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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근두목사 설교

    영상주소
    http://vod.upcweb.net/pastor/2018_0429_정근두.mp4
    성경본문
    눅 24:50-53
    설교일
    2018-04-29

축복과 경배

24:50-53

구주대망 2018429일 주일, 찬송 37, 67, 49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가복음 마지막 말씀을 전하는 오늘 예배의 자리에 나아온 여러분 모두에게 손을 들어 제자들을 축복하신 주님의 축복이 임하길 바랍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누가복음 첫 설교를 한지 31년 만에 오늘 마지막 설교를 하게 되어서 마음에 특별한 감사가 있습니다. 엄청 오래 걸렸지만 마침내 끝을 보게 되었다는 감격이 큽니다. (게다가 아내가 책거리 이벤트까지 약속했으니 그 또한 기대가 됩니다.)

 

, 그럼 오늘 본문으로 돌아갑시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승천(昇天)이 주제라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승천을 제일 자세히 기록한 복음서 기자입니다. 물론 마가복음에도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16:19)고 승천과 승귀를 언급합니다.

 

하지만 누가만이 유일하게 승천을 독립적인 사건으로 다루며, 승천한 장소까지 구체적으로, 오늘 본문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누가복음의 마지막 장면인 예수님의 승천사건은, 그가 쓴 다음 책 사도행전의 첫 장면과 바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의 에필로그인 동시에 사도행전의 프롤로그처럼 보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을 누가복음의 에필로그로 보면, 바로 앞에서부터 이어지는 부활 기사를 마감하는 동시에 누가복음서 전체를 끝맺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희망의 새 시대를 세상에 여시려고 오신 분께, 누가는 적절하고도 어울리는 시작과 끝맺음을 하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누가복음은 시작도 성전에서, 마지막도 성전에서 끝을 맺습니다. 누가는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으로 복음서를 시작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복음서를 끝맺고 있습니다.

 

천사로부터 잉태의 소식을 들은 마리아의 찬양(1:47), 아들 요한의 출생을 기뻐하는 아버지 사가랴의 찬송(1:64), 그 밤에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2:14)라고 아기 예수의 탄생을 노래한 천군천사의 찬양, 그리고 결례를 위해 성전에 온 아기를 받아 안고 기뻐하는 할아버지 시므온의 찬양으로 누가복음의 첫 부분은 펼쳐집니다.

 

누가복음 처음 두 장의 큰 흐름이 찬양으로 채워진 것처럼, 마지막 장 마지막 구절까지도 경배 찬양하는 제자들의 모습으로 누가복음은 완성됩니다. 처음 두 장에 연속적인 찬양이 울려 퍼지듯이, 마지막 부분에서도 크게 기뻐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천사가 전한 큰 기쁨의 좋은 소식”(2:10)은 예수님의 승천을 목격한 제자들의 마음에 큰 기쁨”(24:52)을 안겨줌으로,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은 바로 승천으로 입증된 예수 그리스도 사건임을 확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 네 절의 구조를 살펴봅시다. 50, 51절의 주어는 예수님입니다. 서두에 예수께서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52, 53절의 주어는 서두에 등장하는 그들은, 즉 제자들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구조는 각 두 절로 나누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의 첫 부분은 예수께서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것이 주제입니다. 하지만 두 번 반복되는 축복하셨다” “축복하시는이란 강조점도 놓쳐서 아니 됩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한 부분씩, 한 구절씩 자세히 살펴봅시다.

 

예수께서 그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4복음서 기자 가운데 오직 누가만이 예수님의 승천 장소가 예루살렘 감람산 너머 있는 베다니 근처였다고 밝힙니다. 갈릴리에서 만나 대 사명을 주신 예수님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베다니 근처 감람산 어느 기슭에서 승천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본문에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표현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베다니 근처로 데리고 나가셔서라는 표현입니다. 예수께서 의도적으로 제자들을 데리고 나가셨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러면 왜 예루살렘이 아니라 예루살렘 쪽에서는 보이지 않는 감람산 반대편 기슭까지 제자들을 데리고 가셨을까요? 성전에서 군중들이 보는 가운데 환호 속에 승천하시지 않고, 몇 몇 제자들만 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라가셨을까요?

 

누가복음 24장의 연속된 세 사건에서 보여준 대로 예수께서는 부활의 증인들로 선별된 사람들에게만 나타나셨습니다. 이른 새벽 주님의 부활의 소식을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한 여인들”(8), “말씀을 깨닫고 마음이 뜨거워진 제자들”(32)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더 나아가 마지막 사건에서는 말씀을 깨닫고, 성령의 능력으로 옷 입은 증인들”(45~49)을 통해 부활의 소식을 전하고 믿게 하신다는 점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부활뿐 아니라 주님의 승천도 그의 증인이 될 이들에게 보이는 것으로 충분했습니다.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환호할 군중들에게가 아니라,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로 경배하며 찬양할 제자들에게 보이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 사실을 본 제자들이 전하는 말을 듣고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 백성들입니다. 그들의 말을 듣고도 믿지 못하는 이들은, 그들의 눈으로 보아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증인이라는 선언을 심각하게 받아드리는 한 달이 되길 바랍니다. 울산교회 5, 백만의 시민들이 기다리고 있어도 전하는 사람이 없으면 들을 수가 없습니다. 로마서에서 바울도 같은 질문을 하면서,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합니다.

 

“ . . . 사람들은 자기들이 믿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부를 수 있겠습니까? 또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보내심을 받지 않았는데,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에 기록한 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걸음이 얼마나 아름다우냐!’ 한 것과 같습니다.”(10:14, 15 새번역)

 

전도자 빌립은 마차를 향해 이디오피아 재무장관에게 달려가서 그가 책 읽는 소리를 듣고 물었습니다. “그 뜻을 이해하십니까?” 그 사람이 대답하였습니다. “잘 모릅니다. 아무도 내게 가르쳐 주지 않으니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 때나 지금이나 바르게 가르쳐주지 않으면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봅시다. “우리는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있는가?” “우리는 바르게 가르치고 있는가?” 물론 사람들은 여전히 보여 달라고 합니다. 듣고 믿는 대신 그들의 눈앞에 보여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어떻게 답하십니까? 마귀는 예수님을 향해서도 보여주라고 요구했습니다. “(4:9)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내리라!’

 

의미를 살려서 말한다면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여기서 뛰어내려 그것을 보이라 그러면 믿을 것이다.” 하지만 주님은 그 요구를 거절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4:12)

 

오히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비유속의 부자는 나사로를 자기 집에 보내어 형제 다섯이 그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 때 아브라함은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라고 답합니다.

 

동시에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고 못 박은 것을 기억하십니까? 누구든 증거를 보이라고 요구하는 대신에, 또 다른 표적을 보이라고 요청하는 대신에 모세와 선지자의 말을, 부활의 증인들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믿어야 합니다.

 

자 그러면 이제 본문의 주요 장면으로 눈길을 돌립시다.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시더니”(50) 축도하시는 전형적인 방법은 축복을 받는 사람들을 향해 손을 들어서 복을 비는 것입니다. 손을 들어 축복하는 장면을 떠올리는 것은 유대문화의 제자들에겐 당연합니다.

 

대제사장 아론의 전통을 따라서 제사장들은 축복합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6:24~26)

 

아론의 전통이 아니라 멜리세덱의 반차를 따라, 새롭고 완전한 대 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참된 중재자로서 자기 백성에게 복을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의 백성된 우리에게 하늘에 속한 복을 넘치도록 복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날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신 주님을 꼭 기억하십시오. 지금 여러분의 상황이 어떠하더라도 그날 손을 들어 . . . 축복하신 주님을 기억하십시오. 힘듭니까? 고달픕니까? 외롭습니까? 낙심이 됩니까? 숨이 막힙니까?

 

잘 생각해 보십시오.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시더니”(50)라는 이 장면이 성경에 기록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역사보존을 위해서일까요? 아니면 우리의 신앙을 위해서일까요? 성경은 말합니다.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인내를 가르치고 용기를 주어 장래 큰 희망을 가지게 하려고 기록된 것입니다.”(15:4, 현대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아무리 고달프더라도 기억하십시오. 외롭더라도 낙심되더라도, 숨이 막힐 것처럼 아무리 힘들더라도 기억하십시오. 주님은 죽음에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로 올라가는 순간에도 우리를 위해서 손을 들어 축복하셨습니다.

 

숨 막히는 힘든 상황 속에서도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거기가 성도들의 마지막 희망이 깃던 곳입니다. 가인의 손에 쳐 죽임을 당한 동생 아벨이 마지막 바라본 곳이 하늘입니다. 순교자들의 마지막 눈길이 향하던 곳이 바로 하늘입니다.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51)

 

새롭고 완전한 대 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참된 복의 중재자로서 자기 백성에게 복을 주시는 분으로 마지막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늘로 올라가면서도 우리를 위해서 손을 들어 축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에게 하늘에 속한 넘치도록 복 주셨고 또 지금도 주십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찬송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 한없는 찬양을 드립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그리스도께 속한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습니다.”(1:3, 우리말) 그러므로 하늘 백성된 우리는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복 주심을 찬송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후반부의 기쁨과 찬양은 당연한 귀결입니다. 그들은 예수께 경배를 드린 후에 기쁨에 넘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계속 성전에 머물면서 하나님께 찬양을 드렸다.”(24:52,53 현대어) 예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손을 들어 축복하면서 오신 곳 하늘로 올라가셨으나 우리를 버려두고 떠난 것이 아닙니다.

 

고별설교에서 우리를 버려두시지 않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14:18) 버려두시지 않고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릴 실망시키는 대신에 우릴 위해 중보기도를 하십니다. 다만 우리를 증인으로 준비시키러 떠나셨습니다.

 

이제 예수께서는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기 위해서, 오신 곳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당신의 백성들로 하여금 성령을 부어주셔서 땅 끝까지 증인이 되는 능력을 베푸실 것입니다.

 

그러기에 제자들은 슬퍼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떠나보내고 기쁨에 넘쳐서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는 것은, 3년간 함께 한 스승에 대한 배신처럼 보입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께 경배하고, 크게 기뻐하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날마다 성전에서 지냈다.”고 누가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그가 떠나셨는지를 아셨기 때문입니다. 떠나가시는 예수님을 보고도 그들은 크게 기뻐하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것은 이제 하나님의 계획을 알고, 그 계획에 자신들의 부름을 알고, 그 부름에 응하기 위해서 하늘로부터 능력이 부어질 것을 알고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하늘보좌에 앉으시고 성령을 보내시고 그들에게 능력으로 옷 입혀 주실 것입니다. 하여 어디든 기쁜 소식을 전하는 능력에 사로잡힐 것입니다. 그들은 이런 사실을 이제는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요? 그들의 마음을 열어 이 모든 성경의 말씀들을 깨닫게 하셨다”(45)는 사실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제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기 위해서 올라가심을 안 제자들은, 계시록의 24장로들처럼 예수님을 향해서 경배합니다. 하늘로 올리우신 예수님은 그 순간부터 제자들에게 예배의 대상으로 등극하셨습니다.

 

이 놀라운 승천을 자신들의 눈으로 보았던 제자들은, 이제 더 이상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지 않습니다. 두려워서 문을 잠그고 있던 그 도시 예루살렘으로 이제는 기쁨에 넘쳐서돌아갑니다.

지금 이들의 기쁨은 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의 기쁨과는 전혀 다른 기쁨이고, 세상이 앗아갈 수 없는 기쁨입니다. 그리하여 누가복음 처음에 흘러넘친 기쁨의 샘은 마지막 부분에서 다시금 샘솟고 있습니다.

 

누가는 계속 성전에 머물면서 하나님께 찬양을 드렸다.”(53)는 마지막 구절에서 누가복음 첫 부분을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늘 성전에서 기도하던 안나처럼, “내가 내 아버지 집인 성전에 있으리라는 것을 알지 못하셨습니까?”라고 답하던 소년 예수처럼, 제자들은 지금 당연히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늘 성전에서 머물면서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누가는 그의 복음서를 성전 제사로 시작하였듯이 그 마지막도 성전의 예배와 찬송으로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예수님 탄생 시에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대망하며 하늘과 땅에 울려 퍼진 찬양이, 이제 구속사역이 성취된 지금 다시 울려 퍼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기억해 보십시오. 누가복음 1, 2장에는 여기저기에서 기쁨의 샘이 솟구치고 있습니다. 왜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큰 소리로 축복했습니까? 태중에 있는 아기 예수로 인해서 엘리사벳이 감격했기 때문입니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으며라고 마리아가 노래한 것도 그 복음으로 인한 전 인격적인 반응이었습니다. 요한의 아버지 제사장 사가랴를 보십시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우리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아 보사 속량하시며라고 찬양합니다.

 

천군 천사들의 노래를 듣고 아기를 만나본 목자들을 보십시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찬송하고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예수를 만나는 사람마다, 찬송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것이 신기하지 않습니까?

 

율법대로 아기를 드리려고 성전에 왔던 아기 예수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던 할아버지 시므온의 모습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주재여, 이제는 말씀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 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한 것이요, 이방을 비취는 빛이요. 이스라엘의 영광입니다

 

이제 그 모든 말씀이 성취되어 하늘로 올라가시는 것을 눈으로 확인한 제자들의 기쁨은 흔들리지 않는 기쁨입니다. 사람의 근본인 마음에서부터 나오는 환희의 찬송이 제자들의 입술에서 터져 나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찬송은 항상 인격 전부가 감동되고 영향을 받는 찬송입니다.

 

며칠 전 시편 105편 첫 부분을 주의 깊게 살펴보셨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노래하고 찬양하고 자랑하고 만민에게 알게 하라는 명령문들을;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기도하라는 명령문들 앞뒤에 평서문이 하나 자리하고 있습니다.

 

마치 여호와를 구하는 자들은 마음이 즐거울 것이라는 진술이 나옵니다. 1-4절중에 유일하게 명령문이 아닌 문장입니다. 여호와를 즐겁게 찬양하고 기쁘게 전하기 위해서는; 먼저 여호와를 알아야 한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그를 찾아나서야 한다고, 여호와께 기도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감사는 그 다음에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면, 참된 감사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참된 찬양, 바른 예배를 드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잘 모르면,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의 의미를 제대로 모르면, 하나님의 판결의 의로우심을 이해하지 못하면; 엉뚱한 것을 두고 감사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내가 원하는 것 해 주시는 하나님께만 감사하게 됩니다.

 

진정한 감사는, 내가 원하는 대로 해 주시지 않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입니다. 응답하신 기도 감사, 거절하신 것 감사 ~ ♪♬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던 사람들은 구약시대에도 그렇게 살았습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안에 있는 모든 것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라

 

누가복음의 노래들만큼이나 벅찬 사도행전에 나오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십시오. 부디 우리들의 초라한 모습들만을 바라보고 살지 마십시오. 더 이상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망각하고 살아가지 마십시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찬송하는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능력 가운데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 그것이 복음에 의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정상적인 모습입니다.

 

또한 바울의 서신들을 한 번 살펴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에 감동하면 터져 나오는 것이 영광송입니다. 자기가 하던 이야기의 흐름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영광송은 바울이 쓴 편지의 한 특성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전하고 있는 복음이 지적인 교리가 아니라 그 삶을 바꾸어 놓은 능력이기 때문에 복음의 진수에 대해 말할 때마다 찬송하지 않고는 그 부분을 지나갈 수 없었습니다. 온 영혼과 마음이 이 복음으로 인해서 감격한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성도들이 모였다 하면 하나님을 찬미하고 그 이름을 노래하는 것은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종교가 기독교처럼 노래를 만든다고 해서 우리가 부르는 것과 같은 찬송이 나올 수 없습니다.

 

기독교인들이 부르는 찬송은 우리가 믿는 바에 따라서 터져 나오는 노래입니다. 하나님이 다 해놓으신 것을 믿게 될 때에 터져 나오는 것이 찬양입니다. 자기가 쌓은 공덕 때문에 천당을 바라보는 종교에서는 이런 찬송이 터져 나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안 것은 우리의 탐구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계시의 결과입니다. 우리가 research해 가지고 하나님을 알아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리신(reveal) 결과로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신나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사역을 설명하시면서 자기가 세상에 오신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희망 사항을 이루기 위해서 자기가 세상에 오신 것이라고 설명하십니다.

 

자기가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들은 것이고 자기가 하는 일은 하나님이 하도록 하셔서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께 돌리도록 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역사의 결과이고 그들의 모임이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성도들이 모였다고 하면 찬송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생명을 체험한 자는 감사와 경배를 돌리게 됩니다.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 제자들이 땅 끝까지 전파할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기쁜 소식은 새로운 종교를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약속하신 것을 성취하신 그 하나님을 찬송하는 본래적인 당연한 삶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에 모여서 경배 찬양을 합니다.

 

사람을 지으신 목적은 바로 창조주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함입니다. 꽃이 아름답게 피는 것도, 새가 즐겁게 노래하는 것도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함입니다. 이웃들을 초대하여 신앙의 자리에 나아오도록 하는 것도 찬양하는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기 위함입니다.

 

자녀들에겐 효도가 선택이 아니고 자녀의 도리이듯이, 인간에겐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것은 취미가 아니라 피조물의 본분입니다. 이 진리를 믿고 깨닫게 되면 그 마음에는 기쁨이 자리하고 입술에는 기도와 찬양이 터져 나오고 삶에는 매사에 감사의 꽃이 피어나게 됩니다.

 

여러분은 어떤 삶을 살고 싶습니까? 아니 여러분은 어떤 마지막을 사모합니까? 누가복음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님과 성도들은 그 답을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우리의 마지막 모습은 손을 들어축복하는 주님을 닮기 원합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눈앞에 있는 성도들을 축복하는 삶을 살기를 소원합시다.

 

천사와 같은 도덕적 기준을 자신의 삶에 요구하지 않고, 동료성도들에게 들이대는 위선적인 삶을 떨쳐버려야 합니다. 형제를 비방하고 미워하는 죄악된 삶을 살면서 마치 교회의 거룩을 혼자서 추구하는 자라고 자신을 속이지 말기를 바랍니다.

 

하늘로 올라가시며 손을 들어제자들을 축복하는 주님을 믿는 성도들이라면 주님을 닮은 복을 비는 사람이 될 뿐 아니라, 그 축복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경배한 후, “큰 기쁨으로예루살렘에 돌아와 성전에서 날마다 찬양한 성도들을 닮길 원합니다.

 

그리하여 기쁨, 기도, 감사와 찬송이 울산교회 성도들의 삶의 등록상표가 되길 원합니다. 왜냐하면 하늘로 올라가시며 손을 들어제자들을 축복하는 주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올라가신 그대로 다시 오실 주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다시 오실 때까지 아버지의 보좌 우편에서 우릴 다스리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웃들을 기쁨 기도 감사 찬양이란 본래의 자리로 회복하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걸음이 얼마나 아름다우냐!’라고 하나님이 감탄하는 사역에 참여합시다. 그 때 여러분의 5월은 순종의 발걸음으로 아름답게 수놓게 될 것입니다.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비둘기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을 피워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