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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근두목사 설교

    영상주소
    http://vod.upcweb.net/pastor/2018_0708_정근두.mp4
    성경본문
    시 23:3
    설교일
    2018-07-08

상한 감정을 주께 맡겨라

23:3a

구주대망 201878일 주일 낮 설교 찬송 25, 91, 391(혹은 388)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 이 자리를 찾으신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우린 여름을 맞이해서 시편 23편을 계속 살피고 있습니다. 시편 23편을 통해서 현대인의 삶을 위협하는 7대 스트레스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소시켜주시는지를 살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상한 감정을 치유하시는지를 살피려고 합니다. 시편 233절은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라고 시작합니다. 우리 모두는 주기적으로 우리 영혼을 회복시켜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입는 상처 때문입니다. 세상을 사는 것은 만만치 않습니다.

 

때론 낙담되기도 하고 때론 침체에 빠지기도 하고 절망의 자리에 들어가기도 합니다. 우리는 곤비하고 실패하고 좌절과 두려움을 겪습니다. 우리 모두는 과거의 숨겨진 상처를 가지고 있습니다. 찰과상도 입지만 때로는 칼자국 같은 깊은 상처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을 회복시키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의 상한 영혼을 치유하십니까? 첫 째로 1. 우리 죄책감을 제거하도록 내어맡기십시오. 죄책감보다 더 우리의 영혼을 재빠르게 상하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내 잘못이 바로 내 머리에까지 미치니, 이 무거운 짐을 내가 더는 견딜 수 없습니다. 내 몸의 상처가 곪아터져 악취를 내니 이 모두가 나의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더 떨어질 데 없이 무너져 내린 이 몸, 온종일 슬픔에 잠겨 있습니다.”(38:4-6, 표준새번역)

 

우리 모두는 죄책감을 느끼는 수많은 이유들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실수하기 때문입니다. 본성상 우리는 죄책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죄책감을 멀리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 생각 속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장소에 가서 삶을 펼쳐도 죄책감은 우리의 의식과 함께 따라옵니다.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20:27) 그렇습니다. 사람의 양심은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넣어두신 등불과 같아서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다 비추어보고 있기에 우리 자신으로부터 우린 숨을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죄책감을 벗어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의 마음속에 자리한 죄책감을 떨쳐버릴 방안은 무엇입니까?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부인하고 없는 것처럼 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과거를 파묻어 둘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성사되지 않습니다. 파묻어 버렸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죄책감은 되살아나서 여러분을 괴롭힙니다. 죄책감을 부인하는 것은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 아닙니다.

 

아니면 죄책감을 축소시키면 될까요? 그렇게만 된다면 괜찮은 거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왜 여전히 죄책감을 가지고 살겠습니까? 가능하다면 아주 잊어버리고 살면 안 될까요? 죄책감을 축소시키는 것은 성사되질 않습니다.

 

그러면 기준을 낮춤으로 죄책감과 타협할 수 있을까요? 죄책감을 느낄 때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죄라고는 더 이상 믿을 수가 없어. 거듭해서 죄를 범하면 더 이상 죄처럼 보이지 않아

 

열 번째 살인은 처음처럼 나쁜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일을 거듭거듭 한다면 여러분의 양심은 결국 화인 맞아서 더 이상 죄책감을 느낄 수 없게 됩니다.

 

또한 여러분은 죄책감을 합리화시킬 수도 있습니다. 누구나 그런 일은 하거든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사실 누구나 그런 짓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누구나 한다고 해도 그것이 여러분을 한 행위를 가볍게 하진 못합니다.

 

그리고 죄책감이 들면 다른 사람들을 비난할 수도 있습니다.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면 재빨리 그 책임을 누군가에게 전가시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한다고 해서 죄책감이 가벼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인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못을 하면 자책을 합니다. 스스로 자신을 학대하고 처벌합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나의 잘못에 대해서 누군가가 값을 지불해야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무의식적으로 우리의 죄에 대해서 자신이 그 값을 지불해야 한다고 설정해 두었습니다.

 

죄책감이 여러분을 괴롭힙니까? 죄책감이 여러분이 침체시킵니까?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실패에 대한 책임을 자신에게 묻습니까? 때로는 성공한 사람도 스스로의 죄책감 때문에 동굴 속으로 숨어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성공했지만 떳떳하지 못한 요소가 있기 때문입니다.

 

죄책감으로부터 도피하는 이 모든 시도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죄책감에 대해선 오직 하나의 해결책이 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께 내어놓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것을 깨끗이 치워버릴 수 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비록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이상과는 먼 거리에 있을지라도, 만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 없다고 선고해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은총으로 값없이 우리 죄를 없애 주셨기 때문입니다.”(3:23,24 현대어성경)

 

기독교의 진수는 여러분의 죄 값을 이미 예수께서 청산하셨다는 소식입니다. 여러분이 잘못한 모든 죄를 이미 청산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미 여러분이 행한 잘못이나 앞으로 짓게 될 잘못이나 실수, 후회를 하나님께서는 이미 용서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의 죄책감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여러분의 죄 값을 어떤 심리학자도 처리하지 못합니다. 아무도 여러분에게 죄를 용서할 권한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용서는 여러분이 얼마나 덜 악하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얼마나 선한가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행한 것이 무엇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이미 여러분을 위해서 행하신 일이 무엇이냐가 중요합니다.

 

오직 온 우주의 창조주께서는 여러분을 용서할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행한 죄가 무엇인지 저는 모르지만 상관이 없습니다. 믿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공짜 선물을 받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이 소식을 우리는 복음, 기쁜 소식이라고 부릅니다. 구원은 공짜 선물입니다. 모든 죄를 깨끗하게 말소시킵니다. 다시금 새로 시작하게 만듭니다. 깨끗한 양심으로 새 출발을 하게 합니다.

 

그러나 혹시 여러 차례 하나님께 용서를 구했는데 아직도 죄책감을 느끼고 있습니까? 몇 차례가 문제가 아닙니다. 계속해서 죄책감을 느끼신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시는 방법을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즉각적이고 공짜요 완벽한 것이며 무조건적인 것입니다.

 

맨 첫 번 용서를 구할 때 모두 깨끗하게 씻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 이미 용서를 구한 문제에 대해서 여전히 죄의식을 느끼신다면 그 죄의식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괴롭히려는 사탄으로부터 온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단은 여러분이 좋지 않은 느낌을 갖기를 원하고 계속해서 불안해하기를 바랍니다. 사단은 여러분이 죄를 짓기 전에는 그것은 별거 아니라고 부추기고 죄를 지은 다음에는 그건 너무 큰 죄라서 하나님도 용서해 주시지 않는다.”고 속삭입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죄를 용서하십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여러분이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사실을 기록한 명세서를 지워 버리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죄목을 적은 명세서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아 무효로 만드셨습니다.”(2:13,14 현대어성경)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우리의 심령에 자리 잡은 계명을 어긴 증거를 씻어버렸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불리한 모든 문서의 기록을 못 박으셔서 완전히 무효화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이 용서하시면 그 용서는 완벽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셨습니다. 다시는 건져 올리려는 시도를 하지 마십시오. 낚시금지 팻말에다가 기억금지령까지 내리셨습니다. 하나님이 잊으셨기에 여러분도 잊어버리십시오.

 

만약 여러분이 용서받은 것을 느끼지 못한다면 무언가 여러분의 삶에 잘못될 때마다 하나님이 나를 갚아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잘못을 처벌하시기를 즐기는 분이 아니십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그가 처벌을 받으심으로 우리는 더 이상 처벌받지 않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과는 십자가 위에서 다 청산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예수님이 대신 처벌을 받았는데 여러분을 또 처벌하실 리 없습니다.

 

우리가 처벌 받지 않도록 주님께서 자원하셔서 대신 처벌 받으셨습니다. 더 이상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지 마십시오. 예수께서 이미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거기서 우리의 모든 죄책을 감당하셨습니다.

 

둘째로 2. 하나님께서 우리 슬픔을 제거하도록 하십시오. 삶의 여러 가지 일들이 우리를 상하게 할 뿐 아니라 때로는 우리에게 슬픔을 안게 줍니다. 살다보면 누구나 상처를 받습니다. 그리고 삶에는 외로움도 있습니다.

 

여기는 결코 천국이 아니라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여기는 불완전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날은 고독을 느끼고 마음이 상하기도 합니다. 절망하기도 하고 처절한 외로움을 겪기도 합니다. 슬픔과 상실, 고통, 비탄을 경험합니다.

 

20년 넘도록 함께 살던 사람으로부터 버림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런 상황이 오지 않도록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처절한 고통을 맛보기도 하는 곳이 이 세상입니다. 때로는 버림을 받고 이혼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런 순간 누군들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는 없을 것입니다. 거부당한 고통이란 아무도 겪지 말아야 할 슬픔입니다. 그런 처지에서 겪는 아픔과 외로움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일을 마치고 텅 빈 집에 들어가서 펑펑 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보이는 날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도 말리는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들 자기들의 일로 바빠 보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잘나가는 데 자기만 고통 속에 질질 끌려가는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아픔에 함께 하시고 여러분의 상처를 싸매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상처받은 사람들의 친구가 되기로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비록 예수님만이 온전한 치유를 하실 수 있지만 우리도 주님의 치유사역에 함께 하길 원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슬픔으로 찢길 때 여러분은 어떻게 대응하십니까? 그 때 그랬더라면하고 아쉬워하고만 있으렵니까? 아니면 두꺼운 껍질 속으로 깊숙한 동굴 안으로 들어가시렵니까? “다신 아무도 날 상처주지 못하게 할 거야.”라고 되뇌겠습니까?

 

그것이 유일한 선택이 아닙니다. 또 다른 선택을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여러분의 영혼을 치유해 주시도록 맡길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다윗은 슬픔을 아는 사람이고, 슬픔이 얼마나 우리를 망가뜨리는지를 잘 알았습니다.

 

주님, 나를 긍휼히 여겨 주십시오. 나는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한에 사무쳐서, 내 눈이 시력조차 잃었습니다. 내 혼과 몸도 기력을 잃고 말았습니다.”(31:9 표준새번역)

 

때로는 우리 자신의 어리석은 행동 때문에 슬픔과 비탄에 빠지기도 합니다. 우리는 어리석은 짓을 하고 심각한 실수를 저지르기도 합니다. 그를 두고 우리는 탄식하고 슬퍼합니다.

 

다윗은 삼하 12장에서 어떻게 슬픔을 다룰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다윗을 밧세바와 더불어 간음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남편까지 죽였습니다. 그 죄책감을 시편 51편에서 토설합니다.

 

죄책감으로 괴로워할 때 시편 51편을 읽어보십시오. 거기서 회복의 길을 찾아보십시오. 삼하 12장을 보면 그 불의한 관계에서 태어난 아이가 매우 심하게 아팠습니다. 다윗은 슬퍼하며 금식하고 간구했습니다.

 

하나님, 이 아이는 아무 죄가 없습니다. 죄를 지은 것은 나입니다. 주의 목전에서 악을 행한 것은 나입니다. 부디 이 아이를 살려주십시오. 이 아이가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라고 매달렸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죽고 말았습니다.

 

이때 다윗은 슬픔 가운데 무엇을 했습니까? 세 가지 행동을 했습니다. 이 세 가지가 바로 우리가 배울 점입니다. 첫 째로 그는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드렸습니다. 신하들의 질문에 대한 다윗의 대답을 들어보십시오.

 

아이가 살아 있을 때에, 내가 금식하면서 운 것은, 혹시 주께서 나를 불쌍히 여겨 주셔서, 그 아이를 살려 주실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오. 그러나 이제는, 그 아이가 죽었는데, 무엇 때문에 내가 계속 금식하겠소? 내가 그를 다시 돌아오게 할 수가 있겠소? 나는 그에게로 갈 수 있지만, 그는 나에게로 올 수가 없소.”(삼하 12:22,23)

 

살다보면 부모에 의해서 상처를 입을 수도 있고 동료들이나 친구들에 의해서도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아무리 슬퍼해도 과거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감정적 회복과 치유, 영혼의 회복을 위한 첫 걸음은 수용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드리십시오. 우리 모두는 우리가 살아온 배경을 바꿀 수 있질 않습니다. 우리가 경험한 상처도 바꿀 수 없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마음과 의지, 감정을 치유하는 첫 걸음은 수용입니다.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한 첫 걸음입니다. 변화가 불가능한 것은 수용하십시오.

 

둘째로 과대포장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아뢰십시오. 하나님께 그것을 기도로 올려 드리십시오. 살다보면 상처를 입는 것도 기정사실이고, 고통을 겪는 것도 분명합니다. 그러나 비참해 지는 것은 여러분의 선택사항입니다.

 

시편 37편을 보십시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37:5) 난관에 부딪칠 때 재앙으로 여기고 절망하는 대신 이 상황을 하나님께서 도우셔서 극복하길 간구하는 것이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그러자 다윗은 땅바닥에서 일어나서 목욕을 하고, 몸에 기름을 바르고, 옷을 갈아입은 뒤에, 성전으로 들어가서 주께 경배하였다.”(삼하 12:20a) 다윗은 슬픔을 딛고 일어나 성전을 향했습니다. 거기서 새로운 전망과 새로운 힘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셋째로 다윗은 잃어버린 것보다 남겨진 것에 주목했습니다. 그 뒤에 다윗이 자기의 아내 밧세바를 위로하고 동침하니, 그 여인이 아들을 낳았다. 다윗이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고 하였다”(삼하 12:24)

 

비록 불의한 관계에서 태어난 자식이지만 자식의 죽는 것을 바라보는 것은 부모의 고통입니다. 그래서 부모가 죽으면 자식은 부모를 땅에 묻지만, 자식이 죽으면 부모는 가슴에 묻는다고 말하는 가 봅니다.

 

그 아이의 죽음으로 자신도 슬펐으나 다윗은 깊은 슬픔에 빠진 자기의 아내 밧세바를 위로했습니다. 남겨진 아내와 그로 인해서 새로 얻게 된 아들 솔로몬을 주목한 것입니다.

 

혹 여러분 중에 지금 슬픔의 강을 건너고 계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을 끝장 내지 아니했습니다. 여러분의 삶이 끝나진 않았습니다. 여러분의 삶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께서 여러분의 감정을 치유하시도록 한다면 새로운 소망이 있습니다.

 

죄책감을 제하고 슬픔을 사라지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만약 여러분이 아직도 살아 있다면 하나님은 여러분을 끝장을 낸 것이 아닙니다. 지금 믿기지 아니해도 여러분의 남은 생애가 여러분의 삶에 최상의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시온에서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재 대신 화관을 씌어 주시며, 슬픔 대신에 기쁨의 기름을 발라 주시며, 괴로운 마음 대신에 찬송이 마음에 가득 차게 하셨다 . . .”(61:3)

 

이제 여러분 각자가 선택해야 합니다. 고통의 감옥에 갇혀 남은 삶을 보내든지 재 대신 화관을, 슬픔 대신 기쁨의 기름을, 괴로운 마음 대신 찬송을 선택하든지 택일하셔야 합니다.

 

셋째로 3. 하나님께서 우리 원한을 맡으시도록 하십시오. 원한은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한 일로부터 생깁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한 일로부터는 죄책감을 갖지만 다른 사람이 내게 한 일로부터는 원한을 품습니다.

 

인생길을 걷다보면 상처를 주고받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이 삶의 현실입니다. 여러분도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다른 사람들도 여러분에게 상처를 입힐 것입니다. 때로는 의도적으로, 때로는 비의도적으로든 상처를 주고받게 됩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상처를 받을 때 품게 되는 원한을 어떻게 처리해야 합니까? 쓴 뿌리를 품고 살 것인지 더 나은 삶을 사는 계기로 삼아 단 열매를 맺을 것인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그것은 마음먹기에 달렸습니다.

 

상황이 우릴 짓밟게 할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길을 찾아갈 것인지 결정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은 상처는 우리로 하여금 쓴 뿌리를 갖게 할 수도 있고, 단 열매를 맺게 할 수도 있습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품는 원한을 다른 사람을 조금도 해치 못합니다. 다만 여러분 자신을 해할 뿐입니다. 어쩌면 원한을 품게 한 그 사람은 자기가 무슨 일을 했는지, 그리고 여러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무 것도 모를 수 있습니다. 아무런 상관없이 자기 길을 갈 것입니다.

 

미련한 사람은 자기의 분노 때문에 죽고,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의 질투 때문에 죽는 법이다.”(5:2) 잘못하면 과거에 여러분에게 상처를 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지금도 상처를 주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입니다.

 

제발 여러분의 과거는 지나가게 하십시오. 마음에 되새기지 않는 한 그들은 여러분에게 다시 상처를 입힐 수 없습니다. 어쩌면 그 사람들은 이미 죽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과거를 떠나보내지 않으면 그들은 여전히 무덤에서부터도 상처를 줄 수도 있습니다.

 

원한을 품는 것은 그들에게 상처를 입힐 수 없습니다. 다만 자신에게 상처를 줄뿐입니다. 분통 터뜨려 봤자 자네 몸만 상할 뿐이지. 자네가 그렇게 화를 낸다고 해서 땅이 뭐 버림받기라도 할 것 같은가? 바위가 끄떡이라도 할 성싶은가?”(18:4)

 

그러면 여러분은 어떻게 분노를 처리해야 합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12:19)

 

이 세상은 죄 때문에 공평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때로는 무고한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악한 사람들이 잘 되기도 합니다. 공의가 항상 세상에는 시행되지 않습니다. 여기는 죄악 된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한날 모든 것을 바로 잡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것을 공평으로 판단하실 심판 날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잘못된 것을 바로 잡고 미해결된 것을 해결하실 것입니다. 범죄와 불의, 편견과 인종차별, 강간, 살인, 모든 죄악을 정리하실 것입니다.

 

한날 하나님께서 모든 문제를 바로 잡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동안 여러분이 스스로 보복하려고 들지 마십시오. 그렇게 하면 분노가 여러분을 삼키고 기쁨을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대신 무엇을 해야 합니까?

 

언제나 남을 용서하고 원한을 품지 마십시오. 주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을 기억하고 여러분도 다른 사람을 용서하십시오.”(3:13, 현대어성경) 심판 날이 오기까지 분노와 원한을 품지 말고 오히려 용서하는 마음을 품고 원수 갚음을 주님께 맡기는 것이 성도의 태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도무지 그 인간은 용서할 수 없다고요? 그래서 원한을 품고 있습니까? 그러면 손해는 여러분 자신이 봅니다.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받은 상처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드릴 때만 치유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말씀 맺습니다. 아직도 죄책감을 갖고 있는 문제는 무엇입니까? 가끔씩 튀어나오는 죄의식은 무엇 때문입니까? 아무리 축소시키고 합리화시키고 타협하고 다른 사람에게 전가해도, 아니면 자기의 가슴을 쳐도 처리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죄책감을 처리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새롭게 하시는 일에 전문가이십니다. 새로 태어나게 하십니다. 흰 눈처럼 양털처럼 깨끗케 하십니다. 계속 죄책감을 갖고 살아갈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주님께서 용서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받아드리기만 하십시오. 더 이상 과거 때문에 스스로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자기 암시도 자기 치유법도 필요 없습니다. 단지 여러분의 목자이시고 구원자이신 예수님만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고 죄책감을 처리하십니다.

 

슬픔과 비탄 가운데 투덜대고 불평하며 사시렵니까? 잃은 것 대신에 남은 것은 바라보십시오. 슬픔이 여러분이 무기력하게 만들고, 스스로 만든 비탄의 감옥 속에 자신을 쳐 넣습니까? 아무도 문을 잠그지 않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가둘 뿐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슬픔에서 건저내시는 분이십니다.

 

원한과 복수심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러분은 아직도 여러분의 과거에 만난 사람이 현재의 여러분을 계속 상하게 허용하십니까? 이제는 미움에서 벗어나십시오. 더 이상 그 사람이 여러분에게 상처를 입히지 못하게 하십시오. 여러분이 허락하지 않으면 아무도 여러분에게 상처를 줄 수 없습니다. 과거는 과거입니다.

 

이제 하나님께 여러분의 죄책감과 슬픔, 원한을 맡기십시오. 예수님은 여러분의 상한 감정을 치유하시길 원하십니다. 주님께 자신을 맡겨 드리면 주님을 여러분을 회복시키십니다. 여러분의 영혼을 소생시키십니다.

 

다윗처럼 기도하십시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42:5) 예수님은 여러분의 영혼을 소생시키길 원하십니다. 예수님을 여러분의 목자로 삼고 자신을 맡기면 주님은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하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