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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근두목사 설교

    영상주소
    http://vod.upcweb.net/pastor/2018_1007_정근두.mp4
    성경본문
    행 9:26-31
    설교일
    2018-10-07

착한 사람 바나바2

9:26-31

구주대망 2018107일 주일 예배 32, 151, 216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주일 우리는 착한 사람 바나바가 가진 은사 몇 가지를 살펴보았습니다. 바나바는 연보 구제의 은사가 탁월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재산을 처분해서, 갑자기 늘어난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을 섬겼을 뿐 아니라, 그 후에도 배고픈 자를 먹이는 일에 깊이 관여한 기록을 살폈습니다.

 

연보 구제의 은사를 잘 활용하는 사람은 다른 성도들이, 특히 가진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돕지 않는다고 불평하지 않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눈에 들어오면, 먼저 자신이 해야 할 일로 여기고 도움의 손을 내밉니다.

 

가난하고 배고픈 자들을 교회가 잘 보살피지 않는다고 불평하지 않고, 그 부족한 부분을 공동체를 대신해서 자신의 것으로 먼저 섬기면서, 온 교회가 함께 참여하기를 소원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번 성탄절에 하나님이 살피기 원하는 계층이나 사역이 무엇인지를 기도하며 자신과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길 원합니다.

 

오늘 우리는 착한 사람 바나바에게 주신 또 다른 영적 은사가 무엇인지 어떻게 그것을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했는지 살펴봅시다. 오늘 본문을 다시 읽어봅시다. 배경과 함께 중요한 구절은 26, 27절입니다. 바나바가 무슨 역할을 했는지 그 충분한 의미를 알기 위해 우리는 당시의 사울의 형편을 좀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9:26-27)

 

사도행전에 청년 사울이 등장하는 것은 스데반이 순교할 때입니다. 스데반을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 때,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는 청년의 발 앞에 두었다는 기록입니다. 그는 스데반의 순교 현장에서 스데반이 드린 기도를 듣지만 전혀 감동하지 않았던 청년입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스데반의 기도 소리를 들었습니다.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무릎을 꿇고 크게 부르짖던 스데반의 기도를 듣고도 오히려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8:1)고 누가는 기록합니다.

 

큰 핍박을 받아 성도들이 흩어지고,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크게 울던 상황 속에서, 사울은 교회를 박해하고, 각 집에 들어가 남녀 가리지 않고, 끌어다가 옥에 넘겨주기 바빴습니다.

 

사울의 이런 활동은 9장에도 계속 될 뿐 아니라 오히려 더욱 기세를 부리고 있습니다.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행전 9:1-2).

 

마침내 9장에서 기세등등하여 다메섹으로 향하는 사울을 주께서 꺾어놓습니다. 밝은 빛 속에 나타나신 주님이 그를 바꾸어 놓습니다. 밝은 빛 속에 나타나신 주님은 그의 삶의 방향을 결정적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사흘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고민하는 사울을 주의 명령을 받은 아나니아가 찾아가 말하며 그의 눈을 다시 뜨게 합니다.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9:17)

 

그 후 다시 보게 되고 음식을 먹고 힘을 차리자, 이전에 핍박하던 예수를 동일한 열심으로 증거 합니다. 회심은 기질을 바꾸어 놓은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핍박하던 동일한 열심을 가지고 이제는 핍박하던 예수님의 복음을 동일한 열심을 가지고 전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중생은 기질을 변화시키지 않습니다. 중생은 다만 그 기질을 성령님의 통제아래 둡니다.

 

열심 있는 핍박자 사울은 열심 있는 전도자가 되어서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 했습니다. 듣는 사람이 다 놀란 사건이요 충격적인 변화입니다.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가고자 함이 아니냐?”(9:21)

 

이 수군거림을 들은 사울은 더욱 힘을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거 합니다.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킵니다. 이런 일을 보고만 있을 유대인이 아닙니다. 그를 죽이려는 공모가 일어납니다. 피에 굶주린 그들의 손에서 주님은 사울을 빼내어 구출시킵니다.

 

그 후 사울은 유대 식으로 말해 3년 만에 - 실제로는 일 년 남짓한 기간 아라비아에서부터 돌아와 예루살렘에 다시 등장합니다.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베드로)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1:18)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상황을 생각해보십시오. 옛 친구들이 그의 변절을 알고 돌아섰을 뿐 아니라 오히려 죽이려고 합니다. 새 친구들은 아무도 선뜻 교제의 악수를 나누려고 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울인데 쉽게 다가서려고 했겠습니까?

 

예루살렘의 제자들은 핍박자 사울이 회심했다는 소문을 반짝 들었지만, 일 년여 시간이 지난 후 갑자기 나타난 그를 경계하는 것도 이해가 됩니다. 직접 만난 적도, 사귄 적도 없는 예루살렘의 제자들은, 그동안 무엇을 하다 지금 나타났으며 또한 무슨 꿍꿍이속을 가지고 출현했는지 의심스런 눈초리로 보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 예루살렘 제자들만 탓할 수 없습니다. 워낙 사울 그는, 과거가 대단했기 때문입니다. 온 교회를 박멸하려고 달려들던 박해의 선봉장이 아니었습니까? 물론 직접 만나려고 하지도 않았지만, 예루살렘 제자들 사이에는 여러 가지 말들이 무성했습니다.

 

얼마나 추측이 무성하며, 근거 없는 소문이 난무했겠습니까? 선뜻 아무도 나서서 상황을 알아보려고 하지 않을수록 누구나 쉽게 이렇게 저렇게 근거 없는 추측을 하고 추측이 한 손 건너가면 사실로 둔갑합니다.

 

다메섹에서의 회심은 계산된 행동이 아닐까?’ 누군가 이런 추측을 하고나면 다음 순간 바로 개정판이 나옵니다. ‘다메섹 회심은 계산된 쇼(show)개정 증보판은 산헤드린의 각본 이래’ ‘제자들 속에 침투하기 위한 위조 회심이라구’ ‘우리 소재를 샅샅이 파악해서 몽땅 고발하려고 한다지?’

 

이전 친구들에게는 달갑잖은 변절자이고 새 친구들은 의심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울이 예루살렘에 상경한 목적은 사도들을 만나고 제자들과 사귀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이 두려워하고 선뜻 받아주지 않는 처지입니다.

 

회심 후 열심히 다메섹에서부터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제는 예루살렘 모 교회 지도자들이 자기를 받아주면 본격적으로 사역을 하고 싶은 맘으로 상경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무도 선뜻 맞아주지 않습니다.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9:26) 이 구절의 동사의 시제가 현재형인 것을 보아 사울은 그들이 받아주기를 여러 번 시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과가 시원찮았습니다. 찾아가면, 마지못한 듯 차 대접해서 만나주지만, 아무도 마음을 열고 교제의 손을 내밀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상황은 난감했습니다. 다행히 체재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바울의 생질(23:16)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예루살렘에서 누님 집에 머물러 지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다 두려워하며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 .” 핍박자 사울, 이름만 들어도 아직 두려운 그들로서는 사울을 기피하기 위한 가장 쉬운 길은 그의 제자 됨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딱한 상황 속에 오늘 우리가 살피는 착한 사람 바나바가 등장합니다.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1)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2)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3)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주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 하니라.” (9:27)

 

이 누가의 기록을 읽어보면 착한 사람 바나바가 사울을 위해 얼마나 열심히 사도들에게 가서 말하고 있는지 생생합니다. 1)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하나님의 주도적이고 초자연적인 개입으로 주님을 만난 사실을 말합니다. 2)주께서 그에게 아나니아를 통해 말씀하신 사실을 증거 합니다. 주께서 당신의 사역을 위해서 선택한 그릇임을 역설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3)그동안 활동 보고를 그 증거로 들이댑니다. 다메섹에서 얼마나 담대히 주의 이름으로 증거 했는지를 설명합니다. 생명의 위협을 받아 한밤중에 광주리를 타고 도망치기까지 복음 증거를 열심히 했다고 강조했을 것입니다.

 

누가는 그가 조목조목 사울을 위해 말한 것을 기록한 반면 두 사람이 어떤 사이였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까지 사람들은 궁금증을 가집니다. 어떻게 바나바가 나서서 이런 중재역을 맡았을까? 과연 바나바와 사울은 무슨 관계일까 하고 궁금해 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바나바와 사울이 대학 동기였다고 추측합니다. 바나바가 살던 구브로에서 사울의 고향 다소가 멀지 않으니까 거기서 만났을까요? 사울의 고향 다소는 헬라 3대 문명도시이고 알려진 교육도시니까 그럴 만합니다. 아니면 예루살렘 가말리엘 문하 동창생일까요? 또 다른 하나의 소설을 쓸 수 있을지 모릅니다.

 

다른 분은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의 선지자 명단 제 1번에 있는 것을 근거로 들면서 바나바의 예언적 은사 활용을 통해 바울의 회심의 진가를 다른 제자들보다 먼저 파악했다고 생각합니다.

 

예언적 은사를 통해서 사울의 진가를 파악하고 초대교회 지도자들을 만날 길을 열어주었다고 봅니다. 바나바는 그런 경우 사울의 삶에 일어난 성령의 역사를 믿고, 예루살렘 제자들이 여전히 받아들여주지 않는 것을 알고 개입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상당히 그럴 듯합니다.

 

또 다른 가능성은 바나바의 사람됨 - 그의 다른 은사와 관련을 볼 수 있습니다. 바나바 그는 격려의 아들입니다. 바나바란 별명에 어울리게 고통당하는 사람, 어려움을 겪는 사람, 용기를 잃은 사람을 재빨리 알아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멀리서 수군거리는 대신,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가서 만나보고 그의 상황을 이해했을 것입니다.

 

사울의 처지가 이해가 되니 그를 위해 무언가 할 수 밖에 없지 않습니까? 이런 은사를 가진 사람은 주일 예배에 참석해도 다릅니다. 그냥 혼자 예배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힘든 사람이 누구인지 파악됩니다. 예배가 끝나면 조용히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도울 방안을 강구합니다.

 

바나바는 성령강림 후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 상당한 인정을 받는 사람입니다. 그의 자비와 연보구제 은사가 공동체를 위해 적절히 활용되었습니다. 그런 저런 연유로 그는 사도들과 익히 아는 사이이며 신뢰받는 처지입니다. 후에 안디옥 교회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예루살렘 교회에서 파송한 자인 것을 보면 압니다.

 

모두가 의심스런 눈초리로 바라보고, 가끔 의심스런 추측이 사실인양 떠도는 분위기 속에서 앞장서서 사울을 옹호한다는 것은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다른 제자들이 추측하는 그대로의 사람이라면, 그를 보증해준다는 것은 그의 명예에 커다란 손상을 가져올지 모릅니다.

 

지금껏 쌓아온 자신의 신뢰성을 거는 모험입니다만 격려의 아들 바나바앞날의 자신의 처지보다 지금 처한 사울의 입장을 더 중요시했습니다. 그 결과 사울은 제자들과 함께 있어 성도의 교제권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9:28)

 

사울은 격려의 아들 바나바 때문에 제자로서 영접을 받았을 뿐 아니라 시간과 함께 새로운 사도로서 대우를 받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바나바의 격려 위안의 은사는 교회 역사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 때 사울의 처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의심의 눈초리 속에 사울의 열심의 싹이 꺾이고 짓밟힐 뻔 했습니다.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평신도들까지 그의 행동을 의혹의 눈으로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 같으면 어땠을까 생각해보십시오.

 

교회의 지도자들에 의해 거절당한 상처로 신앙을 포기하고 싶은 유혹까지 느낄 것입니다. 이 때 바나바가 관여했습니다. 조목조목 근거를 들어(9:27) 설득했습니다. 자신의 명예를 걸고 사울의 신실 성을 보증했습니다. 바울에게 기회를 주도록 설득했습니다.

 

그 결과 예루살렘에 출입하고, 증거사역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28~29).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살핀 격려의 아들 바나바,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격려하는 사람 바나바가 우리 모두에게 제시하는 신앙의 본은 무엇입니까?

 

직분자로서 교회가 기대하는 여러분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답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속한 구역과 교구, 공동체의 성도들이 생각하는 직분에 따른 여러분의 역할이 무엇이라고 생각할까요?

 

보통 성도들의 눈에 비취는 직분자의 모습이 어떠해야 할까요? 한 교회의 지도자로서 우리를 바라보며 기대하는 모습이 어떠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바나바는 그 이름이 보여주는 대로 격려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의 본래 이름은 요셉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그를 요셉보다는 바나바로 기억했습니다.

 

그의 대표적인 사역이 바로 모든 사람이 의심적인 눈초리로 바라보는 사울을 사도들에게 추천하는 본문 이야기입니다. 저는 오늘 예배에 참석한 모든 분이 당신의 본래 이름보다는 은사에 따른 별명이 통했으면 합니다. 마치 요셉보다는 격려하는 사람 바나바로 알려진 것 같이 여러분을 향한 바람이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주님의 은혜 안에 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은혜 안에 뿌리를 내려야 사람들의 상처와 아픔을 재빨리 파악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의 은혜 안에 거하기에 실패하면 우리는 너무 쉽게 권위적이 됩니다.

 

바나바라는 이름을 옛 개역 성경 사도행전 436절은 권위자라고 합니다. 한글로만 번역하면 오해하기가 십상입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權威者가 아니라 勸慰者입니다. 권위를 내세우는 사람, 위세를 부리는 사람이 아니라 위로와 용기를 주는 사람, 격려하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사랑하는 중직자 여러분, 교회는 여러분을 권위를 가진 사람들이라고 알고 있습니까? 아니면 권면하고 위로하고 용기를 주는 격려의 사람으로 알고 있습니까? 그것이 오늘 예배를 드리는 직분자 여러분 모두를 향한 본문의 도전입니다.

 

사랑하는 직분자 여러분, 특히 여러분 가운데 장로의 직분을 맡은 자라면 처음 장로로 임직 받을 때의 마음이 어떠했으리라고 어느 정도 상상이 됩니다. 정말 날 같은 사람에게 귀한 직분을 맡기시니 한 평생 주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성도들을 섬기리라고 기도하며 결심하셨을 것입니다.

 

장로로 시무하신 지 올해가 몇 년차이십니까? 지금 여러분의 마음자세는 어떠하십니까? 아니 여러분을 바라보는 성도들의 시선을 어떠할까요? 부디 권위 내세우는 사람으로 비쳐지지 말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을 생각하면 위로와 용기를 얻을 수 있는 격려하는 사람으로 자리 잡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출발선상에서는 한 평생 주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연약한 성도들을 섬기리라고 기도하며 결심했는데 그 결심에서 멀어진 언행을 하게 되었다면 그 원인은 무엇일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장로님 여러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가 넘쳐야 섬기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라도 섬기는 능력을 자가발전(自家發電)할 수는 없습니다.

 

임직 받은 햇수가 더해 갈수록 더욱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고 섬기는 은혜입기 위해서는 주님을 알아가야 합니다. 주님을 알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처럼 말씀 듣는 예배의 자리를 사모해야 합니다. 말씀 들을 때마다 자신의 모습을 바로 보는 은혜를 받아야 사람은 변합니다.

 

그러나 전에 한번 받은 은혜로는 오늘을 살 수 없습니다. 가끔 한 번씩 듣는 말씀으로만은 부족합니다. 모든 성도들과 마찬가지로 직분자들도 성경을 매일 읽어야 합니다. 바쁠수록 중요한 일을 선별해서 집중해야 합니다. 어떤 일이 지도자로서 우리가 집중해야 할 일입니까?

 

제발 위임가능한 일은 모두 위임하십시오, 저는 요즘에 꼭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만 내가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남에게 맡길 수 없는 일은 무엇입니까? 숨쉬기, 밥 먹기, 잠자기 등등입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성경통독이나 묵상은 위임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매일 새벽에 부르짖는 일, 주말 새벽에 함께 부르짖는 일을 위임이 불가능합니다.

 

우리 모두 부르짖는 성도가 되어야 열매 맺는 사역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부르짖는 입술이 찬양과 감사하는 입술이 됩니다. 부르짖는 입을 크게 열 때에 하나님께서 넘치도록 채워주십니다.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81:10)

 

주 안에서 영적으로 강건해져야 남에게 용기를 주고, 다른 사람을 격려하는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자기 앞가림하기도 하기 어려운 처지에서는 남 돌아보는 일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신기루를 기대하지 말고 자신의 앞길을 묵묵하게 걸어가십시오. 말씀과 기도는 성숙한 성도의 삶에 두 가지 기초 돌입니다.

 

교회당에 먼저 다니기 시작한 성도 여러분,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직분을 맡은 직분자 여러분, 여러분들은 우리 울산교회의 자랑입니다. 여러분들을 볼 때에 성도들이 용기를 얻고 격려를 받는 분들 되길 바랍니다. 많은 구역장들처럼 구역원의 모범이 되십시오. 착한 사람 바나바처럼 격려하는 일에 전문가가 되기를 바랍니다. 바나바, 격려의 아들이란 히브리식의 표현은 그 일에 전문가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오늘 주일 예배에 참여하신 여러분들이 각기 속한 구역에서 격려하는 일에 능한 사람이 되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될까요? 31절을 보십시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9:31)

 

그러는 동안,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에 있는 교회들이 평화를 되찾았으며, 터전을 든든하게 잡았습니다. 교회는 주님을 두려워하며 성령의 위로를 받아 믿는 사람들의 수가 점점 늘어났습니다.”(쉬운성경)

 

이제 놀라운 사역을 위한 바나바의 결정적 준비가 끝났음을 강조합니다. 사울이 바나바의 보증으로 사도들 사이에 출입하게 됨으로 이제 공식적으로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자리매김을 한 셈입니다. 주를 두려워하고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더라이런 축복이 우리 교회 산하 모든 구역에 있기를 소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