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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근두목사 설교

    영상주소
    http://vod.upcweb.net/pastor/2018_0513_정근두.mp4
    성경본문
    요함복음 19장 25-27절
    설교일
    2018-05-13

새로운 인간관계 맺기

19:25-27

구주대망 2018513일 어버이주일 찬송 32, 199, 304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부모님 주일을 맞이해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예수님의 일곱 말씀 가운데 하나, 세 번째 말씀을 다시 살피려고 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세 번째 말씀은 극심한 고통 속에 죽어가면서 어머니와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남긴 사랑의 말씀입니다. 사랑의 말씀은 새로운 인간관계를 맺게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이 쓴 복음서는 그 상황을 간결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요셉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그 때 마리아는 혼자 남은 과부였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기독교 전통에 의하면, 그 때부터 마리아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열두 해를 요한이 모셨다고 합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고 한 간단한 두 마디이지만 심오한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이 말씀에는 여러분의 고통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긍휼, 하나님의 다정다감함,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관심과 보살핌이 배어있습니다. 새로운 인간관계를 맺게 하는 사랑의 말씀입니다.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랑은 먼저 1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관심을 갖는 것, 이것이 주님이 하신 첫 번째 일입니다. 십자가 아래에 서서 슬퍼하는 어머니께 관심을 가졌습니다. 사랑은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사랑이 주제인 영화를 보셨습니까? 그 시끄럽고 많은 군중들 가운데서 두 사람의 눈길이 서로 부딪칩니다. 서로를 향한 관심의 눈빛은 주위의 모든 것을 사라지게 하고 다만 상대방만 바라볼 뿐입니다. 시간이 짧든 길든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서로에게 집중하는 것입니다.

 

남녀의 사랑만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십자가 위에서 일어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지금 그 끔찍한 고통의 십자가위에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모여서 주님을 비웃고 조롱하는 일에 하나가 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조롱하는 무리들을 무시하고, 오직 한 분, 어머니만 바라보고 그분께만 관심을 보입니다. 관심을 갖는 것은 여러분이 누군가에게 줄 수 있는 최상의 선물입니다. 돈보다 소중하고 어떤 선물보다 더 귀합니다.

 

가정의 달 5, 여러분의 가족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것은 관심입니다. 왜요? 관심을 주면 시간을 주게 되고, 시간을 주는 것은 여러분의 삶을 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시간은 바로 여러분의 삶입니다. 돈은 더 벌 수 있지만 시간은 더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시간을 함께 하는 것은 삶을 함께 하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관심을 갖고 그의 눈을 바라보고 그의 말을 듣는 것은 너는 나에게 소중해, 가치 있는 존재야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육신의 가족뿐 아니라 신앙의 가족을 존경으로 대하십시오. 함께 예배하는 성도들을 소중하게 여기십시오.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다른 말로 소중히 여긴다는 것입니다. 아이에게, 어린이에게 관심을 갖는다는 것을 그들을 소중히 여긴다는 것입니다. 청소년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그들을 소중히 여긴다는 것입니다. 배우자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배우자를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보이신 사랑의 첫 번째 행동은 어머니 마리아에게 사랑의 눈길을 돌린 것입니다. 고통 속에 죽어가면서 어머니께 관심을 표하셨습니다. 포악무도한 로마 군인들이지만, 힘없는 여인은 무시했기에 어머니는 십자가 아래 서 있었습니다.

 

때로는 별 볼일 없는 존재라고 취급받는 것도 유익할 때가 있습니다. 당시, 그때 문화에서는 여자는 정말 별 볼일 없었습니다. 아무도 여자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가재도구나 소모품 취급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결혼을 하지 않았거나 혼자되면 더욱 형편은 심각했습니다. 별 볼일 없는 자 가운데 가장 별 볼일 없는 자 취급을 당했습니다. 그러기에 로마 군병들은 십자가 가까이 서 있는 여인들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관심을 가질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남달랐습니다. 시대를 초월한 분이셨습니다. 여성의 신분을 언제나 상승시키셨습니다. 당시 문화를 역행하는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머니께 관심을 보이므로 존경을 나타내셨습니다.

 

자신의 고통에 매몰되지 않고, 어머니의 고통을 보고, 어머니의 슬픔을 돌아보셨습니다. 비록 당신의 신체적 고통도 극심했지만 서서히 죽어가는 아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어머니의 극심한 마음의 고통을 돌아보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는 다섯 번째 계명을 알고 있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20:1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고 명합니다. 이 계명에는 시간적 한계가 없습니다. 비록 자랄 때뿐만 아니라 장성해도 이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부모가 살아계신 한 이 계명은 우리를 지배합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제안이 아니라 명령입니다.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는 것은 주요한 명령이기에 선택적이 아니라 필수적입니다. 하늘 아래 숨 쉬는 모든 인간은 마땅히 아버지와 어머니를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목사님! 목사님은 우리 부모를 모르시잖아요!” 그렇습니다. 저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분들이 어떻게 하든 말든, 공경하라는 명령 수행에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훌륭한 부모든, 나쁜 부모든, 무관심한 부모든, 대책 없는 부모든 상관이 없습니다.

 

왜 하나님은 그분들을 여러분의 부모로 선택했을까요? 여러분을 만드는 데 꼭 적합한 DNA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분들의 육아방법보다 그분들의 유전인자에 더 관심을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정말 대책 없는 부모님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확히 그분들의 유전인자가 여러분을 만드는데 필요했습니다.

 

부모가 알코올 중독자요 여러분을 버린 자요 여러분을 함부로 유린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여러분은 그분들을 존경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분들을 통해서 여러분을 세상에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이 무엇을 했기에 존경하는 것이 아닙니다. 소중히 여기고 마땅한 예의를 표해야 합니다.

 

부모님 주일 예배에 참석하신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언제 가족에게 관심을 보여야 합니까? 신문을 읽고 있는 여러분을 향해 아빠, 나 좀 봐라고 조르는 아이에게 관심을 보이십시오. 사랑은 관심을 보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 중에서도 어머니를 보시고 관심을 나타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랑은 상대방의 2 필요를 채워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피는 십자가 위에서 남긴 세 번째 말씀은 예수님의 마지막 말, 유언이기도 합니다. 숨을 거두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마지막 주님의 지상 사역은 무엇입니까? 홀로 남는 어머니를 위해서 대책을 세워 드리는 것입니다.

 

마리아와 정혼하고 결혼했던 목수 요셉은 이미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사실 요셉은 예수님의 친부라기보다는 양부입니다. 예수님의 아버지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으로 잉태되어라고 신앙고백을 합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의 친 어머니입니다. 예수님은 나이 든 어머니가 가난한 처지에 있는 것을 아셨습니다. 누군가가 보살펴주어야 하는 과부이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극심한 고통의 한 가운데서 입을 열어 대안을 말씀하십니다. 어머니 마리아를 바라보시며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 이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제자 요한을 향해 보라, 네 어머니라.”고 부탁하십니다. 지금 당신의 죽음 때문에 가장 큰 상실감을 겪는 두 사람을 새 아들과 새 어머니로서 맺어주십니다. 두 사람의 상실감을 서로 채워줄 수 있는 놀라운 대안을 제시하십니다.

 

그 순간 어머니께 드릴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아무런 현금도, 은행잔고도, 부동산등기부도 없었습니다. 주님은 당대의 노숙자에 가까운 사람이었습니다. 두터운 겉옷조차 그녀 몫으로 남겨줄 수 없었습니다. 입고 다닌 단벌의 옷은 이미 십자가 아래서 로마 군병들이 제비뽑아 나누어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어머니께 어떤 물건을 드리는 것보다 훨씬 더 나은 최상의 선물을 드렸습니다. 가장 믿을만한 사람과 가장 사랑하는 모친을 연결시켜서 서로 도와 살도록 배려하셨습니다. 새로운 아들에게 새로운 어머니를 맡겼습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은 마리아가 사람임을 아셨습니다. 천주교가 말하듯이 하나님의 모친, 여신이 아님을 아셨습니다. 신성을 가진 자가 아님을 잘 알았습니다. 오히려 당신이 대안을 마련해 드려야 하는 분임을 잘 아셨습니다.

 

주님은 마리아가 연약한 과부에 불과함을 아셨습니다. 당신의 사후에 돌봄과 보호가 필요한 인생임을 아셨습니다. 그러므로 마리아에게 한 번도 기도드리지 아니했습니다. 하늘의 여신이여, 십자가에서 날 구출해 주셔요.”라고 애원한 적이 없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당신이 원하기만 하면 당신 스스로 십자가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를 박은 못이 십자가에 그를 붙잡아 둔 것이 아닙니다. 그를 십자가에 붙든 것은 우리를 향한 지극한 사랑입니다.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라 우릴 구원하시려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원하기만 하면 바로 온 세상을 끝장 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세상을 새로 시작할 수도 있습니다. 뭐든 뜻하는 대로 할 수 있는 분께서 거기 십자가 위에 계신 것은 우리를 향한 지극한 사랑 때문입니다.

 

거기서 가르치는 바는 가족의 필요에 대해서 관심을 가진 것처럼 우리도 가족의 필요를 충족시켜야 마땅하다는 것을 교훈합니다. 참 과부인 과부를 경대하라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그들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딤전 5:3,4)

 

만약 여러분이 신앙인이라면 각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싶은 소원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집안에서부터 사랑으로 시작하십시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과 순종은 전도활동에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교회에서부터도, 이웃에서부터도 시작하지 않습니다.

 

신앙인을 그 사랑실천을 자기 집안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시부모, 친정부모를 공경하는데서 출발해야 합니다. 가족을 돌보는 것은 신앙의 의무입니다. 과부를 돌보는 것도 신앙의 의무입니다.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돌아보는 것도 신앙의 의무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딤전 5:4)

 

사랑은 관심을 갖고 보살펴드리고 필요를 채워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사랑하는 것은 세 번째로 상대방의 3 마음을 알아주는(공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사랑하는 것을 배우려면 정서적 지원을 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오늘 우리 본문은 성경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아들의 고통을 바라보기만 하는 어머니와 고통 가운데 있는 친구를 바라보는 요한의 슬픔과 고뇌가 가득한 장면입니다.

 

아들 예수와 마찬가지로, 어머니 마리아 역시 슬픔과 낯설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슬픔을 아는 사람이라면 마리아는 슬픔을 아는 여인이었습니다. 단지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었다는 이유로 그녀의 삶에는 슬픔과 고통이 항상 뒤따랐던 것을 기억하십시오.

 

천사의 수태고지, 처녀가 아이를 낳으리라는 통고 이후로 임신의 흔적이 그녀의 몸에 나타나면서 그녀가 겪었을 고뇌를 기억해 보십시오. 남편 요셉과 함께 베들레헴에서 여관에 방이 없어서 마구간에서 해산을 하고 갓난아기를 강보에 싸서 구유에 뉘어야 했으니 그 마음이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헤롯왕이 두 살도 채 되지 않는 자기 아들을 죽이려 했을 때에 두려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 아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낯선 나라, 애급으로 도피를 할 때도 고달팠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당대의 난민이었습니다. 정부가 추적을 하고, 권력이 죽이려고 들었기 때문에, 현대적 기준으로 말해도 난민이 틀림이 없습니다. 끔찍한 일입니다.

 

세월은 흘러서 나이 서른에 공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죽은 사람을 살리고 기적을 행하기 시작했습니다. 고향에서는 기적을 행하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주장을 한다고, 함께 살던 고향사람들이 절벽에서 밀쳐 죽이려고 달려들었습니다. 함께 자란 친구들과 동향인이 이런 일을 하다니 상상이 되십니까?

 

보십시오. 그는 지금 중죄인으로 취급을 당해 고문을 당하고 십자가에 결국 못 박혔습니다. 살면서 한 번도 실망시킨 적이 없는 그 착한 아들이 지금 사람들의 거부를 당하고 자기 백성에게 미움과 버림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매달려 있는 순간을 어떻게 견딜 수 있었는지 우린 상상할 수 없습니다.

 

사복음서 어디에도 마리아의 입에서 그 때 나온 말이 기록되어 있질 않습니다. 시므온의 예언처럼 칼이 마리아의 영혼을 관통하는 슬픔과 고통의 시간을 누가 가늠할 수 있을까요? 신경질적인 발악도, 실신하는 연약함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고통 가운데 미친 듯이 부르짖지도 정신을 잃지도 않았습니다. 한 마디 말도, 신음도 없이 그녀는 분명히 굳게 잠긴 침묵 속에 아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의 슬픔은 실제적이고 극심했습니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을 것입니다. 가시면류관이 둘린 그 이마는 그녀가 맨 처음 입 맞추었던 이마였습니다. 걸음마를 처음 뗄 때, 그녀가 붙잡아 주었던 손과 발에는 못이 박혀있습니다. 세상의

어느 어머니도 그녀처럼 고통을 당하지는 아니했을 것입니다.

 

지금 날카로운 가시에 찔린 이마를 보면서도, 부드러운 손길로 감싸줄 수 없었습니다. 손과 발이 못 박히고 마비되는 것을 보았지만, 따뜻하게 안아 줄 수 없었습니다. 목말라 하는 것을 보았지만 아들의 갈증을 풀어줄 수 없었습니다. 영혼의 적막한 심연 속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아들의 십자가 아래서 서 있기만 하는 그녀의 고통을 상상해 보십시오. 아들의 손발에 못이 박히는 순간, 그녀의 심장에 못이 박히는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2:35)는 예언이 지금 성취되는 순간입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내려다보시며, 그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 어머니께 관심을 보이시고 당신의 고통 중에서 어머니의 필요를 채우시고 자신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관계를 통해서 위로하십니다.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친구는 사랑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를 위하여 났느니라.”(17:17) 좋은 친구는 어떤 날씨 속에서도, 진정한 가족은 모든 고통 가운데 함께 합니다.

 

위대한 어머니 마리아처럼 자식이 고통 받는 자리에 설 어머니들이 이 시대에는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사람 곁에 머무는 아내들이 이 시대에는 필요합니다. 모든 사람이 돌아서고 조롱할 때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외칠 수 있는 친구가 이 시대에는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린 오늘 말씀을 통해서 무엇을 배웠습니까? 예수님처럼 사랑하기 위해서 우리는 가족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어야 합니다. 마음으로 지원을 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정서적인 지원을 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부모노릇을 해보신 성도 여러분, 부모노릇을 하는 데는 즐거움도 있지만 힘든 때도 있습니다. 기쁨만 아니라 슬픔도 겪습니다. 때로는 그 목을 껴안고 싶은 때로 있지만 때로는 목을 조르듯이 고통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사랑은 함께 하는 것이고, 함께 서는 것이고, 한 편을 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들이 고통을 줄 때도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문제를 일으키는 자녀와 함께 하고 있습니까? 세상이 그 아이를 조롱하고 죽이려 들 때도 거기 서서 지지할 수 있습니까? 사랑은 사랑하는 자가 십자가에 내몰리고 매달릴 때도 거기 함께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남편 여러분, 아내를 위해서 기꺼이 목숨을 내줄 사람이라고 아내는 여러분을 믿고 있을까요? 성경은 말합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5:25)

 

주님은 어떻게 교회를 사랑하셨습니까?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가족을 그렇게 사랑하십시오. 교회를 그렇게 사랑하십시오. 자신보다 아내를 더 사랑해야만 합니다. 나의 필요보다 아내의 필요를 먼저 살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남편 됨의 의미입니다. 나의 생명보다 아내를 더 사랑해야 합니다.

 

성경은 남편이 가장이라고 말합니다. 가정의 지도자라고 제사장이라고 말합니다. 요즈음 사람들은 이런 표현을 싫어합니다. 남녀는 평등하다고 주장합니다. 맞습니다. 동등한 인격입니다. 다만 위치가 다를 뿐입니다.

 

그러면 가정의 지도자가 되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가장은 가장 많이 희생하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한 번도 아내를 보고 남편을 위해 목숨을 내어 놓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가장이 인도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두목 노릇을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마음대로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대로 유린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남편은 가장으로 인도하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많은 희생을 치러야 합니다.

 

남편 된 우리가 아내를 위해서 목숨을 내어 놓아야 합니다. 우리 아내들이 남편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어 놓으라고 성경은 단 한 번도 말하지 않습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쉽지만 않습니다만 주님을 더욱 더 사랑하면 아내를 보다 더 쉽게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주님을 깊이 사랑하면 할수록 아내 사랑이 쉬워집니다. 주님과 사랑에 빠지면 주님의 사랑이 아내와 사랑에 빠지게 사랑을 계속 채워 줍니다. 죽어버린 감정도 갈수록 새롭게 해 주실 것입니다. 결심하고 시작해 보십시오. 그러면 감정도 새롭게 움틀 것입니다.

 

말씀 맺습니다. 주님처럼 사랑하는 것을 배우길 원한다면 먼저 가족으로부터 시작하십시오. 관심을 보이고 필요를 채워주고 가족 중 누군가가 십자가에 달린 것처럼 힘들어 할 때 정서적인 지지를 해주십시오.

 

사랑이 사라진 세상에 새로운 사랑을 꽃피우기 위해서 주님을 말씀하십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고 말씀하시고 보라 네 어머니라고 부탁하십니다. 이 부탁을 받은 것처럼 서로 사랑하는 관계를 만드는 일에 최선을 다하시길 바랍니다. 전도는 서로 사랑하는 관계를 맺는 일입니다. 이웃 초청 잔치는 사랑하는 이와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는 관계를 시작하는 일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