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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근두목사 설교

    영상주소
    http://vod.upcweb.net/pastor/2018_1209_정근두.mp4
    성경본문
    계 6:9-11
    설교일
    2018-12-09

 

어느 때까지

6:9-11

구주대망 20181210일 주일 찬송 10, 85, 363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새벽기도의 자리에 나오기 시작한 분들로 인해서, 주일마다 계시록 말씀을 사모하는 성도들로 인해서 요즈음 저는 주말과 주일이 유달리 행복합니다.

 

천상의 장면

오늘 본문에서는 어린 양께서 다섯 번째 인을 떼십니다. 여기에는 장면의 전환이 있습니다. 처음 네 가지 인을 뗄 때의 지상의 장면이 펼쳐졌지만, 다섯째 인을 뗄 때는 천상의 장면이 다시 펼쳐집니다.

 

처음 네 번의 인을 뗄 때는 하나님의 뜻을 온 땅에 시행하는 말과 그 탄자의 환상을 보았지만, 다섯째 인을 떼면서는 하늘 성전에서 부르짖는 영혼들의 호소가 울려 퍼집니다. 더 이상 오라는 네 생물의 부름이 없지만 요한은 새로운 장면을 보고 음성을 듣습니다.

우선 요한이 본 장면을 우리도 함께 살펴봅시다. 처음 네 인이 차례로 떼어질 때마다 오라는 네 생물의 소리가 울려 퍼졌고 그와 동시에 등장하는 네 말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나라의 확장과 승리가 보장되어 있지만 순교와 핍박, 전쟁과 기근, 유행병과 사나운 짐승으로 말미암는 상황이 전개되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피할 수 없는 현실

종말로 인도하는 이 일반적 상황을 먼저 묘사한 다음 다섯 번째 인이 떼어집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그 왕국 복음을 선포하는 사명을 추구하는 동안에 핍박과 순교는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를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요한은 제단 아래 있는 영혼들을 보았습니다.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구약의 제사 드리는 법을 생각해 보십시오. 희생제물의 피는 바르거나 뿌리기도 했지만 제단 바닥 밑에 쏟아 부었습니다. 제사장은 또 그 피를 여호와 앞 곧 회막안 향단 뿔에 바르고 그 송아지의 피 전부를 회막문 앞 번제단 밑에 쏟을 것이며”(4:7). 순교자들의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다는 것은 그들의 삶을 제물로 드렸으며 그 피는 바닥에 쏟았다는 것을 나타내는 상징입니다.

신약은 가끔 희생 제사, 그 죽음을 말하는 용어를 사용해서 다음과 같은 표현을 합니다. 사도바울은 죽음에 직면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딤후 4:6). 같은 구절을 표준새번역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나는 이미 부어드리는 제물로 피를 흘릴 때가 되었고, 세상을 떠날 때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성도의 삶, 그 종말을 피를 부어 드리는 희생 제물로 비유합니다.

그보다 일찍 바울은 성도들을 격려하면서 비슷한 표현을 쓴 적이 있습니다. 이제 내가 여러분의 믿음의 제사와 예배에 내 피를 붓는 일이 있을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여러분 모두와 함께 기뻐할 것입니다.”(2:17, 우리말성경).

 

같은 본문을 새 번역으로 읽어 봅시다. 여러분의 믿음의 제물과 봉사위에 내 생명의 피를 제사 술처럼 따라 붓는다고 해도 나는 기뻐하고 여러분 모두와 함께 기뻐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기독교인 순교자들은 하나님께 바쳐지는 제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죽임을 당하고 그 피가 땅에 뿌려지지만 신앙 가운데 그 희생은 하늘에 드려진 것이며 그들의 영혼은 하늘 제단에 바쳐진 것으로 간주됩니다.

 

죽임을 당한 영혼들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한은 지금 누구를 마음에 두고 죽임을 당한 영혼들을 생각하고 있을까요?

 

특정한 시대, 특정한 무리들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요한이 편지를 쓸 당시까지는, 그래도 아직은 순교가 보편적인 현실이지는 않았습니다. 어떤 교회에는 이미 순교의 제물이 바쳐졌지만 교회마다 그렇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네로가 로마라는 특정 지역의 성도들을 핍박했고, 도미티안은 역시 요한 당시 몇몇 그리스도인을 로마에서 핍박한 것이 사실이지만 요한이 내어다 본 마지막 시대의 적그리스도에 의한 핍박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지금 환상 속에서 모든 시대의 순교자들을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마지막 때에 있을 순교자들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신약은 교회의 본질을 박해과 순교를 당하는 무리들로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역시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누구든지 내 제자가 되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10:38)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16:24).

 

아무든지 예외가 없습니다. 이 말씀을 하실 때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가 되려면 기꺼이 순교할 각오를 해야 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죽음을 뜻합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십자가를 진다는 것을 순교를 각오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순교를 각오하지 않고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 수 없었습니다.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오늘도 순교자이어야 합니다. 요한 역시 모든 신자를 그렇게 고난당하는 자로 생각합니다. 요한이 본 제단 아래 있는 순교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자들입니다.

어떤 신자라도 예수님의 주되심을 고백하면 가이사가 주라는 고백을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배신하고 가이사의 이름으로 맹세하기만 하면 죽음에서부터 놓일 수 있다는 속삭임을 들었던 사람은 비단 폴리갑 교부만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그러한 유혹을 다른 성도들이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배신보다는 기꺼이 그 이름에 신실한 순교를 하기 원했습니다.

비단 실제적인 순교의 죽음을 당한 자들만 아니라 요한은 자신을 그런 순교자의 하나로 간주합니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뿐만 아니라 사도요한은 그리스도인 모두를 일컬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라고 합니다.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서 있더라.”(12:17)

 

순교적 삶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삶은 순교자의 삶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필요하다면 죽기까지 충성하는 삶이 성도의 삶입니다. 그리스도를 신실하게 따르는 성도의 삶을 사십시오.

 

피를 흘리는 적색 순교는 하나님이 정한 사람들이 하지만 백색순교 즉 순교적인 삶을 사는 것은 우리 모두를 향한 하나님의 부름입니다. 신체적인 죽음은 당할 수도 있고 당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죽임 당한 어린 양과 동일시하는 자들은 이미 자신의 삶을 드린 자들입니다.

 

바울과 함께 확신 가운데 고백하는 자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8:35)

그리스도인의 삶은 종일 주를 위하여 도살할 양 같이 죽음을 눈앞에 둔 삶입니다. 그러기에 그런 자의 죽음 역시 하나님이 귀히 보시는 죽음입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14:1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순교를 각오한 삶을 살아가십시오. 어린 양의 죽음이 여러분의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은혜를 누리십시오. 도살당한 어린 양의 죽음이 여러분 자신의 죽음으로 체험되는 순간이 성도들에게는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떠한 상황도 두렵지 않습니다. 어떠한 고통이라도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며 한 평생 주를 위하여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을 때 세상은 또 한 번 우리 안에 나타난 그리스도를 볼 것입니다. 모두 다 순교의 죽음을 맞이할 수는 없지만 누구든지 순교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좀 더 구체적인 말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영혼들의 호소

, 그러면 다시 본문으로 돌아갑시다. 하늘 성소의 제단 아래 있는 죽임을 당한 영혼들의 호소를 들어 봅시다.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6:10)

 

잘못 생각하면 순교를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서 밤낮 호소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은 의인들의 영혼이 한번 큰 소리로 하나님께 호소하는 장면입니다. 거룩하고 참되신 대 주재여.”

대 주재로서 하나님을 부르는 일은 신약에서 흔한 표현은 아닙니다. 보통 (kurios)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이 경우는 대주재(despotes)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만물을 당신 뜻대로 다스리시는 주권자라는 의미입니다. 종들의 주인으로서 하나님의 절대 권력을 강조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대 주재이심을 믿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자기 종들에 대해 절대 주권을 행사하고 계신 것을 믿고 있습니까? 그 종들 가운데 누구를 순교의 제물로 받을 것인지, 누구를 산 순교의 제물로 남기실 것인지 결정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믿고 있습니까? 종들의 주인으로서 하나님은 절대 주권을 가지고 계십니다.

지금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의 이름을 불러 호소하고 있습니다. 거룩하고 참되신 대 주재여!” 하나님을 이렇게 부를 수 있는 자들은 복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로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그 모든 삶을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에 의탁할 수 있습니다.

 

그 죽는 순간까지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맡길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자기 종들의 삶에 대해 절대권을 가졌으나 전제 군주가 하듯 자기 마음대로 횡포를 부리는 분이 아닙니다. 대주재 하나님은 악을 초월할 뿐만 아니라 순교자에게 가해진 악행을 끝까지 용납지 않는 분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참되신 대주재입니다. 당신의 언약에 신실하셔서 끝내는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실 분입니다. 당신의 언약에 신실하셔서 끝내는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실 분이십니다. 거룩하고 참되신 대 주재여라는 부름의 말속에 이미 성도의 신앙이 나타나 있습니다.

 

참되고 거룩하신 그 분이 우리의 피를 신원해 주실 것이라는 신앙이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비록 순교의 죽음을 당하게 하셨으나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데 그것이 필요하다고 인정하셨기에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대주재로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호소의 응답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이십니다. 그러므로 공의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성도의 죽음을 보상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원한을 갚아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소리치는 순교자들의 호소를 응답하실 것입니다.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니이까?” 그들은 땅에 거하는 자들에 의해서 정죄되고 그 생명이 빼앗겼습니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원수들에 의해서 순교의 피를 흘렸습니다.

 

이제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며 그 피를 신원해 달라는 큰 호소가 환상 중에 울려 퍼집니다. 개인적인 보복의 차원이 아니라 그들이 생명을 바친 하나님의 말씀의 신실성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인하여 그 진리를 밝혀 달라는 호소입니다. 인류의 적이요 거짓의 전파자들로 죽임을 당한 진상을 밝혀 달라는 간구입니다.

세상을 심판하심으로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를 응답하실 것입니다. 그 나라의 영광 가운데 주님께서 다시 오심으로 밝혀질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민중을 속이는 자가 아니요 기독교가 인민의 아편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진리의 주시요 우주의 주되심이 밝혀질 것입니다.

 

그 순간 인류의 적으로 매도되고 거짓의 앞잡이로 처형된 의인들의 참모습이 입증될 것입니다. 그 순간 그들이 흘린 피는 신원될 것이고 그들을 처형한 자들은 심판될 것입니다.

계시록은 이 기도가 응답되는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의인의 영혼이 드린 단 한 번의 호소가 즉각 응답됨을 기록합니다. 하늘의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를 인하여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너희를 신원하시는 심판을 그에게 명하셨음이라 하더라”(18:20). 큰 성 바벨론의 멸망을 두고 하늘의 음성이 들린 것입니다.

 

그 일 후에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이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의 손에 갚으셨도다”(19:1-2).

 

흰 두루마기의 보상

그 때, 하늘 제단 아래 있는 성도들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될 것입니다. 우선 요한의 환상은 이들에게 보상하시며 대답하시는 음성으로 계속됩니다.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6:11)

여기 여러분이 눈을 크게 뜨고 보아야 할 환상이 있습니다. 귀를 기울이고 분명히 들어야 할 음성이 있습니다.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계시록의 상징 속에서 색깔의 의미는 중요합니다.

 

2절에 의하면 흰색은 승리의 색깔입니다. 원수들은 그들을 죽임으로 그들을 패배자로 여겼으나 대 주재 하나님은 그들을 승리자로 예우하십니다. 미래의 영광에, 궁극적인 승리자의 영광에 들어가리라는 증표로서 흰 두루마기를 그들 각각에게 주십니다. 그들에게는 더 이상 심판이 없다는 위로의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들의 죽음을 속히 갚으실 거룩하고 참되신 대 주재께서 그들의 의와 승리의 증거물로 흰 두루마기를 주십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자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그들에게 주어질 최종 영광의 표지로 흰 두루마기를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호소에 대답해 주십니다. 대주재 하나님께서, 종들의 삶에 최종 권위를 가지신 분께서 대답하십니다.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11)

 

아직 잠깐 동안만 조용히 쉬라.” “어느 때까지 니이까?”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오해하지 마십시오. 산술적인 숫자가 차야만 종말이 도래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 하나님이 정해 놓은 수가 있는데 순교자들이 하나 죽고 둘 죽고, 그렇게 그 수가 마지막 차서 전광판에 수가 다 찼다는 신호가 들어올 때 심판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 말은 종말이 바로 도래하지 않는다는 의미인 동시에 교회가 더 많은 순교를 겪게 될 때가 있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교회를 향한 핍박의 먹구름이 몰려오는 시대에 요한은 살고 있었습니다.

 

때로는 핍박의 먹구름이 실제로 핍박의 빗방울을 뿌리기도 했습니다. 점점 더 심한 비바람이 몰려올 형국 속에 처해 있었습니다. 어느 때까지라는 의문은 그들에게는 급박한 의문이었습니다. 악의 세력과 더불어 한 치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상태에 처한 교회로서는 절박한 의문입니다.

 

그러나 땅에서 성도들의 피를 흘리게 하는 자들의 활동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은 그들에게는 위로가 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죽임을 당한 성도들의 피가 헛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도래의 한 부분으로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알 때 그들이 받을 위로가 얼마나 크겠습니까?

 

어느 때까지 니이까?”라는 의문은 비단 제단 아래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를 인해 죽임을 당한 영혼들의 호소만이 아니라 신실하게 순교자의 삶을 산 모든 성도의 기도의 요점이요 후렴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를 들어 보십시오.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언제까지니이까 주의 종들을 긍휼히 여기소서“(90:13). 다윗의 기도를 들어보십시오. “나의 영혼도 심히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나를 구원하소서“(6:3-4).

신실하게 주의 이름에 소망을 걸고 살았던 성도들이 생의 고비마다 부르짖었던 기도의 요점이 어느 때까지 니이까입니다.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이 돌아와 드린 기도 속에 나오는 후렴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표적이 보이지 아니하며 선지자도 다시 없으며 이런 일이 얼마나 오랠는지 우리 중에 알자도 없나이다 하나님이여 대적이 언제까지 훼방하겠으며 원수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능욕하리이까”(74:9-10).

 

그들이 70년 포로를 살다가 그리던 조국에 돌아왔지만 그들의 눈에 보이는 예루살렘의 모습은 처참했습니다. 성벽은 퇴락해 있었고 성전은 불타 버리고 말았습니다. 재건하려는 그들의 노력을 비웃는 원수들의 핍박 소리만이 높아져 가는 가운데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입니다.

 

이 질문은 피를 바친 순교자들만의 기도가 아니라 땅에서 드려지는 성도들의 계속되는 기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 대답이 있습니다. 불의한 재판관으로 인해 시달리는 과부의 비유 속에 주님이 하시는 대답을 들어 보십시오.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18:6~8) 문제는 정한 시간에 갚아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때 믿음을 가지고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않겠느냐” “오래 기다리게 하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권위로써 말하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주님의 대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언제까지 입니까?”라고 부르짖는 기도의 제목이 있습니까?

다시 한 번 계시록 맨 마지막의 보증을 들어 봅시다.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가 속히 오셔서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성도들을 신원하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사도요한과 함께 고백합시다. 멀지 않아 그가 오십니다. 그가 곧 오실 것입니다. 그 나라가 이 땅에 임할 것입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라는 우리의 기도가 멀지 않아 응답될 것입니다.

 

토요특별기도의 자리를 찾고 주일 계시록 말씀을 사모하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오십니다.”-“마란 아타!” 그러므로 성도들은 쉬지 않고 기도합니다. 주님! 오시옵소서” - “마라나 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