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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근두목사 설교

    영상주소
    http://vod.upcweb.net/pastor/2018_0520_정근두.mp4
    성경본문
    고린도후서 5장 14-19절
    설교일
    2018-05-20

이웃초청, 왜 하는가?

고후 514-19

구주대망 2018521일 주일 낮, 찬송 32, 80, 505

 

오늘 우리는 다음 주일에 있을 이웃초청 잔치를 앞두고 이웃초청, 왜 하는가? 라는 주제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우리 스스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할 필요가 절실한 주일입니다. 이웃초청 잔치를 꼭 한 주일을 앞두고 이 주제에 대한 확신 여부가 일의 승패를 가름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만 가진 좋은 소식을 말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은 전도의 제일 큰 장애물입니다. 존 스토트라는 목사님은 복음전도라는 책을 쓰면서 그 첫 장에 우리가 침묵하는 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는 20세기 가장 잘 알려진 영국의 복음주의 목사로서, 우리가 믿고 이웃에게 전하는 복음이 그 주장하는 바대로 복음(福音)”, 좋은 소식이라면, 그리고 그 복음을 이웃에게 전하도록 우리에게 맡기셨다면,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은 죄를 짓는 것이라고 정확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마치 수리아 군대가 도망한 것을 발견한 옛날 사마리아 문둥병자들처럼 우리의 죄를 깨닫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 때 북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 성은 수리아 군대에 의해서 포위를 당했습니다. 포위 상태가 오래 계속되니까 성중에 굶주림이 극심했습니다.

 

나귀 대가리 하나가 수백만 원을 호가하고, 돈 없는 서민들은 오늘은 너희 아이, 내일은 우리 아이를 잡아먹자고 하는 판입니다. 그런 상황에 문둥병자에게까지 돌아올 구호품은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성안에서 굶어죽을 바에는 항복해서 생명을 연명하려고 문둥병자들은 결단을 했습니다. 적에게 죽임을 당해도 성중에서 굶주려 죽는 것보다 다를 바 없기 때문에 도박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입니까? 적진 가까이 나아갔지만 너무 조용합니다. 마침내 한 천막에 들어가 보니 음식을 먹던 대로 차려져 있는데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마병이 다가오는 소리를 수리아 병사들이 듣게 하셔서, 이스라엘 왕이 군사를 돈을 주고 오는 것이란 오판을 하게 하셔서 급히 모두 도망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수일을 굶은 차에 정신 차리지 못하고 차려진 음식을 먹고 마셨습니다. 배가 부르자 주위를 둘러보고, , , 보화를 손에 넣고 감추기 시작했습니다. 이 일을 계속하다말고 스스로를 반성하면서 말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해서야 되겠느냐! 오늘은 아주 좋은 소식을 전해야 할 날이다. 만일 우리가 내일 아침까지 이 기쁜 소식을 전하지 않는다면 천벌을 받을 것이다.”(왕하 7:9)

그러면 우리는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고, 왜 침묵하는 죄를 범하게 되는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여러분이 울산교회 성도가 맞다고 하면 부디 오늘 제가 이웃초청 왜 하는지 말씀드릴 때 악함과 게으름을 탈피하고 주의 거룩한 역사에 동참하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무서운 심판만이 여러분을 기다릴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문둥병자들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내일 아침까지 이 기쁜 소식을 전하지 않는다면 천벌을 받을 것이다.”(왕하 7:9)

 

구약 시대 선지자의 경고를 들어보십시오. 화 있을진저. 시온에서 안일한 자와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이 든든한 자 곧 열국 중 우승하여 유명하므로 이스라엘 족속이 따르는 자들이여”(6:1) 하나님의 도성 시온에 살면서 하나님의 사역에 참여하지 않는 안일한 자를 향한 책망이 여러분과 관계가 없기를 바랍니다.

 

그뿐 아니라 거룩한 싸움에 함께 싸우지 아니한 거민을 향한 엄숙한 저주가 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의 말씀에 메로스를 저주하라 너희가 거듭거듭 그 주민들을 저주할 것은 그들이 와서 여호와를 돕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도와 용사를 치지 아니함이니라.”(5:23)

 

, 그러면 오늘을 사는 우리의 자아상은 어떠합니까? 우리 대부분은 다른 사람의 말을 듣기보다 이야기하기를 좋아합니다. 어떤 이들은 시작하면 정말 말을 멈출 줄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대화가 신앙에 관해서 말하기 시작하면 갑자기 어색한 침묵이 흐르게 된다면, 요즘 표현으로, 급 썰렁해지면 우리가 누구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정말 그 밖의 주제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습니다. 6/12 북미대화나 6/13 지방선거나 평화통일이나, 경제, 사회, 교육, 문화 등 어떤 분야가 나와도 할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에 대해서만 침묵한다면 결코 건강한 성도가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이웃초청 잔치를 한 주간 앞두고 여러분에게 이웃초청, 왜 해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다루려고 합니다. 이웃초청 잔치를 앞두고 복음전도의 이유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사실 복음전도는 그렇게 쉽지만은 않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려면 우리는 세상의 최전방에 서야하며 적의 역공을 당할 위험에 노출됩니다. 그러므로 적절한 전도의 동기를 갖는 것은 중요하고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복음 증거를 하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요? 이웃초청을 왜 해야 합니까? 가장 기본적인 동기는 우리를 사랑해서 자신을 주신 주님께 대한 단순한 순종 때문입니다. 1.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어린 순종이 이번 잔치를 하는 가장 기본적인 동기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장 바라시는 일이 무엇일까요? 우리를 구원하신 후에 우리를 세상에 아직도 남겨두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하나님 자녀를 배출토록 하기 위함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알고 고백하듯이 모든 그리스도인은 값으로 산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종은 주인이 말하면 , 아니요를 말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생각해 보지요라고도 말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닙니다. 순종하는 것만이 유일한 선택입니다.

 

그래서 저는 23년 전에 울산교회로 왔습니다. 서울로 와서 울산교회로 청빙하는 장로님들의 말씀 가운데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말씀하시면 순종하는 것 외에는 종이 선택할 것이 없기에 울산으로 왔습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주님으로 섬기기로 결단한 사람들입니다. 이제는 감사어린 순종의 계약으로 주인에게 묶여있는 존재로 살아야 합니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20).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이제 그 분을 위해서 사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 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후5:14-1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를 위해서 사는 성도들은 그 분의 명령을 순종하는 일에 관심을 가집니다. 우리는 그 명령을 두고 저울질할 자유가 없습니다. 따라서 마지막 명령인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명령을 지나쳐 갈 수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순종을 강조하므로 내켜하지 않는 일을 하는 인상을 줄 수 있으나 순종은 사랑의 열매요 증거일 뿐 아니라 특히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은 명예로운 특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로서 이웃을 향해 파송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고후5:18)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후 5:20)

 

이웃초청을 왜 해야 합니까? 복음 전도의 두 번째 동기는 2 인간을 향한 애정 어린 관심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그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무엇이 오늘 우리 이웃에게 가장 좋은 선물이 될까요? 이제 일반적으로는 춥고 배고픈 시절은 지나갔습니다. 특히 우리가 사는 광역시 울산에서는 먹고 입고 자는 것은 기본적으로 해결되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지금 비록 어렵지만 그래도 전 세계에서 잘 사는 도시 가운데 하나로 손꼽힙니다.

 

그러므로 함께 사는 울산시민들에게 최고선은 단순히 의식주가 해결된 상태 이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심신의 건강이나 사회와 조화를 이루는 삶조차도 인간의 최고선은 아닙니다. 하긴 어디에 살아도 인간의 최고선은 그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에 달려있습니다.

 

사랑하는 울산 교회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은 떡으로만 살 수 없는 영적인 존재이기에 그들의 영혼의 필요를 충족시켜야만 합니다. 인간에게는 사람이 주는 떡으로만 만족할 수 없는 더 깊은 배고픔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늘로서 내린 떡(6:32)을 배불리 우리가 먹고 있으면서 우리 이웃들을 영혼의 굶주림에 시달리도록 버려두면서 사랑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2:15-16)

 

또 그 쓸 것이 몸에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영혼에 필요한 것이라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집니다. 이것은 이웃의 육체적인 필요는 무시해도 좋다는 말이 아니라 어떤 구실이든 이웃의 영적인 필요를 무시하며 그를 사랑한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무책임한 범법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빌 하이벨스의 책이름처럼 사랑하면 전도합니다.”라고 우리는 고백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순종과 사랑이라는 동기도 매우 중요하지만 가장 강력한 복음 전도의 마지막 동기는 3.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라고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사도 바울과 요한에게서 배울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을 설명하면서 자신의 선교는 그 이름을 위하여”(1:5)-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요한도 주의 이름을 위하여”(요삼 7) 나아간 선교사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사랑하고 그동안 후원하고 있는 필리핀의 김 자선 선교사님은 자기 선교 사역을 한 마디로 요약하여 그 왕을 위하여라고 책 제목을 정한 것은 같은 맥락에서 나온 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초대 그리스도인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을 자랑스럽게 여겼기에 열심히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리라”(5:41).

 

그 분의 이름에 대한 사랑은 그 분의 이름에 대한 인간적인 애착이 아니고 그 분이 영예로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동시에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 . . 주의 이름에 돌리소서.”(115:1)라는 거룩한 갈망에서 나온 것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성부 하나님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1:21) 실로 우리 주님께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2:9-11)하게 하셨다는 인식에서 나온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이름을 향한 이런 사랑을 질투라는 용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비롭고 은혜로우신 하나님(34:6)과 질투하시는 하나님(34:14)을 어떻게 동시에 이해할 것인지를 고민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린 유교문화의 영향으로 질투를 칠거지악으로 생각하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떠올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질투라는 단어는 그 자체는 중립적인 단어입니다. 질투가 선한 것인가 악한 것인가는 일어나는 상황에 달려있습니다. 말하자만 선한 질투도 있고 악한 질투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질투의 핵심은 경쟁자를 참아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쟁자가 존재하는 것이 합법적이냐 아니냐에 따라서 질투는 덕목이기도 하고 죄악이 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봅시다. 운동경기에서나 사업에서나 경쟁은 당연히 합법적입니다. 그러므로 승리나 성공이 당연히 자기 것이라고 할 수 없기에 운동이나 사업에서 졌다고 경쟁자에게 원한을 품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결혼 관계에서 질투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결혼 관계는 영원히 배타적인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결혼 생활에서 각 배우자는 경쟁자를 참아 주지 않고 동시에 참아 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 경우 경쟁자를 참아주는 것은 오히려 죄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을 읽어보십시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자신의 신부로 선택하셨기에 이스라엘이 가나안 신 바알에게 꼬리를 친 것은 음란한 매춘행위로서 언약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그 분은 하나님이시며 인간의 유일한 창조자이시기에 우리의 예배를 독점하실 권리가 있으며 인간이 신이 아닌 우상들에게 오도될 때 당연히 질투하실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유일신 사상은 전도의 가장 핵심근거입니다. 만약에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바로 가나 모로 가나 서울만 가면 된다.”라면 꼭 이웃을 교회로 초청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아무 신이나 믿으면 되고 아무 종교나 가지면 된다는 것은, 마치 아무 여자나 만나면 되고, 아무 남자나 결혼하면 된다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여자의 운명은 배우자가 누구냐에 따라서 결정되고, 인간의 운명은 누구를 신으로 삼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기”(딤전2:4-6)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하늘 아래 땅 위에 아니 땅 아래 어디에도 참 신, 참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는 예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단일성과 그리스도의 유일무이성이 없다면 전도할 이유가 없습니다.

 

성경은 선언합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4:12)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담대히 선언합니다.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16:31)

 

혹시 오늘 한 주간 일찍 초대받아 이 자리에 처음 오신 분이 계신다면, 정말 잘 오셨습니다. 천하 인간에 구원을 주시는 유일한 이름,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영접하십시오. 주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여러분 자신뿐 아니라 여러분의 온 가족이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웃 초청 잔치를 한 주간 앞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성경에는 하나님의 영예를 위해서 질투한 기라성 같은 사람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우리는 구약의 주의 선지 엘리야를 먼저 떠올릴 수 있습니다.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jealous)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라고 그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특별한 질투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이방 종교를 당시 왕후 이세벨로 인해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동일한 질투에 불탔던 신약의 사도 바울을 만나 보십시오. 선교사 바울은 아덴을 방문해서 고대 그리스의 영광을 둘러보면서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하여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느낀 분노는 영혼의 발작으로 말할 수 있으며 성경에서 하나님이 분노와 질투를 격발하셨다고 할 때 사용한 바로 그 단어입니다. 바울은 아덴 시민이 우상에게 드리는 예배를 보면서 거룩한 질투로 끓어올랐습니다.

 

성경뿐 아니라 기독교 역사로 눈을 돌리면 이러한 질투를 한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대표적인 한 사람 인도 선교사 헨리 마틴을 만나보십시오.

 

그는 케임브리지의 탁월한 미래를 포기하고 켈커타에 버려진 힌두교 사원에 살면서 하나님을 위해 이 한 몸 불사르게 하소서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는 보통 평온이 몸에 밴 성숙한 사람이었지만 누구든지 그의 주님을 모욕하는 순간 그는 평온을 잃고 말았던 사람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우린 평소에 누가 우리의 자존심을 건드리면 버럭 화를 잘 내면서 우리를 사랑하사 그 목숨을 내어주신 주님의 이름을 모욕하면 죽은 개처럼 침묵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가이없는 사랑으로 새로운 삶을 산다면 이제는 달라져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명예에 관한 일이라면, 우리의 이름이 짓밟히는 상황이라면 우리는 뭐든지 수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평정을 잃지 않고 우리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새로운 삶을 사는 거룩한 사람이라면 주의 이름이 무시되는 세상에 대해서 더 이상 참고 지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 소중한 사람들이 그 분을 알지 못하고 그 분을 사모하지 않는 것을 못 견딜 정도로 그 분의 이름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게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그 분에 대해 말하지 않습니다. 주님에 대해서 침묵하는 죄, 이제는 충분합니다.

 

지금부터 그리고 특히 이번 한 주간 동안 더 이상 침묵해서는 안 됩니다. 침묵하는 거대한 군중, 주님을 위해 나서지 않는 안일한 무리들로 남아서는 안 됩니다.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가 그 분의 영광을 제대로 본다면 그 분이 공적으로 무시를 당하는 세상 가운데서 우리는 더 이상 침묵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님 때문에 새로운 삶을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과거는 용서받았다는 확신이 있습니까? 예수님 때문에 오늘을 사는 새 힘을 공급받고 있습니까? 열린 미래를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만 이런 삶을 산다면 여러분은 악한 자들입니다.

 

그 옛날 마치 수리아 군대가 도망한 것을 발견한 사마리아 문둥병자들보다 못한 자들입니다. 지금껏 침묵하고 살아온 우리의 죄를 깨닫고 고백해야 할 날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해서야 되겠느냐! 오늘은 아주 좋은 소식을 전해야 할 날이다. 만일 우리가 내일 아침까지 이 기쁜 소식을 전하지 않는다면 천벌을 받을 것이다. , 우리가 당장 왕궁으로 달려가서 이 소식을 전하자!”(왕하 7:9, 우리말)

 

어느 교회 앞에서 35년 동안 과일 장사를 한 할머니가 예수를 믿고 나서 신자들을 향해서 무어라고 했다고 말했는지 기억하십니까? 이 숭악한 것들, 한 번도 내보고 예수 믿으라고 말하지 않고 이 좋은 예수를 저거들끼리만 믿은 것들이라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했다는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뒤에 그의 과일 가게 팔려고 내어 놓았다가 술집은 줄 수 없다고 고민하다가 자기에게 새 삶의 길을 걷게 한 교회에 기증을 해서 지금은 아나바다 가게로 사용하고 있다는 간증을 기억하십시오. 과연 우리 교회 주변에 있는 이웃 사람들은 우리를 향해서 뭐라고 말할까요?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모든 예배자는 전도해야 합니다. 모든 예배자는 전도자이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전도를 할 때 완성됩니다. 주일 예배는 주중 전도로 이어져야 의미가 있습니다.

 

예배란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경배하고 자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배란 하나님의 좋으신 이름을 찬양하고 축복하고 경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증거란 바로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가 자랑하는 여호와의 이름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좋으신 하나님의 이름 앞에 우리의 소중한 이웃들을 초대해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정말 우리가 예수 믿고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면 우리는 결단해야 합니다. 예수 믿고 기쁨 기도 감사의 삶을 시작했다면 우리는 우리의 소중한 하나님을 이웃에게 전해야 합니다. 그들도 우리처럼 기쁨 기도 감사의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 그렇습니다. 예배는(worship)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worth-ship)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시며라고 기도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께 예배하지 않는 것에 무관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최초의 선교가 시작된 것이 예배 중이었다는 것은 놀랄 것이 아닙니다. 최초의 선교사 바나바와 바울의 파송이 예배하는 안디옥 교회 가운데 시작된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성경적인 복음 전도는 회심과 함께 완전히 끝나는 것이 아니라 회심은 예배를 향한 서곡입니다. 궁극적인 목적은 회심 자들을 하나님께 드리는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자는 모두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이어야 하면 이웃을 초청하는 것으로 우리의 예배가 진정한 것임이 확인되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전도, 우리의 초대, 우리의 복음증거는 예배를 통해 완성됩니다.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세상 모든 백성이 주와 그리스도의 백성이 되도록 초대하는 일에 여러분 모두를 파송하는 예배가 되기를 빕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