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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근두목사 설교

    영상주소
    http://vod.upcweb.net/pastor/2018_1014_정근두.mp4
    성경본문
    행전 11:19~26
    설교일
    2018-10-14

착한사람 바나바3

행전 11:19~26

구주대망 20181014일 주일 예배 64, 138, 205

 

우린 요즈음 착한 사람 바나바, 그의 은사를 살피고 있습니다. 첫 시간에는 그의 연보 구제 은사를 중심해서 살폈고, 두 번째 시간에는 그의 격려 위안의 은사를 중심해서 살폈습니다. 오늘 우리는 또 어떤 은사를 발견할 수 있을지 기대감을 가지고 말씀에 접근해 봅시다.

 

사도행전에서 착한 사람 바나바가 세 번째 등장하는 오늘 본문의 상황을 먼저 살펴봅시다.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19~21)

 

스데반의 일을 기점으로 하여 상황을 서술합니다. 마치 스데반의 순교는 새로운 상황 전개를 시작하는 기폭제와 같이 사용된 것을 보입니다. 은혜와 권능이 충만한 당신의 종의 순교를 하나님은 귀히 사용하셔서 이방 선교를 위한 새로운 전환점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맺은 첫 열매는 교회를 잔해하는 일에 최첨단을 달리던 선두주자 사울의 회심입니다. 빌립이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하게 된 것도 스데반의 순교를 기점으로 일어난 큰 핍박과 관계를 맺습니다. 핍박으로 인해 흩어진 사람 가운데 빌립은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본문에는 사마리아 상황과 비슷하게 안디옥까지 선교가 미친 상황을 설정합니다.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 . . ”

 

달리 말해, 핍박의 결과로 사울의 변화를 가져왔고 사울이 고향 다소로 돌아간 데까지 한 단락의 이야기가 끝났습니다. 중간에 베드로의 여러 가지 활약이 소개되었습니다. 가이사랴의 백부장의 초청을 받아 복음을 전해서 이방인들이 교회로 받아드려집니다. 그 후 다시 핍박이 일어나기 직전 안디옥 상황을 기술합니다.

 

스데반이 순교할 당시 예루살렘에는 10만 시민 가운데서 1/4 25,000명의 성도들이 있었다고 추산합니다. 그러므로 핍박으로 흩어진 그 사람들이 일으킨 파장은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여름 더위의 절정에 바다로 향해 가는 사람이 길을 메우듯이, 당시는 핍박을 피해서 예루살렘을 벗어나는 성도들로 길을 메웠다고 생각해보면 되겠습니다.

 

베드로가 룻다, 욥바, 가이사랴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복음을 전하는 즈음, 헬라 말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베니게, 구브로, 안디옥까지 이르렀습니다.

 

지중해 해변에 위치한 성읍들뿐 아니라 구브로 같은 섬으로 흩어질 때도 복음을 이야기 했습니다.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든 그 마음속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합니다. 입만 열면 여러분이 말하는 주제는 무엇입니까? 마음속에 예수님이 가득한 성도들은 기회만 되면 예수님 이야기를 나눕니다.

 

흩어진 성도들이 각 성과 촌으로 다니면서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사도행전 상황으로 보면 아무런 특기할 사실을 아닙니다. 그들은 어디든 가면 복음을 전파했으니까요. 다만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그런 의미에서 19절은 20절을 위한 서곡에 지나지 않습니다.

 

보십시오, 20절에는 기록할만한 사건이 전개됩니다. 가히 당시 상황 속에서 혁명적인 일이라고 볼만한 상황이 전개됩니다.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당시에는 헬라인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혁명적인 발상이라고 보입니다.

 

그 때는 헬라인에게 복음이 전파되기 위해 하나님이 직접 개입해야만 하던 상황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이방인 백부장에게 복음을 전한 상황을 생각해보십시오. 세 차례나 환상을 통해서 의심하는 베드로는 깨우친 후에야 이방인 방문객을 맞이하던 것을 기억하십시오.

 

세 차례나 환상을 미리 보여주시고, 성령께서 직접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내려가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노라할 때 비로소 베드로는 그들을 따라 가이사랴로 내려간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이방인이 복음을 듣고 성령을 받아 방언하며 하나님을 높이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이 소식을 접한 유대에 있는 신자들 가운데 베드로에게 시비를 붙습니다. 한동안 논란 끝에, 베드로가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한 설명을 듣고 겨우 잠잠해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물론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는 생명을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라고 수긍하는 말은 했지만 아무도 적극적으로 이방선교에 뛰어들지 않는 상황에서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안디옥에 이르러 과감히 적극적인 행동을 취했습니다.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아르도록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다가 안디옥에 이르러 구브로와 구레네 사람 몇이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한 것입니다. 유대인에게만 전해지던 복음이 그 경계를 넘어서 헬라인에게도 전파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요즈음도 비슷하지 않습니까? 복음을 전하는 것을 가장 큰 사명으로 성도들은 알고 있습니다. 말로는 만민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선뜻 뛰어들기 망설이듯이, 말로는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로 생명을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라고 인정했지만, 아무도 선뜻 나서는 상황이 아니었는데, 구브로와 구레네 사람 몇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소수가 뛰어든 일이지만 그 일은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 일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1) 사도행전의 주제가 그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러러 내 증인이 되리라”(1:8)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2) 뿐만 아니라 소수가 뛰어든 그 일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 일임을 그 결과를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21)

 

주님의 뜻에 부합한 일이기에 주님의 능력의 손이 함께 했습니다. 주님의 능력의 손이 함께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왔습니다. 주의 손은 능력의 손입니다. 이 능력의 손만이 사람 마음의 문을 열 수 있습니다.

 

헬라인 가운데 복음증거를 효율적으로 하신 것은 주의 손의 역사입니다. 그들 가운데 열매가 맺힌 것은 하나님의 능력의 손이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선교사역의 기본적인 핵심이 주의 손이라고 어떤 이는 강론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전도의 핵심도 주의 손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 손이 역사하면 닫힌 문이 열립니다. 한 지역의 닫힌 문을 여시는 것이 주의 손이요 한 사람의 닫힌 마음 문을 여시는 것도 주의 손입니다. 하나님의 손은 문을 열기도, 닫기도 하시는 전능하신 분의 손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주의 손이 여러분의 삶에 함께 하십니까? 그러면 열매가 맺힙니다. 주의 손이 함께 하길 부르짖는 일에 동참합시다. 부르짖을 때 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올 것입니다. 본문은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니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로 돌아오더라.”고 기술합니다.

 

돌아오더라.”는 말은 미완료 시제입니다 돌아오고 있는 일이 끝나지 않고 계속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런 놀라운 상황이 전개되는 소식을 접한 예루살렘교회가 세운 대책이 22절에 나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모든 교회의 어머니 교회요 요즈음 같으면 선교 본부 일을 겸하고 있던 차입니다. 많은 이방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는 상황은 예루살렘교회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습니다.

 

사마리아에서도 빌립의 사역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왔습니다.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낫고 귀신이 큰 소리를 지르고 쫓겨납니다. 베드로의 사역을 통해서 가이사랴의 이방인 가운데서 동일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제 수리아 안디옥에도 이방인이 속속 주께로 돌아왔다는 소식에 접했습니다. 하긴 우리에게는 베니게, 구브로, 안디옥 해봐도 별 의미 없는 장소이름 입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에게는 달랐습니다.

 

안디옥은 당시 수리아지역 수도이고 무역중심지요 시민들의 교육열이 강남 8학군 떠올리게 하는 교육도시입니다. 안디옥은 당대 유명한 메트로폴리스- 큰 국제도시입니다. 로마제국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로 꼽혔습니다. 로마, 알렉산드리아 다음에 큰 도시입니다.

 

이 큰 도시에 수많은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고 있다는 소식은 한편 고무적이고, 한편 걱정스럽게 예루살렘 교회는 여겼던 것 같습니다. 복음 전파가 너무 걷잡을 수 없이 빠른 속도로 나가는 게 아닐까 염려했던 것 같습니다.

 

사마리아에 복음전파가 되었을 때도 현장 확인을 위해서 사도들을 파송했던 것처럼 안디옥의 상황파악을 위해서 대표자를 파송키로 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사마리아의 경우 사도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파송했습니다. 안디옥의 경우 예루살렘교회가 바나바를 보냈다고 합니다.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사마리아 복음전파의 소식을 들었을 때는 사도들이 예루살렘에 아직 남아 있었습니다만 지금 모두 흩어져 복음을 전하지만 바쁜 상황입니다.

 

베드로가 룻다, 욥바, 가이사랴 등지에 다니면서 바쁘듯이 다른 사도들도 같은 형편이었습니다. 사도들은 부재중이고 상황은 급박하고 해서 교회가 독자적인 행동을 취합니다. 사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대신, 독자적인 행동을 한 것입니다.

 

적절한 인물로 그들은 바나바를 선정했습니다. 어쩌면 거기서 일을 저지른 사람들이 구브로인 이기에 구브로인 바나바를 선정했는지는 몰라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적합한 결정을 한 셈입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누가 대표로 파송되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예민한 문제입니다. 대표로 바나바가 선택된 것은 보면 그가 예루살렘 교회 안에서 좋은 평판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레위인으로서 그는 유대인의 편견을 이해하면서, 헬라 파 사람으로서 헬라 말을 할 뿐 아니라 헬라인의 생활과 감정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제 한국교회도 해외에서 자란 1.5, 2세의 역할에 기대를 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예루살렘 성도들은 바나바가 새로운 운동을 적절히 평가하고 과연 하나님께서 그것인지 바로 판단할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파송 받은 바나바는 현지 안디옥에 도착합니다. 예루살렘과 비교할 수 없는 큰 도시입니다. 그가 거기서 일어난 일을 보았을 때의 반응과 그 후의 결과를 23~24은 기술합니다.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여기 우리가 살펴볼 바나바의 핵심적인 모습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어떤 분은 이렇게 질문합니다. ‘은혜가 동그랗습니까? 은혜가 네모가 납니까? 은혜가 하얗습니까? 파랗습니까? 어떻게 바나바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을까요?’

 

바나바는 성령과 믿음에 충만한 자답게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 의 삶속에 나타난 열매를 보고 그 원인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알아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면 사람들 사이에 기쁨과 웃음이 있습니다. 감사와 찬송이 있습니다. 기도와 간구가 풍성합니다.

 

이런 열매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바나바는 위로의 전문가답게 모든 성도를 권하고 있습니다. 굳건한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잘 시작된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이 그들 가운데서 계속되기를 권하고, 그 은혜의 사역이 그들 가운데서 널리 퍼지기를 소원합니다.

 

바나바, 그는 마음이 상한 자와 함께 마음 아파하며, 기뻐하는 자와 함께 기뻐할 수 있는 마음의 소유자였습니다. 낙심해 있는 사울을 품었을 뿐 아니라 은혜 중에 있는 안디옥 성도들이, 그 은혜 가운데 계속 거하도록 권면합니다. 그 이름답게 할 수 있는 모든 격려는 아끼지 않고, 안디옥 성도를 굳건한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고 했습니다.

 

파송 받은 자가 권위로 거드름을 피우고 성도들 안에 나타난 은혜를 알지 못하고 소방관 불 끄는 노릇만하는 요즈음 어떤 대책위원, 전권위원과는 격이 달랐습니다. 문제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호통만 앞세우는 무리들과는 달리, 혼자서도 자기 역할을 잘 감당했습니다.

 

결과야 당연하게 예측할 수 있지요. 큰 무리가 주께 더함은 당연한 귀결입니다. 바나바는 안디옥 상황을 긍정적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새 시대가 찾아온 것을 기뻐했습니다. 헬라인이 유대인의 의식, 유대인의 율법을 따르지 않고도 신자가 되는 시대임을 알았습니다.

 

누가는 이 시점에서 그의 사람됨을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요약합니다! 좋은 지도자를 만난 안디옥 교회는 당연히 날로 상황이 은혜로워졌습니다. 그 결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로 귀착됩니다.

 

바나바의 안디옥 체제는 큰 열매를 가져왔습니다. 수적인 급 증가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 했습니다. 이제 혼자로서는 감당하지 못할 사역의 차원에 접어들었습니다. 좋은 동역 자를 찾는 것은 항상 쉬운 일이 아닙니다. 차라리 혼자서 두 몫을 하는 편이 어떤 때는 쉽습니다.

 

그러나 함께 일할 것을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바나바는 이때 상황에 적합한 사람으로 사울을 떠올렸습니다. 사울이 다소로 돌아간 것은 7, 8년 전 일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받은 명령인 이방전도의 약속이 실현될 때를 기다리는 처지였습니다.

 

사도행전은 이때 사울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기록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하여간 예루살렘을 떠난 뒤 어떻게든 전도를 계속했으며 이 소식은 예루살렘에 알려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1:21~24, 2:2,7). 그 후 고린도 후서 1123~27에 나오는 바울의 자전적 고백 가운데 상당 기록은 이때 겪은 일입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 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 . . 또 수고하고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 11:23~27)

 

사도행전에 나오지 않는 고린도 후서의 기록들은 어쩌면 그때 당한 고생처럼 보입니다. 자기 가문에서 쫓겨남을 당함으로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체험을 한 것도 그때 일지 모릅니다.

 

고후12:1~4의 황홀경 체험 역시 이 시기며 이런 상황에 있는 사울을 기억해내고 그를 찾아 직접 나눴습니다. 인터넷으로 찾는 시대도 아니고 기차도, 고속버스도 없는 시절에 사람을 찾아 나서는 일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안디옥 사역은 혼자서 다 감당할 수 없는 상황임이 분명했기에 자격 갖춘 동역 자를 찾아 먼길을 나서 애써서 찾아내었습니다.

 

바나바는 사울에 관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를 이방을 위한 그릇으로 쓰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알았기에, 안디옥에 벌어진 새롭고 엄청난 사역에 동역자로 그를 찾아 나섰습니다.

 

한 때 예루살렘에서 막막한 가운데 있던 그를 찾아서 힘써 격려해서 사도들 앞에 서도록 격려했던 바나바입니다. 사울, 한 때는 유대종교의 가장 엘리트 코스인 가말리엘 문하의 명석하고 열심 있던 사울을 다시 기억해 내었습니다.

 

사울 그는 가르칠 만큼 배운 사람이요 배운 것을 가르칠만한 유능한 사람이기에 안디옥 상황에 적합한 자입니다. 유명한 유대 랍비의 최고의 코스를 섭렵한 사람인 동시에 다소 성에서 자란 헬라적 배경까지 갖추었으니 안디옥 사역의 안성맞춤이었습니다.

 

바나바는 타인의 은사를 알고 때가 되면 주님을 위해 일하도록 인도하는 역할을 맡습니다. 어둠 속에 있는 사울을 이끌어내어 복음 전파 사역의 빛으로 인도해 내었습니다. 앞으로의 기독교 역사를 기록해 가는데 소중한 자원인 사울을 어두움 속에 발굴해낸 바나바의 역할은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닙니다.

 

이는 그가 가진 지도력의 은사를 보여줍니다. 격려위안의 은사만 아니라 그는 탁월한 지도력의 은사를 가진 사람입니다. 지도력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다른 형제들을 격려해서 주님의 사역에 참여토록 하는 것입니다. 많은 일을 혼자서 붙들고, 잠도 못자고 혼자서 낑낑대는 것이 아니라, 일을 맡길 줄 알고 형제자매를 참여토록 하는 자입니다.

 

타인의 삶을 더 나은 상태로 고양시키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기를 기뻐하는 자가 지도력의 은사를 가진 자입니다. 지도력의 은사를 가진 사람은 먼저 공동체를 위한 목표를 확정하고 이 목표를 향해 공동체가 나아가도록 동기를 유발시키는 사람입니다.

 

어떤 이는 바나바를 일컬어 위대한 사람 뒤에 있는 훌륭한 사람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사람을 위대하게 만든 산파역을 감당한 사람입니다. 동역할 줄 아는 사람, 적절한 일을 적절한 사람에게 맡길 줄 아는 사람으로 사도행전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도 바나바와 같은 지도력의 은사를 가진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초대교회 역사에서 지도력의 은사를 발휘했던 바나바처럼 울산교회 지난 역사에서 지도력의 은사를 발휘한 분들도 있었고 오늘 울산교회를 위해서도 하나님은 지도력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을 허락하셨을 것입니다.

 

지도력의 은사를 가진 사람은 어떻게 그 은사를 활용합니까? 지도력의 은사를 가진 사람은 먼저 공동체를 위한 목표를 확정하고 이 목표를 향해 공동체가 나아가도록 동기를 유발시키고 격려하는 사람입니다. 타인의 삶이나 공동체의 방향을 더 나은 상태로 고양시키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기를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 울산교회는 외적환경을 개선하는 일을 위해서 리모델링을 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공동체 사역 활성화를 위해서 포럼을 하고 새로운 방향을 가다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안팎의 변화를 위해서도 누군가가 지도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때로는 재능기부를 통해서 때로는 시간을 내어주는 일을 통해서,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신앙공동체가 예배하며 친교 하는 공간을 새롭게 창출하는 일이나 62년 동안 울산교회가 나아온 방향을 검토하고 더 나은 방향을 설정하는 일에는 반드시 지도력의 은사가 활용되어야 합니다.

 

형제자매의 삶이나 공동체의 큰 방향을 더 나은 상태로 고양시키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기를 기뻐하는 사람들이 우리에겐 꼭 필요합니다. 이런 은사를 가진 사람들을 주시도록 기도하는 공동체가 되길 빕니다.

 

우리에겐 착한 사람 바나바와 같은 복합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바나바와 같은 연보 구제 은사를 가진 사람들은 공동체의 부족을 채우길 위해서 자신의 생활수준을 떨어뜨리기까지 하는 사람이고, 무엇보다 먼저 공동체 유익을 생각합니다.

 

바나바와 같은 격려 위안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은 주변에 있는 형제자매의 처지를 잘 파악하고 적절한 대응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성도들이 용기를 얻고 격려를 얻는 분들이 우리 교회에 많아지길 바랍니다. 착한 사람 바나바처럼 격려하는 일에 탁월한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살핀 바나바와 같은 지도력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은 공동체의 오늘의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도 필요하고, 공동체의 내일의 방향을 설정하는 일에도 꼭 필요합니다. 형제자매의 오늘의 삶이나 공동체의 내일의 큰 방향을 향상시키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기를 기뻐하는 사람들을 주시길 부르짖는 공동체가 되길 빕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