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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근두목사 설교

    영상주소
    http://vod.upcweb.net/pastor/2018_1021_정근두.mp4
    성경본문
    행전 13:1~3, 14:26~28, 15:36~41
    설교일
    2018-10-21

착한 사람 바나바4

행전 13:1~3, 14:26~28, 15:36~41

구주대망 20181028일 주일 찬송 8, 187, 213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지난 주초, 월요일 밤부터 울산노회가 모였습니다. 당연직 노회원인 목사들과 목사들의 수효만큼 당회가 파송한 장로 총대(대표)들이 모여서, 노회 산하의 교회의 일들을 함께 의논하는 시간을 가을에 한 번 봄에 한 번을 갖습니다.

 

그런데 저는 첫날밤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뒷날 울산교회 태아학교 개학예배가 있어서 거기에 말씀을 전할 준비를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시편 127편의 말씀을 준비하면서, 말씀과 기도라는 제 본연의 임무에 시간을 투자할 수 있었고 준비한 말씀으로 화요일 오전에 나눌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아기학교에서 말씀을 나누고 기념사진을 찍고는, 바로 분초를 다투어 노회가 모인 미포교회로 향했습니다. 막 도착하니 제가 위원장으로 섬기는 교회개척 7인 위원회 보고를 서기가 하고 있었고, 노회장 김광수 목사님의 요구대로 인사를 드리고, 회의 마지막 부분을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회의보다는 말씀과 기도라는 제 본연의 임무에 시간을 투자할 때가 제일 행복합니다. <은사의 발견 사역의 기쁨>이란 올해의 표어대로 각자가 그 은사대로 쓰임을 받을 때에 기쁨이 있습니다.

 

좋으신 그분이 우리 삶에 계시기에, 우리 생의 모든 순간은 아름답고 행복합니다. 누구든 받은 은사대로 공동체를 섬길 때에 우린 만족하게 됩니다. 이제 기본 정리를 하고, 본격적인 속도를 내고 있는 리모델링에 동참하는 분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제가 기도로 말씀을 준비하는 즐거움을 맛보듯이 그분들도 옛 공간을 다 비우고, 이제부터 새로운 공간을 만드는 기쁨을 맛보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 행복한 삶을 살았던 착한 사람 바나바의 마지막 이야기를 오늘 살펴봅시다. 하나님은 상황에 따라서 새로운 은사를 주시기도 하고, 형편에 따라서 이런 은사가 조금씩 사라지기도 합니다. 은사는 공동체를 섬기고 복음을 증진시키기 위해 하나님이 주셨기에, 새로운 상황에서 바나바가 교회를 어떻게 섬겼는지 말씀을 통해 조명해 봅시다.

 

오늘 우리가 살피는 말씀은 모두 첫 번째 소아시아 선교와 그 후속사건들로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31~3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이 부분은 사도행전에서 아주 중요한 기사입니다. 지금껏 선교는 하다 보니 하게 된 일입니다. 선교 부를 만들고 선교훈련을 시키고 파송 식을 갖고 시작한 선교가 아닙니다.

 

당시 급박한 상황은 여유잡고 일들을 진행시킬 계제가 아니었습니다. 핍박을 피해서 간 곳에 지내다 보니, 마음에 가득한 예수님 이야기를 했고, 그 이야기가 듣는 사람들을 감동시켜서 많은 사람들이 주께 돌아온 것입니다. 미리 구상하고 계획한 일이라기보다는, 하다 보니 복음이 퍼진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이야기가 이 부분에 오면 달라집니다. 물론 지금껏 어찌 보면 해외선교를 했습니다만 특정 교회가 파송해서 한 것이 아니고, 피난 간 개인들이 자연스런 삶속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13:1~3을 보면, 성령의 명령에 따라 교회가 의식적인 결단 속에 해외선교가 시작됩니다.

 

누가는 이 엄숙한 상황을 상세히 기술합니다. 어떻게 처음 선교사들이 선발되었는지를 기록합니다. 예배 중에 성령의 부름을 받은 선교사들을 어떤 절차로 파송했는지, 상당히 상세히 기술합니다. 역사가요 신학자로서 누가는 교회 역사상 이 사건의 중요성을 잘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먼저 안디옥 교회가 가진 선교사 후보들, 그들의 저력(man-power)1절에 기술합니다. 현대어 성경으로 살펴봅시다. 안디옥의 교회에서는 바나바와 사울 외에 흑인이라는 뜻의 니게르라는 별명을 가진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영주 헤롯왕의 젖동생 마나엔 등이 예언자와 교사로 일하고 있었다.”(현대어 성경)

 

모두 다섯 사람의 이름과 함께, 그들을 소개하는 말로 선지자와 교사들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보기에 따라서 그 다섯 명 모두가 선지자인 동시에 교사라고 볼 수도 있고, 헬라어 접속사의 위치에 따라 앞의 세 명은 선지자이고, 뒤의 두 명은 교사로서 볼 수도 있습니다.

 

주석가들의 입장은 대개 반으로 나눠집니다. 만약 그렇게 나눈다고 보면 바나바는 선지자에 해당하고 사울은 교사에 속합니다. 서로 서로 보완할 은사를 가진 선교 팀으로 구성된 듯싶습니다. 뒤에 바울이 바나바와 결별한 뒤 새로운 파트너로 등장한 실라가 선지자(15:32)인 것을 생각하면 설득력을 얻습니다.

 

어떻게 보든지 바나바를 가리켜 예언자라고, 달리 말해 예언의 은사를 가진 자로 보는 것은 동일합니다. 바울의 회심에 대해서 예루살렘 교회가 의심할 때 먼저 그 회심의 진가를 알아보고 그를 위해 번호하며 나선 것은 예언자로서 그의 능력에 기인합니다.

 

특정 상황에서 구체적인 하나님의 듯을 아는 것을 예언으로 볼 때 바나바가 뒤에 안디옥 제자수가 급증된 상황에서 사울을 찾아 나선 일도 예언적 은사 활용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파송 받아 안디옥에서 일어난 현상을 보고 - 거기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던 것도 예언자로서 그의 능력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여간 이 목록에서 제일 먼저 바나바가 등장한 것 보면 탁월한 예언의 은사를 가졌고, 보는 입장에 따라서는 교사로서 위치도 두드러진 것 같습니다.

 

실제 상황에서 생각해 보면 예언자라고 전혀 가르치는 것을 하지 못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보면 어느 정도 두 가지 은사를 모두 두루 바나바와 사울이 갖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울은 교사에 분류하는 것이 문법적으로 더 정확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그가 이미 주님의 계시를 특정상황과 관련해서 받은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울이 예수를 만난 후 서울 예루살렘에 올라와 우여곡절 끝에 바나바를 소개로 제자들과 함께 지내며 예루살렘에 출입하게된 것을 기억하시지요? 그때 사울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는 헬라 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한 적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앞에는 그 때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제자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배로) 다소로 보냈다”(9:28~30)는 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뒤에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고관들 앞에서 변명한 것을 들어보면 작전상 불리해서 후퇴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명령을 받아 예루살렘을 떠난 것을 언급합니다.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그들은 네가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22:17, 18)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22:21) 그는 주님을 만난 순간부터 계속 주님의 음성을 듣고, 상황에 적합한 말씀을 위탁받았음에 틀림없습니다.

 

하여간 안디옥교회가 모여 금식하며 예배하는 중에 성령께서 말씀하십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13:2,3)

 

이때 교회는 예배중인 것을 주를 섬겨란 말이 가리킵니다. “섬긴다.”는 것이 예배를 뜻합니다. 기억하십시오! 교회가 함께 모여 예배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온 성도들이 모여 주일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성령이 말씀하셨습니다. 성령께서 누군가의 입을 의탁하셔서 당신의 뜻을 전달하셨습니다.

 

저는 설교가 지니는 기능 중에 하나가 예언적 발설이라고 믿습니다. 어떤 때는 말하는 자에게는 가려진 채로 구체적인 개인의 삶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임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이때 교회는 금식 중이었습니다. 금식하고 굶식하고 다릅니다. 금식은 자원해서 음식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살펴보면 자주 금식을 한 기록은 없습니다만 교회는 이때에 금식 중이었습니다.

 

금식하고 기도에 집중할 특별한 필요를 온 교회가 느끼고 있었고 분명한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싶어 했습니다. 배가 고파지면 먹고 싶은 본능적 욕구를 뿌리치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 -그분의 뜻을 알고 싶어서 기도와 함께 금식을 했습니다.

 

이렇게 기다리는 교회에 하나님의 말씀이 찾아옵니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기에 사도행전은 성령행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성도들의 기도의 응답으로 성령께서 교회의 움직임의 주도적 역할을 감당하십니다.

 

본격적인 선교의 장이 열리기 위해서 성령께서는 기다리는 교회에 찾아왔습니다. 본문에 성령께서 말씀하셨다고만 간단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구를 통해서 말씀하셨는지 언급이 없습니다. 무슨 일을 위해서 따로 세우라고 했는지 또한 거기는 생략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의 입으로, 아니면 다섯 후보 중의 한 사람의 입을 통해서 말씀하셨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임무에 대해서도, 계속되는 이야기를 보면, 이방선교를 위한 사역임이 분명합니다. 누가가 다만 문장의 효과를 살리려고 아쉽도록 간단히 기록한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 선교사역이 하나님에 의해서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4절에도 보면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라고 기록합니다. 계속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보냄 받은 일을 성령의 충만함으로 감당한 수 있는 일입니다.

 

어찌 이 때의 선교사역 뿐만 성령에 의하여 시작되겠습니까? 모든 선교사역은 성령에 의해서 시작되고 인도되고 나아갑니다. 파송의 주체는 총회도 노회도 교회도 아닌 성령이십니다! 선교사역 뿐 아니라 모든 주의 일은 성령의 주도적인 시작에 따라야 합니다. 거기에 순응하는 교회가 열매 맺는 교회입니다.

 

성령께서는 당신의 사역을 효율적으로 감당하시기 위해 영적인 은사를 공동체에 주십니다. 모든 성도들은 각자 받은 은사대로 모든 성도들은 주님을 섬깁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해야 합니다.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바울을 따로 세우라 교회는 그 일에 순종하기 위해서 명령을 듣고 나서도, 더 금식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진 후에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파송했습니다.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금식과 기도 중에 간절히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한 교회만이 순종할 수 있는 인선입니다. 그 의미는 1) 가장 유능한 두 교사를 잃는 것, 2) 기도의 지원을 약속하는 것 3) 안디옥교회가 선교의 중심역할을 계속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 번 여러분의 상황에서 상상해 보십시오. 우리 가운데서 가장 은혜를 끼치는 두 목사를 지명해서 선교지로 파송하라면 우린 당혹해 하고 난감해 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구체적인 순종을 하려고 금식하며 기도하고 기다리고 있었기에 다시 금식기도하며 두 사람을 안수해서 보냈습니다.

 

온 회중의 대표자들이 그 둘에게 안수했을 것입니다. 왜 안수했을까요? 이 안디옥은, 그들이 선교 활동을 하려고, 하나님의 은혜에 몸을 내맡기고 나선 곳이다.”(14:26)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한 행위로서 안수한 것으로 보입니다.

 

일곱 집사를 선택한 후에도 사도들이 그들에게 안수한 기록이 나옵니다. 하지만 여기서 안수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종신 봉사를 위한 임직(목사, 장로 등)이거나, 사도로 임명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본문에 나오는 은사나 능력을 부여한 행위가 아니고 안디옥교회가 그 지도자를 통해 안수함으로 바나바와 사울과 밀접한 교제를 나타내고, 그들의 파송자로 공식화하는 행위라 볼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을 임명했다기보다는 교회가 하나님의 파송을 인정한 행위입니다. 이미 성령이 불러 세웠고, 그리스도의 사도된 자들을 교회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으로 보입니다. 교회가 그들의 파송에 관여했으나 여전히 파송하는 주체는 성령이십니다.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라고 4절은 밝힙니다.

 

친밀한 유대와 교제를 나누는 행위로서, 파송을 공식화하는 의미로 안수하는 일이라면 좀 더 자주 활용할 수 있어 보입니다. 단지 목사, 장로, 집사를 임직할 때뿐만 선교사나 유학생 파송 때에도 못할 이유가 없어 보입니다.

 

134-12절 구브로 선교를 살펴봅시다. 일반적인 양상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사도행전 1119절에 의하면 이미 구브로는 복음 받은 적이 있습니다. 바나바를 위시해서 안디옥 성도 중에는 구브로 출신이었고, 어쩌면 친인척이나 친구들이 거기 있었을 것입니다.

 

인간적 관점에서 보면 거기서 사역 시작한다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두 선교사는 그렇게 하는데 그 이상의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성령의 인도를 느꼈을 것입니다. 물론 여느 곳과 마찬가지로 구브로에서도 유대인의 회당을 활용해서 사역을 펼쳤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부분의 강조점을 우리가 집고 넘어가길 원합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1) 사역의 주두권이 이양되고 있음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처음 성령께서 안디옥교회에서 두 사람을 선교사로 세우려고 부르실 때는 바나바와 사울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이름이 기록된 순서를 잘 살펴보십시오.

 

구브로에 도착해서 동쪽 살라미에서 서쪽 바보로 비너스 여신을 섬기는 악명 높은 도시요 그 지역 행정 중심지로 옮겨갈 때까지는 바나바가 여행의 주도적 역할을 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갈수록 점점 상황이 바뀌어 갑니다. 사도행전 139절을 읽어보면 바울이라고도 하는 사울이 전면에 부각됩니다. 그래서 바울이라고도 하는 사울이 성령으로 충만하여 마술사를 노려보고 말하였다.(13:9)

 

2) 또 하나의 강조점은 바울이 구브로 주지사(총독)을 만난 사실입니다. 로마 총독을 만나기 전 그 일을 가능하므로 복음이 로마 관리에 수용적임을 변증하고 있습니다. 로마 관리가 복음에 동정적 관심과 신앙 표명까지 한 것으로 복음의 진전을 보여 줍니다.

 

뿐만 아니라 이 부분의 강조점 중 하나는 3) 바울이 복음증거를 반대하는 한 요술사를 만나서 능력대결을 펼친 점입니다. 복음의 능력이 얼마나 이방 요술능력을 제압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을 통해서 바울이라 하는 사울이 점점 전면에 부각됩니다. 선교여행을 떠날 때는 바나바와 사울”(13:4)이라고 누가는 기록했지만, 급기야 이 섬을 떠날 때 누가는 바울과 그 일행”(13:13)이라고 바울을 전면에 내세웁니다.

 

말하자면 바나바는 그 동행하는 사람들 속에 이름이 감취어집니다. 버시디아 안디옥 사역에서도 사역전면에 바울이 등장합니다. 바나바의 활동은 기록에서 사라지고 바울이 한 설교(13:16~41)만이 사도행전에 남아있습니다.

 

물론 그곳 사역의 결과를 기록하면서 바나바의 이름이 등장합니다만 이제는 순서가 바뀝니다. 회당의 모임이 끝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13:43)

 

상황을 연상해 보십시오. 점점 바울이 부각되고 있습니다. 세 번의 예외 말고는 바울이 바나바보다 먼저 등장합니다. 첫 번째 예외는 각 사도가 대표하는 그리스 신들의 위치 때문일 것입니다. 무리가 바울이 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러 이르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 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라 하더라(14:11,12)

 

바나바의 면모를 보여주는 마지막 사건으로 가봅시다. 1차 선교여행은 선두주자가 중도에 바뀌었지만 은혜 중에 마무리 됩니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13:48, 49)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13:52)

 

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 곳은 두 사도가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그들이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하고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14:26~28)

 

성공적인 선교보고가 있으면 무엇을 다룰 것을 예상하십니까?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에 있을 때, 유대에서 온 사람들 몇이 여전히 유대의 옛 관습대로 할례 받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고 가르치자 그 문제를 사도나 장로들과 함께 협의하여 해결하기 위해서 모인,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바울보다 바나바가 두 차례 먼저 나옵니다.

 

어떤 바리새파에 속했다가 신자가 된 이들이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신도가 된 이상 모세의 가르침대로 할례를 받고 유대인의 관습과 의식을 빠짐없이 다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였기에 이 문제를 두고 사도들과 교회 장로들은 회의를 열었지만 토의가 끝없이 거듭되자 베드로가 일어서서 말합니다.

 

베드로의 말을 듣고는 “. . . 더 이상 아무도 반론을 펴지 않았다. 그리고 바나바와 바울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방 사람들에게 베푸신 여러 이적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15:12, 현대어성경) 예루살렘 교회의 신임에 관한 한 아직도 바울보다는 바나바가 앞섰을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야고보의 결론으로 회의는 끝납니다.

 

그 회의의 결과를 요약해서 편지를 보냅니다. 사도와 장로 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지시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혼란하게 한다 하기로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가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노라(15:23~25)

 

이런 기록들을 보면 바울이 점점 앞자리에 등장하지만 사실은 바나바의 탁월한 지도자적 자질이 부각되고 있습니다. 아무런 시기하는 마음 없이 바나바는 바울의 탁월한 은사를 인정했습니다. 자신이 행사하던 지도력을, 그것도 자신이 찾아내어 교회 앞에 세운 후배 동역 자에게 기꺼이 내어준 사람입니다.

 

그런 은혜를 저도 입기를 원합니다. 누가 후임 담임 목사가 되더라도 기꺼이 그 지도력을 수용하는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그런 착한 사람이 되도록 여러분의 특별한 기도의 지원이 필요합니다.

 

바나바는 자신의 동역자에게 자기 자리를 내어주고도 그 일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입니다. 누군가의 밑에 있는 것은 더 큰 은혜를 필요로 한다.”는 말을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남이 시키는 대로 일을 하는 것은 은혜가 좀 더 필요한 일입니다.

 

한 때는 저도 부목사였습니다. 부목사인 나를 치료했던 은사가 마틴 로이드존스입니다. 일관성 없는 지시와 하찮은 일을 나에게 맡길 때, 도무지 불합리한 시간에 급하게 새벽기도를 맡길 때 마음이 편치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고 위치가 바뀐 나를 보니까 그 때 내 선임자는 선하고 착한 분임을 지금은 인정합니다. 그런 답답한 부목사였던 나를 데리고 있었던 것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바나바의 경우는 상황이 다릅니다. 무명의 사울을 어두움 속에서 구출해 주었고 박해자 사울을 사도들에게 적극 천거해 주었고 함께 선교에 나설 때까지 제 1인자의 위치에 있다가 지금은 제 2선으로 물러나는 일을 감당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아무런 불만 없이 시기심 없이 함께 동역을 잘 한 것을 보면 왜 누가가 행전에 나오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유독 바나바를 착한 사람이라고 불렀는지 이해가 될 것도 같습니다. 그의 착함과 위대성이 여기서 나타납니다. 바나바 자신의 탁월한 지도력의 은사를 결정적으로 입증한 구절입니다.

 

지도자는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이 하겠다고 붙드는 사람이 아닙니다. 한 번 리더는 영원한 리더가 아닙니다. 세상 적으로 말해도 위대한 지도자라면 장기 집권 욕에 붙들린 사람이 아닙니다.

 

맡은 기간 동안 열심히 일하다가 물러날 때를 위해 후계자를 키우는 사람이 위대한 지도자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다른 이에게 주신 은사를 인정하고 은사를 발휘하도록 기회를 제공하고, 필요하다면 자신의 지위나 위치조차도 양도하는 자가 위대한 지도자입니다. 큰 자는 작은 자를 섬기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특징입니다.

 

이제 1536절 이하로 가봅시다.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15:36~41)

 

며칠 후에 한동안 시간 경과를 나타내는 관용구입니다. 두 번째 선교여행을 앞두고 누구와 함께 가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서로 심히 다투고 갈라섰습니다. 누가는 격렬한 논쟁을 중립적 입장에서 보고합니다. 착한 사람 바나바도 언성을 높였나 봅니다.

 

무엇 때문에 싸웠을까요? 착한 사람도 화를 내는 모양입니다. 더 무섭다고들 말하지요. 그 원인을 우리는 행전 1313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구브로사역 직후의 일입니다.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13:13)

 

선교여행에 함께 나섰다가 중간에 예루살렘에 돌아간 요한 마가를 두고, 어떻게 보면 별로 큰 문제가 아닌 것 가지고 너무 심히 싸운 것처럼 생각되지는 않습니까? 왜 그 두 선교사는 서로 싸웠을까요?

 

지난 여행에서 중간에 돌아간 일을 꼭 같이 알고 있는 바나바이지만 젊은 마가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위로의 아들위안 격려의 은사가 탁월한 그로서는 당연한 생각입니다.

 

하지만 바울의 입장은 달랐습니다. 열정의 사람 바울은 선교 사역을 중시했기에 믿을 수 없는 친구를 데리고 가서 또 한 번 낭패를 자초하길 원치 않았습니다. 지난 번 중간에 팀을 버리고 돌아선 친구를 다시 태우는 것은 선교 일을 망칠 위혐이 너무 크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누가 옳았을까요? 무성한 추측이 그동안 무성했습니다. 분명한 것은 아마 두 사람의 입장과 행동이 모두 다 마가의 영적 성장을 돕는 일에 기여 했을 것입니다. 바울의 거절을 통해서 마가는 자신의 신뢰성을 입증하려 노력했을 것이고, 바울과 교제 단절을 불사하고 전적 지원해 준 바나바를 위해서도 필사적으로 자신의 신실성을 입증해 보이려 했을 것입니다.

 

마가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자고 역설한 바나바 때문에 미래의 사역에 쓰임 받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흐른 다음 바울에게서 비로소 동료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4:10 딤후 4:11 벧전 1:12) 하여간 바나바의 위로 격려의 은사로 인해 마가는 신앙을 접지 않고 남아서 오늘 우리가 읽을 만한 신약성경 가운데 한 책인 마가복음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바나바는 이처럼 갈라서기까지 마가를 믿어주고 신뢰함으로 마가복음을 우리가 읽게 되었습니다. 박진감 있는 하나님의 종 그리스도 예수 사역이 기록이 우리에게 전해진 것입니다.

 

바나바 자신은 한 권의 성경도 기록하지 않았으나 마가복음의 저자를 마가 요한을 세워주었고 또한 사울이었던 바울을 발굴함으로 13개 서신의 저자에게 결정적 영향을 끼친 사람입니다. 신약성경 절반 넘는 14권의 저자의 배후에 절대적 영향을 끼친 사람입니다. 바나바의 탁월한 은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교회는 든든히 서갔습니다.

 

착한 사람 바나바는 어떻게 교회를 섬겼습니까? 1)구브로의 농장을 팔아서 헌납한 구제, 연보의 은사를 먼저 살폈습니다. 처음에는 자기의 재산을 다음에는 공동체를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일에 참여시켰습니다. 2)격려 위안의 은사 사울을 발굴해서 안디옥 교회를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도록 했습니다. 3)지도력의 은사를 발휘해서 바울을 세우고, 끝까지 마가를 붙들어 주어서 다음 세대를 위해서 길을 열었던 사람입니다. 주신 은사로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가는 일에 쓰임 받는 여러분들이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