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정근두목사 설교

    영상주소
    http://vod.upcweb.net/pastor/2018_1118_정근두.mp4
    성경본문
    계시록 6:3~4
    설교일
    2018-11-18

둘째 인을 떼실 때에

계시록 6:3~4

구주대망 20181118일 주일 찬송 36, 149, 349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계시록 설교, 준비하기도 어렵지만 듣기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가능하면 왜 그런 결론이 나왔는지 과정 설명은 생략하고, 도달한 결론에 따른 적용위주로 말씀을 드리고 싶지만 자신은 없습니다. 하여간 최소한의 설명은 피해 갈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일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첫째 인을 떼실 때에,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하는 승리자의 환상으로 성도들을 위로하셨습니다. 이제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둘째 인을 떼실 때에 수반되는 사건들을 살펴봅시다.

 

지금 그가 두 번째 인을 떼십니다. 둘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둘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더니 이에 붉은 다른 말이 나오더라. 그 탄자가 허락을 받아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았더라.

 

둘째 생물의 오라는 음성이 울려 퍼지자 붉은 말이 등장합니다. 흔히 붉은 말전쟁과 피 흘림의 상징으로 생각합니다. 서로 죽이더라.”는 말에 근거해서 내란과 같은 소요사태를 의미한다고 보는 분들이 많습니다.

 

소요냐 박해냐?

그러나 나라와 나라들이, 민족과 민족이 서로 분쟁하는 것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가해지는 종교적 박해요, 일반적인 싸움으로 인한 죽임이라기보다는 순교의 죽음을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의한 핍박을 받는 성도들을 의미한다고 보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렇게 해석할 때 문맥이 조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둘째 말은 첫째 말을 뒤따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복음의 능력으로 승리하는 곳마다 핍박의 이 뒤따르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앞 사건과 조화를 이루는 동시에 뒤따르는 사건과도 조화를 이룹니다. 다섯째 인이 떼어질 때에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을 봅니다. 여기 9절에서 죽임을 당한이라는 말과 4절의 서로 죽인다.”는 말이 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두 번째 인을 뗄 때 죽임을 당한 이들이 바로 다섯째 인을 뗄 때 죽임을 당한 성도들과 동일인이라고 보는 것이 문맥의 흐름상 더 타당하다고 생각이 듭니다.

, 그러면 이 본문에 쓰인 단어들을 살펴봅시다. 서로 죽이게 하고란 낱말은 살인 혹은 전쟁으로 죽이는 경우에 사용하지 않습니다. 일반적인 죽임을 의미하는 단어(to kill)가 아니라 주로 그리스도의 죽음이나 성도들의 처형을 의미할 때 사용하는 단어. 살해하다(to slay), 도살하다(to slaughter)임을 주목해야 합니다.

 

요한은 도살하다.”이라는 단어를 그리스도와 성도의 죽음 외에 사용한 경우는 단 한 번 있습니다. 그것은 계시록 133절에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이라고 그리스도의 능력과 존귀를 가로챈 짐승에 관해서 사용되어져 있습니다.

 

그러면 왜 거기서 도살하다라는 단어를 사용했을까요? 이 적 그리스도의 사자가 짐승으로서 상징되어지고 있기 때문에 그의 죽임은 도살로 표현하는 것이 더 어울렸기 때문입니다.

 

이 한 번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 특정한 단어는 사도 요한이 항상 그리스도와 성도들의 죽음에 대해서만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본문 64절의 경우 일반적인 죽음보다는 종교적인 순교의 죽음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또 본문에 나오는 큰 칼이라는 단어 역시 헬라어에서는 8절에 나오는 과는 다른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큰 칼은 짐승을 도살할 때 쓰이는 칼을 의미하는 반면, 8절의 검은 전쟁에서 사용되는 칼을 뜻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계시의 말씀이 처음 주어졌을 때 누구에게 주어졌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 계시록의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물론 해당되는 말씀이지만 요한은 핍박을 당하고 있었던 성도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밧모 섬에서 계시를 받아 그들에게 전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시의 성도들의 상황을 살펴보면서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죽기까지 핍박을 당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그들에게는 전쟁보다도 핍박이 주된 관심사였고 긴급한 문제였습니다.

 

흰 말을 뒤따르는 붉은 말

흰 말을 탄자가 나타나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할 때마다 붉은 말을 탄자가 뒤따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증거의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동시에 핍박의 상황이 발생합니다. 핍박이 극심해 지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증거의 기회로써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에 내 이름을 인하여 너희에게 손을 대어 핍박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주며, 임금들과 관장들 앞에 끌려가려니와,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12:12-13).

 

붉은 말을 탄자는 어느 특정한 시대의 특정한 개인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세상은 항상 교회를 핍박하고 있습니다. 붉은 말을 탄자가 활동을 그친 시대는 한 번도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이후로 세상에는 화평이 끝났습니다.

마태복음 1034절의 말씀을 보면 우리의 해석이 더 확실해집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려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그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로다

 

그러나 여러분, 오해하지 마십시오. 가정불화를 정당화 시키는 구절이 아닙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피치 못할 불화를 말하는 것이지 흔히 일어나는 고부간의 갈등을 정당화시키는 말씀이 아닙니다.

주님은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가 태어나시는 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천사들이 노래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궁극적인 평화를 이루는 과정은 평화로만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물론 주님이 오신 것은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화평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받아들인 자와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 사이에는 어쩔 수 없는 불화가 있습니다.

 

주님의 평화는 세상과 더불어 잘 지내는 평화가 아닙니다. 주님의 평화는 마귀와 함께 하는 평화가 아닙니다. 악과 더불어 타협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땅에 분쟁과 불화를 일으키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사탄의 머리를 깨뜨리는 일을 하려고 오셨기에 검을 주려 왔노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로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이 말씀의 성취로써 오신 분입니다. 화평보다는 불화를 위해서 오셨다는 말씀은 창세기 예언의 성취로 이해해야 합니다. 화평 대신 검 - 여기에 이라는 말과 본문에 나오는 이라는 단어가 일치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이후로 교회를 향한 핍박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붉은 말을 탄자가 큰 칼을 받아”, 허락을 받아 세상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린다고 본문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한시적으로 주신 권한입니다.

 

모든 것을 보좌에 앉으신 어린 양이 다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인간 역사를 당신의 계획을 이루기 위해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는 큰 칼이 주어지기는 했지만 그것마저도 하나님이 허락한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릇 세상에서 경건하게 살고자하는 자마다 박해가 기다립니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려고 할 때 우리의 삶에도 동일한 환난이 다가올 것입니다. 그러나 명심하십시오. 이 모든 것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다스리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곤고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협입니까, 또는 칼입니까?”(8:35, 새번역)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8:37 개역개정)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계시록의 주제는 이 사실을 입증합니다. 우리가 넉넉히 이기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모든 환난과 핍박과 칼 가운데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넉넉히 이김을 입증하는 것이 계시록의 주된 목적입니다.

 

계시록은 결코 우리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쓰인 책이 아닙니다. 계시록은 미래에 대한 우리의 궁금증을 풀어주려고 쓰인 책이 아닙니다.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는이김을 미리 맛보도록 쓴 책입니다.

 

붉은 말 탄자의 기승

마지막 시대에는 붉은 말을 탄자가 기승을 부릴 것입니다. 승리의 주님께서 나타나실 때가 가까울수록 그가 받은 큰 칼을 더욱 휘두를 것입니다. 세상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고 서로 죽이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은 다만 재난의 시작에 불과합니다. 둘째 인을 뗄 때의 상황일 뿐입니다. 아직도 떼어져야 할, 다섯 봉인이 남아 있습니다. 재난의 시작을 알리는 징조 가운데 하나가 땅에서 화평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재난의 시작을 알리는 징조는 붉은 말을 탄자가 허락을 받아 큰 칼을 받아 서로 죽이는 데서 시작합니다. 마지막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는 분명한 징조 중의 하나는 세상의 화평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선지자 스가랴는 그 날이 올 때의 상황을 이렇게 예언합니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들로 크게 요란케 하시리니 피차 손으로 붙잡으며 피차 손을 들어 칠 것이며 크게 요란케 한다는 말을 소요사태가 극심해 진다는 말입니다.

 

피차 손으로 붙잡으며 피차 손을 들어 칠 것이라는 말은 형제간에 서로 나뉘어, 한쪽은 침략자로서 다른 쪽은 방어군으로서, 한 쪽은 데모대원으로, 한 쪽은 전경으로 서로 치고 서로 죽이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같은 땅의 젊은이들이 서로 죽이는 자리에 동원된 것을 6.25 사변을 통해서 뿐 아니라 오늘 우리가 모르는 현실도 아닙니다. 땅에서 화평이 제거된 모습을 우리는 매일 보고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그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화평이 떠나는 것뿐만 아니라 세상이 성도들을 핍박하는 상황이 도래하고, 또한 성도들이 서로 시험에 빠져 서로 미워하고 서로 넘겨주고 서로 죽이는 극한 상황으로 치닫게 될 것입니다.

 

감람산에서 주님이 하셨던 그 예언이 성취될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주어 너희 중에 몇을 죽이게 하겠고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너희 머리털 하나라도 상치 아니하리라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21:16-18)

 

지금껏 역사 속에 수 없이 되풀이된 상황임에 틀림없지만 다시금 이런 일들이 자주 반복될 것입니다.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주어 너희 중에 몇을 죽이게 하겠고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서로 돌아보십시오.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한번 확인해 보십시오.

 

6.25전쟁이 일어났을 때에 서로 넘겨준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만이 아닙니다. 오늘처럼 이렇게 같이 예배한 사람들끼리 서로 밀고함으로써 자기 생명을 보장받으려 했습니다. 역사상 이런 일들은 반복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그 날이 되면 이런 일이 또 다시 반복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가 서로 돌아본다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 가운데 쓴 뿌리가 나지 않도록 기도해야만 합니다. 배신자가 생기지 않도록 서로를 돌아보고 신앙 안에 있는지 분명히 서로 확인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공동체는 끝까지 사랑 가운데 함께 설 수 있는 공동체로서 언제나 준비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헌신이 되지 아니할 때, 여러분이 악해서가 아니라 그날의 환난이 극심하기 때문에 시험에 빠져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자리에 내어주게 될 것입니다.

상황이 조금만 변해도 얼굴 돌릴 사람들과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형제자매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은 스스로 속고 사는 것입니다.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주어 너희 중에 몇을 죽이게 하겠고

 

마태가 기록한 주님의 말씀은 더욱 분명합니다.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24:9-12).

 

재난의 시작을 예언하시며 주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서로 잡아주고 서로 미워해서 환난에 넘겨주는 이 일은, 시험에 빠진 성도들 사이에서, 어제까지 교제하던 사람들 사이에서 오늘 일어날 수 있습니다.

 

주어진 큰 칼

요한은 지금 환상 가운데, 새로운 상징으로 주님이 말씀하신 진리를 입증하고 있습니다. 면류관을 받고 나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는 백마 탄 그리스도의 승리의 길에 붉은 말 탄자의 핍박의 검이 나타납니다. 붉은 말 탄자가 허락을 받아,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는 일이 벌어질 것을 보여즙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기억하십시오. 붉은 말과 그 탄자의 활동은 제한적입니다. 땅에서 화평을 제하는 그의 임무도 부여된 임무입니다. 그 탄자가 허락을 받아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았더라.”

 

달리 말해 큰 칼은 단지 그에게 주어진 칼입니다. 허락을 받은 활동이요 하나님이 주신 임무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모든 것은 보좌에 앉으신 이의 손안에 있습니다. 보좌에 함께 앉으신 어린 양께서 큰 칼을 그에게 맡기셨습니다. 핍박과 환난과 위험과 칼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오늘 예수 이름으로 당하는 환난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환난입니다. 그 나라의 영광에 합당한 자로서 삼으시기 위해 그의 남은 고난을 여러분의 몸에 채우는 고난의 일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도구로서 환난과 핍박은 성도의 삶에서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마다 핍박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우리도 많은 박해를 견디어 내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환난을 통해서 자기 백성을 지금껏 단련시키셨고 앞으로도 환난을 통해 단련시킬 것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오.” 사도는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환난과 핍박과 기근과 헐벗음과 죽음과 위협이 있고 칼이 설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오.”라고 소리치고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편안하고 잘 되기만 한다면 왜 이런 말을 하겠습니까? 바울은 남보다 그리스도를 끔찍하게 사랑했기 때문에 땅에서 주어진 그의 몫이 환난과 곤고와 박해와 굶주림과 헐벗음이었습니다. 위협과 칼이 이 땅에서 그에게서 멀어지지 않았습니다.

 

그의 생애의 말년에 이르기까지 한 칸 자기 소유의 방을 갖고 있지 못했다는 사실을 기억해 보십시오. 대 사도로서 역사상 유례없는 복음을 전했고 능력 있는 설교자였지만 마지막에 로마에서 그가 있었던 곳은 지중해변의 별장이 아니라 로마의 셋방이었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그리스도 닮기를 원한다면 환난과 곤고와 핍박을 남의 일처럼 생각 할 수 없습니다. 굶주림과 헐벗음과 칼의 위협을 남의 것인 양 생각하고 살 수 없습니다.

 

편안해지기 위해서 모른척하고 돌아서면 환난과 곤고와 핍박이 없을지 모릅니다. 오히려 사람들의 박수소리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만약 진정으로 복음을 위해서 살기를 원한다면 사도들이 걸어갔던 그 길이 여러분이 가야 할 길입니다.

 

환난 속의 승리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모든 일이 우리와는 관계없는 일이 아니라 이 모든 일을 통해서, 이 모든 일 가운데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를 쓴 사람은 성도들의 입장을 말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을 당하였고 심지어는 결박과 투옥까지 당하였다. 그들은 돌로 맞았고 톱으로 켜지고 검으로 죽임을 당하였다. 그들은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떠돌아다니면서 궁핍과 고난을 당하고 학대를 받았다. 이런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광야와 산과 동굴과 땅굴을 헤매고 다녔다.”(11:36-37, 현대어성경)

 

히브리서를 쓸 때의 성도의 길은 그러했습니다. 하지만 그 길이 믿음의 승리자들이 걸어갔던 길인 동시에 지금도 믿음의 승리자가 걸어야 하는 길입니다.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떠돌아다니면서 궁핍과 고난을 당하고 학대를받은 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과 저의 삶에 궁핍과 박해와 학대가 없다고 평안 가운데 안일해져서는 안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눈을 들어 널리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살펴보십시오.

 

여러분과 주님의 피로 한 몸된 성도들이 당하는 고통을 함께 느껴보십시오. 오늘도 이 땅에 흩어져 있는 교회 가운데는 복음 때문에 고난당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복음 때문에 이 문명 세기에도 핍박의 칼에 위협을 당하는 성도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단풍이 아름답고 풍성한 수확이 보장된 가을날 우리끼리 예배하고 돌아가는 것으로 할일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안일한 삶의 자세입니다. 앞으로 우리의 예배에는 흩어진 열두 지파를 위한 기도가 포함되었으면 합니다.

 

성도들이 기도할 때에는 온 땅에 흩어져서 고난당하는, 환난 당하는, 유리하는 교회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시험과 칼에 죽임을 당하고 있고, 그것은 어제의 기록만이 아니라 오늘의 기록인 동시에 내일 우리가 당하게 될 환난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나 어떤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여러분이 기억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전능하신 분이 그에게 권한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 칼은 하나님이 그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칼을 들고 있는 자가 우리의 생명을 노린다고 할지라도 그가 전권을 행사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아니하시면 너희 머리털 하나라도 상치 아니하리라고 위로하고 있습니다. 전능자 하나님께서 핍박의 검으로써 우리를 정화시켜 나가고 있습니다. 핍박자의 칼은 전능자의 뜻을 조금도 거스를 수 없습니다.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긴다.”는 이 진리에 서기를 원합니다. 이 모든 환난으로부터 우리는 도피하는 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고백하는 승리자가 되길 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우리가 붙잡을 진리에 입각한 고백입니다.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이것이 또한 박해 가운데 승리한 성도들의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찬양합니다. 다른 사람 어찌든지 나 주님의 용사되리.” 진리에 굳게 서는 충성스런 성도들이 되길 소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