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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근두목사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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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본문
    사도행전 9:36-42
    설교일
    2018-08-19

여 제자 다비다

사도행전 9:36-42

구주대망 2018819, 주일 찬송 31, 149, 215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올 여름은 유난히 덥고 길었습니다. 우린 요즈음 과거 어떤 때와는 다른, 힘든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특히 11년 전 아프간 사태 이후에 쏟아진 한국교회를 향한 비난, 아니 비난을 넘어선 증오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도록 강요하고 있습니다. 선교뿐 아니라 교회사역 전반을 돌아보게 만듭니다.

 

물론 세상이 우리를 미워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당시 아프간 납치에 관련한 기사가 실릴 때마다 악플로 인터넷에 도배가 되었던 사태는 새로운 현상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지난 130년 동안 1200만 성도를 기록한 한국 기독교회는 경이적인 성장을 했습니다. 때로는 앞뒤 돌아보지 않고, 열심히 전도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프간 사태로 폭발된 반감은 어쩌면 무차별적이고 공격적인 한국 기독교 전도에 대한 반감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시도 때도 없이 문을 두드려, 우리 울산처럼 산업수도에는 3교대하고 곤한 잠을 자는 사람들을 깨워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부드럽게 표현해도 들어보면 알지 않습니까? 비록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고 노골적인 표현을 하지 않고, 예수 믿고 천국 갑시다.”라고 부드럽게 말해도 뒤집어 놓고 보면 아는 말 아닙니까?

 

별 것도 아닌 자들이 자기들은 뭐가 잘났는데 우리에게 예수를 믿으라, 말라 하고 권유하는 것 자체가 그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가끔씩 대서특필되는 기독교의 비리를 보면, 회개는 정작 자기들이 해야 하는데, 회개하라고 요구하니, 그동안 정말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입니다.

 

지난 아프간 사태는 그들에겐 아주 좋은 반격의 기회였습니다. 온갖 폭언과 야유와 조소를 쏟아놓는 기회였습니다. 하지만 130 여 년 동안 우리 기독교인들이 좀 더 다르게 처신했더라면 사태는 달랐을 수도 있습니다. 우린 좀 더 겸손하게, 좀 더 섬김으로 접근했어야 했습니다. 우리가 믿는 진리를 사랑 가운데 전해야 했습니다.

 

사실 멀리 아프가니스탄보다, 북쪽 동포보다, 지금 예배당이 자리하고 있는 현장의 힘든 사람들을 먼저 살폈어야 했습니다. 온 세상에 흩어져 있는 먼 선교지보다 가까운 주변의 어려운 분들부터 살펴야 했습니다. 그런 아쉬움 때문에 오늘 여러분과 함께 여 제자 다비다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 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36) 다비다를 도르가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우리에게 그 이름의 의미가 다가오지 않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식 이름 다비다를, 헬라말 도르가로 번역해도, 우리에겐 뜻이 통하지 않기에 도루묵처럼 들립니다.

 

그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하는 이야기의 서두에는 다비다가 어떤 특성을 가진 제자인지 소개합니다.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36) 다비다는 특별한 신분을 가진 여자는 아니었고, 다만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은' 사람으로 소개됩니다.

 

대단한 경력을 가진 여성도가 아닌 것 같습니다. 전국 여전도회 회장을 지내기는커녕 지역 교회 어떤 조직의 팀장도 지낸 것 같지 않습니다. 그냥 바느질하던 여자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요즘은 세상이 워낙 바뀌어 져서 옷 하나 스스로 만들 줄 몰라도 잘 살아 가고 단추 하나 달 줄 몰라도 시집가서 구박받는 일이 없습니다. 구박받기는커녕 그런 시시한 것 가지고 사람을 평가한다고 도리어 시어머니를 몰아세우는 시대입니다. <피아노-컴퓨터-운전>

 

사랑하는 여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은, 단군 이래로 가장 좋은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반찬 갖추어 밥상 하나 차릴 줄 몰라도, 조용히 문 닫고 출근하는 착한 남편을 두고 살고 있습니다. 남편만큼 라면조차도 끓일 줄 몰라도, 사랑 받으며 살아갈 수 있는 시대이지만 당시는 달랐습니다.

 

여자라면 누구나 밥 짓고 바느질 정도는 할 수 있어야 했던 시대이지만, 물론 솜씨 있는 바느질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바느질 잘 한다고 전문인 대우를 받던 시대는 아니었습니다. 그것 가지고 내세우다가는 바느질 쟁이 주제에 . . .”라고 핀잔 듣기 알맞을 것입니다.

 

여 제자 다비다의 은사를 눈여겨보십시오. 은사 활용은 대단한 여성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특별히 눈에 띄는 여성이 아니지만 다비다는 자기의 은사로 주님의 교회를 잘 섬긴 여성입니다.

 

성도이면 누구나 한두 가지 은사는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마다 재능이 서로 다르듯이 은사도 각각 다릅니다. 각 사람에게 다른 은사를 주심은 서로를 잘 섬기기 위함입니다.

 

기엔 카젠의 믿음의 여인들이라는 책을 보면 저자의 상상력이 우리의 생각을 풍성하게 도와줍니다. 저자는 이 여인이 결혼할 기회가 없었고, 그래서 어머니가 되는 기회도 없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남편을 통해 소개되지도 않고, 아들에 의해 부양되지도 않고, 다만 도움을 베풀었던 과부들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과부라고 소개되지도 않습니다.

 

그냥 여 제자라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여 제자라는 소개는 사도행전 뿐 아니라 신약전체를 통해 딱 한번 나오는 호칭입니다. 어쩌면 정확해야 하는 누가가, 그녀를 처녀라고 부르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결혼 한 적이 없는 여인을 과부라고는 더더욱 부를 수도 없으니까 여 제자라고 불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남편 때문에 대단해진 부인도 아닙니다. 아들을 통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지도 않았던 그저 평범한 여인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유일하게 여 제자라고 소개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자라는 말은 의미 있는 말입니다. 제자는 선생을 닮은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세상에 오셔서 많은 사람들을 섬겼던 주님을 닮아 다른 많은 사람을 섬기던 여인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10:45)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생은 누구에게나 타인을 섬기는 기회일 때 의미가 있습니다. 자신만을 위한 삶을 생을 헛되이 사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 자기 배우자, 자기 자식만을 챙기는 삶은 특별한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도 사역을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은사의 발견은 사역의 기쁨을 위함입니다. 주님을 닮은 여인 다비다는, 다른 이들의 삶을 부요하게 하는, 그들의 미래를 밝게 만드는 삶을 살았습니다.

 

여 제자 다비다, 그녀의 삶은 가난한 과부들을 섬기는 일에 쏟아 부어졌습니다. 참된 믿음은 고아와 과부를 그 어려운 중에 돌아보는 것이라는 야고보의 정의에 비추어 볼 때도 제자라고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여인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며 살았습니다. 그 결과 성경은 선행과 구제가 심히 많더니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냥 한 번씩 구제헌금에 참여하는 것이 아닙니다. 돈 잘 버는 남편 만나 절기에 기십만 원쯤 내고는 만 원짜리 한두 장 내는 다른 이들과 비교해 그래도 꽤 많은 헌금을 한다고 자부하는 여인이 아니었습니다.

 

물려받은 유산도 없이,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은 삶을 살기 위해서, 그녀는 꽤 부지런했을 것입니다. 큰 사업체를 가진 여인도 아니고, 가진 것이라고는 손에 든 바늘 하나가 고작인 그녀가 선행과 구제를 심히 많이 하려면, 날 밝을 동안 부지런히 손을 움직여 일했을 것이고, 어두워지면 일한 것 가지고 집집마다 고아와 과부들을 찾아 베푸는 발걸음이 빨랐던 여인이었습니다.

 

지중해 연안의 항구도시 욥바에는 웬 과부가 그렇게 많은지? 욥바 바닷가 사람들의 삶은 어느 때든지 불어 닥치는 큰 바람에 의해 송두리째 흔들리기가 일 수였습니다. 지금은 일기예보가 있으니까 망정이지, 그 때는 하늘에 먹구름 덥히고 큰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먼 바다에 나간 남편들 돌아오기까지는 마음 조리는 여인들이 살던 곳이 욥바입니다.

 

하늘에 먹구름이 드리우면, 하늘만 어두워지는 것이 아니라, 남편을 바다에 내어보낸 아낙네들의 마음도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갑작스런 광풍이 불기 시작하면 바다에 나간 남자들만 살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아니고 집안에서 아이들을 돌보고 있는 여인들도 어쩔 줄을 몰라 합니다.

 

캄캄한 밤, 불어대던 광풍은 여인들의 소망의 줄을 끊어놓기가 일 수였습니다. 날이 밝아와 바다는 다시 잔잔해지고 햇살은 고요히 물결 위에 퍼지지만 나간 남편이 돌아오지 아니하면, 여인들의 마음에 일어난 먹구름은 비가 되어 내립니다. 하루, 이틀 지나도 남편이 돌아오지 않으면 하늘이 무너지는 비극만이 그녀들을 기다릴 뿐입니다.

 

어딘가 사람 시체가 떠밀려왔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 남편임을 확인하고 통곡하는 여인들은 그래도 한이 없는 여인입니다. 남편의 시체조차 찾지 못하고, 빈 관을 땅에 묻어 장사 치러야 하는 여인들이 많았습니다. 그런 한 많은 여인들이 사는 곳이 욥바였습니다.

 

남편이 풍랑에 휩싸여 물에 빠져 죽고 나면, 남편만 잃는 것이 아니라 수입원까지 사라져 버리고, 남은 자식 데리고 살기 위해서는 겨울 갯바람만큼 억척스러워져야 했습니다. 바닷가 마을, 항구 도시에 그리스도인으로서 다비다는, 세상에 오신 주님처럼 할일 많은 여인이었습니다.

 

그녀가 죽은 후 둘러선 많은 과부들을 통하여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추측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둘러싼 과부들로 인해 다비다가 꽤 나이든 사람으로 여깁니다만, 본문에는 그런 우리의 생각을 뒷받침할만한 아무런 근거가 없습니다.

 

또한 일반적으로 과부라면 나이 많은 여인들을 떠올리지만, 여러분이 알다시피, 나이든 사람만이 혼자되는 것은 아닙니다. 30, 40대 젊은 여인들도 홀로 될 수 있습니다. 싱글 맘으로 살아가는 일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습니다.

 

미국 LA에 있는, 세상에서 제일 큰 공동묘지에 묻히는 사람의 연령층을 보면, 50대 이후보다 이전에 사람들이 더 많다는 정보를 접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나이가 50대나 그 이후라면 살아있다는 사실로 인해서 우선 감사하십시오. 게다가 배우자까지 살아있다면 여러분의 감사는 배가 되어야 합니다.

 

아직도 살아있는 그 인간 때문에 속상해하지 마세요! 그 인간은 없는 것보다 못하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중단하세요! 암에 걸린 배우자를 간호하다 지쳐서 옆에서 보는 사람이 민망하리만큼 구박하지 마세요, 제발! 먼저 보내고 나서 외로워 우울증에까지 걸리면, 한 때 우리의 생각이 항상 옳지는 않다는 것을 확인합니다.

 

물론 다비다는, 미혼 여성일 가능성은 매우 높습니다. 오히려 여 제자라고 소개된 것으로 보아 한창 활동력이 왕성한 시기의 여자로 생각하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하여튼 다비다는 제자로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던 여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특별한 관심을 갖는 무리들을 돌보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특별한 애정을 가진 대상들이 누구입니까? 어느 시대든 힘들게 살아가는 계층입니다. 경제적으로로 취약한 계층뿐 아니라, 정서적으로도 고달픈 사람들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들, 고달픈 사람들, 외로운 사람들과 함께 하십니다.

 

그 당시는 가장 가난한 계층이 바로 과부요 고아였습니다. 그러기에 누구의 표현대로 고아와 과부는 하나님의 편애의 대상입니다. 당시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남편 없는 여자만큼 불쌍한 사람이 없고, 부모 없는 자녀들만큼 가엾은 아이들은 없습니다.

 

요즈음은 세상이 달라졌습니다. 부모 없는 아이들은 여전히 불쌍하지만 요즈음은 남편 없는 여자보다, 아내 없는 남자들이 더 불쌍합니다. 아내 없는 남자들은 불쌍하다기보다, 정말 참담합니다.

 

아내를 먼저 보낸 돈 없는 남자, 재혼은 꿈도 꾸지 못하는 세상입니다. 수입이 없어지면 자기 남편도 버리는 악한 시대입니다. (#어느 제자반의 지각생의 사연# 아파트라도 한 채 약속해 줄만한 재력이 없으면 재혼은 꿈도 꾸지도 못하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2천 년 전 세상은 달랐습니다. 남자의 노동력이 현금처럼 통용되던 사회였습니다. 그래서 고아와 과부가 당시에는 가장 취약 계층이고, 하나님의 편애의 대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십계명을 주시고 나서 바로 이와 같은 엄명을 내립니다.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으리라. 나의 노가 맹렬하므로, 내가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의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22:22~24)

 

다비다, 그녀는 마지못해 소일 삼아 바느질을 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만 곱게 차려입고 다니기 위해 바느질 한 것도 아닙니다. 유행을 선도하는 작품 만들어 돈 많이 벌기 위해 바느질 한 것도 아닙니다. 분명한 삶의 목표를 가지고 살아간 여인 - 하나님을 사랑했기에 그 일에 자신을 쏟아 부은 여인이 다비다였습니다.

 

만약 미혼여성이라면 느꼈을 만한 열등감이 왜 없었겠습니까? 시집 안가냐?” “목사님, 그 때마다 전 상처 입었습니다.” 하지만 다비다는 좌절감을 극복하고, 결혼해서 아이 키우는 친구들과 비교하지 않고** 자신을 향한 주님의 뜻을 알았던 여인입니다.

 

결혼하지 않은 것으로 고민에 빠져 우울증 속에 갇혀있지 않았습니다. 다비다는 결혼하지 않은 자신의 삶에 대해서 전혀 열등감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패배감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자기에게 주어진 환경 속에서,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알았습니다. 그것은 당시 욥바에서 가장 어려운 계층, 고아와 과부를 섬기는 일이였습니다.

 

결혼의 즐거움이 몇 년 가기도 전에, 홀로되어 외롭고 힘겨운 삶을 살고 있는 자기 또래의 여인들을, 찾아가서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자기가 낳은 자녀는 없지만, 그들의 자녀를 자신의 자녀 돌보듯이 돌보았습니다. 또한 자기 바느질조차 할 수 없는 나이 많은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옷을 해 입혔습니다.

 

그녀는 이미 이런 폴 튜니어 박사의 말을 깨닫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젊은 여인이 참으로 결혼하지 않은 상태를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그 미혼상태에서 특별한 여성적 특성을 마음껏 활용할 수 있는 것을 뜻한다 시대를 앞서 살았던 여인 다비다는 자기의 특성을 맘껏 발휘해서 주님을 잘 섬기고 있었습니다.

 

손으로 일해 자기의 필요를 채울 뿐 아니라 남을 섬기던 여인입니다. 바느질해서 마련한 것으로 자기를 위해서는 조금만 쓰고, 남을 위해 그 대부분을 사용하던 여인입니다. 열심히 일해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많은 것을 베풀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녀는 행복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행복은 자기를 위해서 많은 것을 움켜쥘 때 얻어지지 않습니다. 또한 혼자 있었지만 그녀는 행복했습니다. 돌보아야 할 많은 사람들 속에서 살고 있었기에 그녀는 외롭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나누는 행복을 알고 계십니까? 세상에 오신 우리 주님은, 당신의 삶을 나누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자신의 영광을 나누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당신의 기쁨을 나누기 위해서 비참한 세상에 오셨습니다. 목적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를 나누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면 나누는 기쁨을 알아야 합니다. 나눔의 삶은 공동체 속의 삶입니다. 일도 같이 해야 힘들지 않고 밥도 같이 먹어야 맛이 있습니다. 공동체를 상실한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어쩌면 이 지역은 더욱 서로 도와 사는 대신 서로 이용하고 착취하려고 들 수도 있습니다. 교회는 이 각박한 세상에 공동체성을 회복해가야 합니다. 오늘 여기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이들에게, 내일 거기에 그 나라를 주실 것입니다.

 

욥바에 있던 많은 과부들은 다비다가 지어준 옷만 입고 살아간 것이 아니라 그녀가 베푼 사랑 속에서 살았습니다. 사랑을 베풀고 영적으로 돌볼 수 있었던 그녀는, 많은 이들의 삶의 의미였습니다. 남편을 잃고 하늘이 캄캄해지던 그 때에 새로운 희망을 그들에게 보게 해 주었습니다.

 

자신이 행복한 사람만이 남을 행복하게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을 피곤하게 하는 사람들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불쌍하게 여겨야 합니다. 자신 안에 기쁨이 없으므로 남의 기쁨을 빼앗습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십시오.

 

여러분이 은혜 입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세상이 모르는 평강과 기쁨을 맛보았다면,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서 솟아나는 사랑이 있을 때만 이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한 여인 다비다는 자신 속에서 솟아나는 기쁨으로 남을 기쁘게 하던 여인입니다.

 

그러기에 세상에 오셔서 우리에게 기쁨을 주신 그 분의 제자라고 불리기에 합당합니다.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정말 용어를 선별해서 정확하게 사용했습니다. 빌립보에도 대단한 여인들이 있었고, 고린도에도 이름 있는 여인들이 많았지만, 신약에서 여 제자라는 칭호를 준 것은 다비다가 유일한 경우입니다.

 

주어진 환경 속에서 자신의 은사를 십분 발휘하던 다비다는 욥바의 신앙공동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것은 당연합니다. 그것은 집사, 권사라는 직분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헌신적 사역 때문입니다.

 

비록 혼자였지만 많은 사람을 위해 살았기에 많은 이들의 마음속에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여제자 다비다의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큰 손실이었지만 특히 그의 도움으로 지탱해가던 과부들에게는 회복할 수 없는 타격입니다.

 

그녀의 시체를 씻어 다락에 둔 것은 이 여인을 향한 안타까운 성도들의 심정을 보여줍니다. 누가 먼저인지 가릴 것 없이 성도들의 생각은 50리 채 못 되는 곳, 룻다에 있는 베드로를 생각했습니다. 지체 말고 오라 - “빨리 오십시오.”라는 말을 공손히 표현했을 뿐입니다.

 

매장문화는 시대마다 지역마다 다릅니다. 죽은 사람은 이내 매장한 것이 당시 풍습입니다. 거기는 아침에 죽으면 오후에, 오후에 죽으면 뒷날 아침에 매장하던 시대입니다. 그러나 과부들은 죽은 다비다를 이내 매장하지 않고 베드로가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베드로가 도착하자마자 그녀를 포기할 수 없어하는 사랑의 마음들이 그녀의 시체를 씻어 누여둔 다락으로 데리고 올라가 울며 이야기합니다. 모든 과부가 베드로의 곁에 서서 울며 죽음은 슬픈 것이지만 과부들에게 있어서 다비다의 죽음은 깊은 슬픔을 안겨 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슬퍼하는 자 없이 죽는 것만큼 인생을 헛되게 산 사람은 없습니다. 여러분은 누구이며 언제 울산에 와서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2, 3년이 아니라 3, 4십년 자리를 잡고, 자녀를 키우고 오늘까지 살아온 것은 (비록 아무도 주지 않지만) 메달을 받을 만한 귀한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모두들 힘들게 여기까지 살아오셨지만 앞으로 얼마나 이 땅에 남아있을까요? 대개는 30년 후면, 길어야 50년 후까지 살아남아 있을 사람은 많이 없어 보입니다.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정말 마음 아파하며 슬퍼할 사람이 누가 있을 것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살아남겠다고 발버둥친 결과로, 한 때 좋은 관계들이 깨어져 버리지는 않았습니까? 그들은 내 죽음의 소식을 접하고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다시 말합니다. 슬퍼하는 자 없이 죽는 것만큼 인생을 헛되게 산 사람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어진 생을 하나님의 뜻대로 이웃을 섬겠다면 반드시 여러분의 죽음을 슬퍼할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슬퍼하는 자 없이 죽는 것만큼 인생을 헛되게 산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죽음은 저주받은 죽음입니다. 사랑의 관계를 맺고 살도록 주신 시간을 헛되이 보내면 주인께서 그날 저주하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헌신적인 다비다의 삶의 의미는 그의 시체를 둘러싼 과부들에게는 너무나 분명합니다.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만든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이거늘 우리 번역에는 장롱 안에 넣어둔 옷을 베드로에게 꺼내 보이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지만, 헬라어에는 전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다비다, 도르가는 좋은 옷을 철철이 마련해 두고 입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유행 지나면 불우이웃 돕기 위해 바자회에 내어놓던 여인이 아닙니다. 넣어 두었던 옷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녀들이 지금 입고 있는 그 옷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다투어 가며 다비다가 자기들을 위해 지어준 옷을 베드로에게 보이고 있습니다. 그들에 대한 다비다의 사랑은, 다비다를 향한 포기할 수 없는 사랑의 고백을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우린 살려보려고 온갖 애를 쓰다가도 숨 넘어가면 모두 포기합니다. 죽은 자를 두고도 포기하지 않는 것은 사랑 때문입니다.

 

그들의 사랑의 고백과 묵시적 요청은 베드로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사람을 다 내어 보내고”(40) 무릎을 꿇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도 합심기도의 위력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생을 살아가다 보면 아무도 함께 할 수 없는 기도의 순간이 찾아올 때도 있습니다.

 

어쩌면 여러분과 저의 삶 중에도 그런 때가 찾아올지도 모릅니다. 아무도 함께 할 수 없는, 혼자서 기도해야만 하는 때가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지금 베드로도 그런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베드로는 오열하는 여인들 틈에서는 하나님께 자신을 쏟아 부을 수 없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얼마나 기도했을까요? 성경은 침묵합니다. 기도에 시간의 길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기도는 자로 재는 것이 아니라 무게를 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간절한 기도로 말미암아 생긴 확신 가운데 돌이켜 시체를 향해 다비다야, 일어나라고 명합니다.

 

예수께서 회당장의 딸을 살리실 때, 달리다 굼하자 소녀가 일어난 것처럼 다비다 굼, 다비다야, 일어나라고 말하자 죽었던 송장이 눈을 떴습니다. 베드로는 눈을 뜨고 살아난 그녀의 손을 잡아 일으키고 성도들을 불러 들였습니다.

 

그 일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42절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이 주를 믿더라.” 죽기 전의 다비다의 삶은 욥바 신앙공동체의 희망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죽음에서 살아난 다비다는 욥바 모든 사람들에게 영혼을 일깨우는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말씀 맺습니다. 사랑하는 울산 교회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삶을 살고 있습니까? 기독교를 향해 돌팔매를 던지는 세상 속에, 예수님의 이름이 증오의 대상이 되는 이 시대에 여러분은 어떤 삶을 살고 있습니까? 자식 키워서 공부시키고 출가시킨 것 말고 여러분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물론 그 일도 중요하고, 결코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것은 신, 불신을 막론하고 부모라면 다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습니까? 자식 키워서 공부시키고 출가시켜야 하는 벅찬 사명이 아직도 여러분을 짓누르고 있습니까? 하지만 여러분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그래도 여러분에겐 사랑하는 배우자가 있습니다. 기대를 걸만한 자녀들도 있습니다. 뜻을 같이하는 신앙공동체도 있습니다.

 

성경은 옛날이야기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다비다는 혼자 살던 여인입니다. 가진 것이라고는 손에 바늘 하나였지만 선행과 구제가 심히 많은 여인이었습니다. 여러분은 누구이고 무엇을 가지고 있습니까? 여러분과 달리, 다비다는 바늘 하나를 가지고 혼자 살면서도, 구제와 선행이 심히 많았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은사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의 교회에 주신 자원은 무엇입니까? 남 보기에 대단치 않은 것처럼 여겨집니까? 두려워 마십시오. 모세의 손에 들린 지팡이가 전능자 하나님의 힘으로 당시 초강대국 애굽의 군대를 격파했습니다.

 

여러분이 가진 은사가 눈에 띄지 않는 것이라도 전적으로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그것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것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실 수 있습니다. 평범한 여인 다비다의 삶이 사역의 기쁨을 맛보길 원하는 성도 여러분 각자에게 주는 도전이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