주님의 행동으로 구분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전체 제목은 너희에게 평강이 . . .”로 잡고 한 부분씩 이야기를 풀어보겠습니다. 그러면 첫 부분 36~37, 주님의 나타나심과 인사말을 먼저 살펴봅시다. 이 말을 할 때에”(36)라고 시작합니다. 무슨 말들을 하고 있었지요? 그 자리에 모인 열한 제자들과 함께 모인 성도들은 그 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까?

 

그들은 예수께서 정말로 살아나셨고 나타나셨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나타나셨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열한 제자들과 함께 모인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나타나셨음을 앞 다투어 고백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증언을 기록한 책이 신약성경이고, 구체적으로는 우리가 살피는 누가복음입니다. 보십시오. 누가는 그 서문에서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1:1,2)를 기록하겠다고 약속합니다.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자신들이 만난 주님을 열띠게 이야기하는 그 현장에 갑자기 나타나셨습니다.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36) 이때의 상황을 요한으로 기록으로 보완한다면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20:26)라고 하신 것으로 연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그가 서 계셨다고 하는 표현은 기도와 관련한 주님의 임재의 약속을 기억나게 합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18:20)고 주님은 약속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항상 우리와 같이 계십니다. 그러나 부활하시기 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승천하신 주님을 우리 육안으로 뵈올 수 없는 우리들에게 어떻게 주님이 우리와 같이 하고 계신 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핍박을 두려워하여 문을 닫고 있을 때든(20:26), 함께 모여서 기도할 때든(18:20), 하나님의 백성이 모이는 곳에는 언제나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않든 주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이 모인 곳에 항상 주님이 함께 하시기에 우리처럼 직접 예수님을 눈으로 본 적이 없는 성도들이지만,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주님을 사랑하며 기뻐하는 신자의 삶을 살아가도록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눈이 가려져 있으면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28:20)는 약속에도 불구하고, 우리 가운데 계신 주님을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처럼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제자들의 눈을 밝혀 보게 하시듯이 하나님이 보게 하시면 우리는 우리와 함께 계신 주님을 발견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보게 하시면 우리가 본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생소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왕하 6:17)라고 기도했을 때,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엘리사를 두른 불 말과 불 병거를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린 그 때의 제자들처럼 직접 예수님을 우리 눈으로 볼 수 없지만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28:20)는 약속에 근거하여, 지금 마지막 때를 믿음으로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부활을 불신하는 도마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는구나. 그러나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20:29) 우리 모두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하지만, 주님을 믿는 더욱 복된 자리에서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서로 자신들이 만난 주님을 열띠게 이야기하는 그 현장에 갑자기 나타나신 예수께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36)라고 제자들에게 인사를 합니다. 평강이 있을지어다.”로 번역된 에이레네는 당시에 일상적인 흔한 인사말입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주님의 입술에서 나온 이 인사는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탄생하신 밤에 하늘의 천사들이 노래한 하나님께 영광, 땅에서는 평강의 성취이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다스리시는 새로운 시대의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바로 전날 밤에 바로 이 인사를 하시고 의미를 설명하셨기 때문입니다. 악한 자들이 다스리는 세상 속에 제자들을 남겨두고 떠나시며 그들의 평안을 비셨던 주님께서 선언하는 평화입니다.

 

당시 세상 권력자들의 거짓된 평화, 소위 Pax Romana에 속지 말고, 성도들이 누려야 할 절대적인 평화, 하늘의 평화를 선언하셨습니다. 지금도 세상은 거짓된 평화를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 정부는 선별된 지지율 70%를 가지고 우리를 설득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성도는 땅에 속한 자들이 아닙니다.

 

미국이 주는 평화도, 중국이 주는 평화도 신기루입니다. 성경은 이 세상나라를 짐승으로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 짐승의 모양은 조금씩 다를 수 있으나 세상나라는 그 본질이 야수적인 힘으로 지배합니다. 트럼프도 시진핑도 문재인도 우리의 신앙의 대상은 아닙니다. 우리 문제의 해결자도 아니고 구원자가 아닙니다.

 

보십시오.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들 가운데 서셔서 평화를 선언하십니다. 옛날 갈릴리 바다의 제자들에게 풍랑이 일어났듯이 오늘 성도의 삶에도 풍랑은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로 걸어오신 주님은 갈릴리 바다의 풍랑을 잠재우시던 분이셨고 여전히 우리의 삶에 평강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험난한 세상 속에서 온갖 문제로 가득한 교회 현실을 살아가는 이방의 성도들에게 항상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빌었습니다. 부활하셔서 세상을 다스리시는 주님은 지금도 자기 백성에게 평화를 주시는 왕이십니다.

 

그러나 그 밤에 제자들의 반응은 예수님이 선언하시는 평강과는 전혀 반대의 상태입니다. 주님이 나타나서 그들 가운데 서기 전에는, 살아나셨고 나타나셨다고 모두들 흥분하여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들 가운데 나타나셨을 때는 그들은 오히려 놀라고 무서워하였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지금 자신들이 육체와 분리된 유령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닫힌 문이 열리지도 않았는데 주님이 그들 가운데 서 계셨기 때문입니다.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그러므로 입으로 부활을 말하는 것과 눈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뵙는 것은 달랐습니다. 정말 눈으로 본다고 하여 모든 것을 믿는 것은 아닌 것이 맞습니다. 보고도 믿지 못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은 보지 않고도 믿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도마의 불신과 대조되는 그 믿음을 칭찬합니다.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는구나. 그러나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20:29)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은 무엇입니까?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확신을 갖는 게 아니겠습니까? 또한 아직 눈앞에 보이지 않는 미래의 일일지라도 우리가 기대하는 것이 반드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 게 아닙니까?”(11:1,우리말)라고 히브리서 저자는 말합니다.

 

하지만 그날 밤 제자들은 여전히 자기 시대의 문화적인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고 참된 믿음의 자리로 나아오는 데에 실패하고 있습니다. 하긴 당시 사람들뿐만 아니라 지금 이 시대 사람들도 죽은 자가 육신을 입고 다시 몸으로 부활한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단지 문화적인 한계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이유의 전부일 수 없습니다. 영적인 문제가 불신의 핵심적인 이유입니다. 보십시오. 그러므로 같은 시대를 살아도 어떤 사람은 불신하고 어떤 사람은 믿음의 자리로 나아옵니다. 여러분은 믿음의 자리로 지금 나아왔지만 같은 시대를 사는 친구들과 이웃들은 오늘도 불신의 자리에 머물러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주일예배에는 특별한 순서가 있습니다. 보통 예배는 봉헌 시간에 헌금을 드리지만, 오늘은 귀한 이름들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날입니다. 이번 5월 이웃 초청 잔치를 위해서 초대할 분들의 이름을 준비하신 예물과 함께 제출해 주십시오.

 

그리고 그 이름들이 복되게 해 주시도록 오늘부터 하늘 아버지께 기도해 주십시오. 이웃초청잔치 날을 기해서 불신의 자리에서 믿음의 자리로 옮겨졌으면 좋겠습니다. 특별히 이번 기회에 불신 부모님들이 복음을 받아드리셨으면 좋겠다는 소원을 품고 있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24:37) 그들 모두는 예수님을 아는 자들이고, 방금 주님이 살아나셨고 나타나셨다고 모두들 흥분하여 앞 다투어 말하던 자들입니다. 주님의 제자들 가운데서도 한밤중까지 함께한 핵심멤버에 속한 자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과거의 경험을 현재와 미래의 신앙으로 연결시키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 다윗 같은 왕으로, 아브라함보다 더 큰 이로 백성들 가운데서는 알려지셨고, 앞 사건에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자신이 고난을 통해 영광에 이르신 하나님의 아들로 분명히 드러내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부활의 주님을 눈앞에 보면서도 마치 풍랑 이는 바다 위에서 당황하던 갈릴리 그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유령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묻습니다. 어찌하여 곤란해 하며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38)

 

주님이 질문하는 그 순간에도 계속 두려워하며 의심이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 감격하고 기뻐해야 할 상황에서 제자들은 오히려 두려워하고 의심함으로 그들의 영적인 상태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두 가지 질문을 단숨에 던지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곤란해 하느냐

어찌하여 너희는 당황하느냐?” “왜 그렇게 놀라느냐?” 먼저 그들의 태도에 관련해서 묻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그들의 무지에 대해서 질문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마땅히 깨달아야 하는데도 여전히 깨달음이 없는, 마치 아직도 부활의 주님을 만나지 못한 것처럼 믿음이 없음을 지적하십니다. 여전히 부활을 믿는 데에 더디고 미련한 모습을 계속 보이고 있습니다.

 

이런 제자들을 향해서 온전한 육체를 가진 몸으로 부활하셨음을 보여주십니다. 마치 법정에서 진실을 증명하기 위한 증거를 제출하듯이 예수께서 자신의 손과 발을 보이시고 있습니다.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39)

 

유령으로 오해하고 놀라고 무서워하는 제자들을 위한 주님의 처방은 손과 발을 보라는 것입니다. 눈으로만 아니라 손으로 만져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손과 발은 십자가의 형벌을 당한 대표적인 신체부위입니다. 손과 발을 보는 제자들은 이 분이 십자가에 못 박힌 바로 그 예수님임을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육체적인 부활입니다. 그러므로 손과 발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못 박힌 손을 보았고, 주님의 못 박힌 발을 보았습니다. 주님의 못 박힌 손과 발은 상처 난 옆구리는 육체적 부활의 가장 강력한 증거입니다.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20:20)

 

상처 난 손과 발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 우리들의 구주이심을 증거 합니다. 제자들을 눈으로 보았을 뿐 아니라 그를 직접 만졌다(요일 1:1)고 요한은 증거 합니다.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39)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며 내가 바로 그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손과 발의 십자가의 흔적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확실한 증거입니다.

 

미련하고 더디 믿는 제자들의 의심에 대해서, 친히 손과 발을 보이시며 진정한 믿음의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손과 발을 보이실 뿐만 아니라 만져보라고 까지 하심으로 그들의 의심을 풀어주려고 하십니다.

 

마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요청하실 것을 내다본 것처럼 당신의 손과 발을 보여주시고 만져보라고까지 하셨습니다. 세상에 더 이상 계시지 않는 주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의 몸 된 우리의 삶이 증거가 될 때 사람들을 주께로 인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놀라며 더디 믿는 그들을 향한 두 번째 증거를 주님은 제시하십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먹을 것을 달라고 해서 잡수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몸이 다시 사신 것을 먹을 것을 청하심으로 증명하시기 위함입니다. 모든 상식은 영은 결코 음식을 먹을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음식을 먹음으로 유령이 아님을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40, 41) 그들은 예수님의 손과 발을 보고 자신들 앞에 서신 분이 예수님임을 확인하고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아니 믿기에는 너무 감격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부활의 주님을 만난 것이 너무 기뻐서 오히려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할 수 없는 큰 기쁨에 사로잡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제자들을 향해서 또 한 번의 부활의 증거를 보여주셨습니다.

 

마치 옥에 갇힌 베드로를 위해서 교회가 모여서 기도했지만 그가 문밖에서 두드릴 때는 정작 성도들은 믿지 못했던 것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들의 기도가 응답되어 베드로가 대문 밖에 섰더라.”고 여자 아이가 말하지만 그들은 네가 미쳤다고 무시합니다. 여자 아이는 힘써 아뇨, 정말이예요!”라고 하니 그러면 그의 천사라라고 반응합니다.

 

제자들 역시 지금 그들 가운데 서신 예수님, 손과 발에 상처를 보여주시며 부활의 자신을 드러내시지만 한 편으로는 기뻐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서는 부활의 예수님께 합당한 믿음의 반응을 보이지 못했기에 그들은 믿지 않았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반가움과 놀라움이 교차하는 상태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먹을 것을 청하여 드심으로 몸이 다시 살아난 것을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41~43)

 

불신앙과 계속해서 싸우는 제자들을 위해서 음식을 청하신 것입니다. 어둠이 물러가고 날이 밝아오듯이 의심은 서서히 물러가고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기쁨으로 온 누리가 환하게 밝아지길 위해서 주님은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고 마지막 요청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께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렸습니다. 그러자 받으셔서 그들 앞에서 잡수셨습니다. 다 드시는 순간 제자들의 마음에 한 순간 피어나던 의심의 안개는 사라졌습니다. 예수께서는 몸이 다시 살아나 이제 제자들 가운데 참으로 함께 하셨습니다.

 

구운 생선 한 토막은 그들에게 있어서 참으로 많은 의미가 함께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자신 몸이 다시 사신 것을 확인시켜주기 위한 증거이기도 하고 사도요한의 기록을 보면 제자들에게 주시기도(21:9)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운 생선 한 토막은 그들이 함께 보낸 갈릴리의 삶을 떠올리는 촉매 역할을 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갈릴리에서 그들과 함께 생선을 먹으며 그들을 가르치시던 주님께서 이제 그 가르침대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하지만 부활은 정말 엄청난 사건입니다. 3년을 가르친 핵심멤버인 제자들조차 믿을 수 없었던 사건이었습니다. 부활 후 그들에게 차례로 나타나셨고 가르치셨고 그들 앞에 음식을 먹는 일까지 하시면서 믿도록 가르치시는 주님이십니다.

세상에 있는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13:1, 표준새번역)는 말씀처럼 정말 예수님의 제자 사랑은 지극하십니다. 자기에 대해 의심하는 이들을 향해 거듭거듭 증명하고 이해시키는 모습에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의 선배가 된, 스승이 된 우리 모두가 배울만한 주님의 제자사랑입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는 선언만으로 주님의 역할을 끝나지 않습니다. 그들의 마음에 평강이 자리하도록 화목의 제물이 되신 것뿐만 아니라 그 평강이 그들의 것이 되기까지 반복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핵심 멤버들을 밤중에 만나서 부활을 믿도록 그들의 수준에서 다양한 증거를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누가는 지금 복음서를 거의 종결짓고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이야기는 곧 시작될 것입니다.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능력으로 구비시켜서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다하게 될 것입니다. 훈련캠프는 막 끝났지만 그들의 앞에서 멀고 먼 사역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먼저 그들 자신이 주님의 수난과 부활을 바로 알고 믿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 가운데 친히 찾아오셔서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선언하실 뿐 아니라 손과 발을 들이밀고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만져보라고 권하셨습니다. 주님의 존귀한 상처를 시각으로 촉각으로 확인하도록 합니다. 몸이 다시 살아나신 것을 믿을 수밖에 없도록 구운 생선 한 토막까지 잡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정한 평강은 부활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사망을 이기시고 승리하신 주님께서 지금도 전능하신 아버지 우편에 앉아계십니다. 권능자로서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주님을 향한 시선을 잃지 않는 부활의 증인이 되길 바랍니다. 오늘 여러분이 기록해서 드리는 이름들이 하늘 아버지의 생명책에 빛나길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