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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근두목사 설교

    영상주소
    http://vod.upcweb.net/pastor/2018_1223_정근두.mp4
    성경본문
    누가복음 2:1-7
    설교일
    2018-12-23

구유에 누인 아기

누가복음 2:1-7

구주대망 20181223일 주일, 찬송 105, 108, 112

오늘 초대를 받아 이 예배의 자리에 오신 이웃 여러분, 그리고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성탄절은 우리들을 하나님의 아들로 삼으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신 축제일입니다. 구원자 예수 탄생의 큰 기쁨이 오늘 예배에 나오신 여러분의 마음에 풍성하기를 바랍니다.

 

성탄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된 사건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셨다”(4:4)고 말씀합니다. 오늘 우리는 그 하나님의 약속 성취의 이야기를 읽어드린 성경을 통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읽은 성경은 어떻게 이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록하고 있습니까? 저자 누가는 어머니 마리아의 가슴속에 간직해 온 예수님의 이야기를 간단히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먼저 역사적인 배경부터 살펴봅시다.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1, 2)

 

당대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인 로마의 황제인 가이사 아구스도의 명령과 함께 본문은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는 권력에 오르기까지는 상당히 거칠었지만, 권좌에 오른 다음에는 원만한 통치를 한 임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속국들의 입장을 이해하고 관용하면서 로마를 다스렸습니다.

 

무려 41년간 그가 황제로 있는 동안 소위 로마의 평화, 팍스 로마나(Pax Romana) 를 만끽한 시대입니다. 탁월한 행정가로서 그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도 여러 가지 개혁 조치가 시행되고 지속되었습니다.

 

그가 황제가 된 다음에 공정한 세금을 매길 기초 자료로서 인구 조사를 했습니다. 그것이 여기 1절에 나와 있는 천하로 다 호적하라는 명령입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인구센서스입니다. 하지만 요즈음 인구센서스처럼 조사원들이 전국을 일시에 덮치는 대신에 그때는 모든 사람이 호적 하러 각각 고향으로 가는 방식입니다.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는 구절은 인구센서스가 실시될 당시 그 지역의 행정 책임을 황제로부터 위임받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직무를 수행하고 있었다고 밝히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역사에 뿌리를 내린 종교입니다.

 

이 글을 쓴 누가는 예수 탄생 사건을 세계사 속에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는 지금 우리 입장에서 보면 극히 타당한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이제 성탄절은 지구촌의 축제로 자리 잡고 12월이 오기 전부터 문명사회에는 캐롤이 울려 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온 세상이 그가 오신 것을 중심해서 세계의 연대를 산출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몇 년 생이십니까? 그 연도의 중심에 예수님이 있습니다.

 

지금은 이론의 여지가 없이 예수님이 역사의 주인임을 다 수긍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세상의 여기저기에는 아직도 이 서력기원을 쓰고 있지 않는 곳이 있다손 치더라도 이미 판도는 바뀌어졌습니다. 주님이 오신 것을 중심해서 세상의 역사가 꼽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 속에서 보면 이 기록은 예외적입니다. 베들레헴 예수 탄생 사건을 다룬 기사가 한 줄도 없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는 그의 탄생뿐 아니라 그의 사역과, 그의 십자가의 죽음이나 부활조차도 보도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헤롯 궁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로 가십거리를 만드는 세상 기자들의 눈에는 예루살렘 예수 처형 사건은, 로마의 통치 아래 살던 속국민이 당하는 일상사에 지나지 아니했습니다.

 

십자가 처형은 보도할 가치가 없었습니다. 그 시대에 형장에서 몇 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일상사였습니다. 세상이 시끄러울 때 그렇게 처형되는 사람이야 항상 있기 마련입니다. 게다가 그의 부활은 더 우스꽝스러운 소문에 불과했습니다.

 

세상의 어떤 역사가도 이 사건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던 그 때에, 십자가 사건이 20년이 채 되지 않은 그 때에, 누가는 단연 이 사건에서 특종을 발견했습니다. 이 사건이야말로 앞으로 인류 역사를 판가름할 사건인 것을 그는 알아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 사건의 전모를 파악하기 위해서 관련된 사람들을 만나 보았습니다. 말하자면 리서치를 한 것입니다. 나름대로의 전모를 이해한 다음에, 차례대로 이 사건을 서술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습니다.

 

역사가 누가의 통찰력을 한 번 살펴보십시오. 그는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세계사 속에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대단한 역사적인 안목입니다.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지중해를 중심한 세상, 당시의 문명권은 모두 로마의 통치 아래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가이사의 명령은 갈릴리 나사렛, 유대 산중 할 것 없이 다 미쳤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여기서 하나님을 역사의 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천하를 통일한 로마의 황제는 하늘의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하나의 하수인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는 분명 정치적인 이유가 있어서 인구센서스를 실시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보다 더 높으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서 밖에 사용되고 있지를 않습니다. 인구 조사의 칙령은 세계 역사의 정황 속에 예수 사건을 접목시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황제의 칙령도 다만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과 목적을 이루는데 쓰이고 있습니다. 여기 세상을 살아가면서 역사의 의미를 묻는 우리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위로가 있습니다. 오늘 대한민국 역사의 흐름을 두고 성도들이 묵상해야 하는 주제입니다.

 

어떤 절대 군주도 하늘 위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거역할 수가 없습니다. 절대 군주 위에 전능하신 주재자가 계십니다. 어떤 권력도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일 뿐입니다.

 

가이사 아구스도의 명령은 갈릴리 나사렛에 살고 있었던 요셉과 마리아를 움직였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황제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던 평범한 소시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다루는데 있어서 가이사 아구스도는 무의식적으로 시중을 들고 있을 뿐입니다.

 

수백 년 전에 예언된 그 장소에서 예수님이 태어나도록 돕는 일에 사용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이 황제의 칙령이 없었던들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 사는 요셉이 만삭의 마리아를 데리고, 갈릴리에서 유대 땅 베들레헴까지, 갈 리가 없습니다.

 

저기, 전라도 해남에 살고 있었던 한 약혼부부가 고향에 가서 호적하라는 명령이 없었다면 충청도 청주까지 올라갔을 리가 없습니다. 법령이 바뀔 때마다 여러분의 이해관계가 달려 있지만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하는 방향으로 역사는 궁극적으로 흘러갈 것입니다.

 

여러 가지 법령이 바뀔 때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 영향을 끼칩니다. 교육법이 바뀌면 당장 여러분의 아이들의 진로와 관계가 있습니다. 학생노동인권 조항이 굼틀거리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는 일들이 세상에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세상 모든 권력은 그 나름대로의 의도를 가지고, 오늘도 법을 제정하고 공포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소용될 뿐입니다. 천하 모든 통치자는 하나님의 때와 시기를 변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 누가는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하는 기록을 통해서 아기 예수 탄생의 우주적인 의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아이는 가이사 아구스도의 명령을 배경으로 하고 태어나는 아이입니다.

 

누가는 소위 객관적인 입장에서 역사 서술을 하는 자가 아닙니다. 누가는 지금 한 신앙인의 안목을 가지고 예수 탄생을 저울질하고 있습니다. 짐짓 당시에 온 세상을 다스리는 로마의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를 동원해서 예수 탄생을 밝히는 것은 그가 온 세상의 구주로 오신 분임을 신앙으로 고백하는 방법입니다.

 

그 사실이 오늘 본문 1절에는 암시적으로만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10절을 보면 좀 더 분명히 선포되고 있습니다.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10) 이 소식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30절을 보면 더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30)

 

그는 이방의 빛인 동시에 이스라엘의 영광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이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놀라운 신앙의 안목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이 신앙의 관점이 그의 역사가로서의 진면목을 세워주고 있습니다.

 

모든 사건들을 빠짐없이 다 기록해 놓는다고 위대한 역사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건들 가운데서 중요한 사건을 고를 줄 아는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그 의미를 밝히 설명해 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세상에 오셔서, 아기로 태어난 그분은 이 예배의 자리에 나아온 여러분 모두와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2천 년 전 세상에 태어나신 그분은 이 세상에 호흡하고 있는 모든 이들과 필연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영광인 동시에 모든 이방을 비추는 빛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예배에 함께 찬양하는 여러분들뿐만 아니라 이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지 못한 모든 인생의 운명과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기로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여러분의 창조주요 여러분의 구원자십니다. 그리고 장차 여러분의 심판주가 되실 것입니다. 한날 모든 무릎이 예수의 이름 앞에 꿇고, 모든 입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시인할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다음 장면으로 가보십시오. 4절과 5절의 말씀입니다. 황제의 칙령을 따라서 고향으로 가는 발걸음 속에는 요셉과 마리아의 발걸음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이미 마리아가 잉태되었더라.”(4~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가가 이 기록 속에 넌지시 강조하는 바를 알아채어야만 이름 값하는 신앙공동체의 일원입니다. 누가는 지금 다윗의 집, 베들레헴, 다윗의 동네라는 말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예배의 자리에 초대받아 처음 나온 분들에게는 별다른 의미가 없는 단어들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자라면서 구약 성경을 들어온 이스라엘 사람들의 귀에는 익숙한 말들입니다. 다윗의 집, 베들레헴, 다윗의 동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있어야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아이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난 약속된 메시야라는 이야기를, 구원자라는 이야기를 여기서 넌지시 암시하고 있습니다.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 살던 요셉과 마리아가 유대 베들레헴이라고 하는 다윗의 동네에 올라가는 발자국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 성취가 한 걸음씩 한 걸음씩 가까워지는 것을 알아채야 합니다.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 찾아간 하나님의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말했습니다.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서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1:31~33)

 

누가는 짐짓 태어나실 이 아기야말로 약속 성취로 오신 메시야임을 알리기 위해서 분위기를 잡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집, 베들레헴, 다윗의 동네, 이런 단어를 계속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에 소망을 걸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벌써 이것이야말로 약속 성취라는 것을 감지할 수 있도록 합니다.

 

아마 구약 예언에 정통한 사람이라고 하면 미가의 예언을 떠올릴 법 합니다. 그러나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의 여러 족속 가운데서 작은 족속이지만,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다. 그의 기원은 아득한 옛날, 태초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5:2)

 

베들레헴은 작은 동네이지만 이스라엘 역사상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모압에서 룻이 돌아온 마을이요 거기서 보아스와 결혼하여 다윗의 증조모가 됩니다. 거기는 다윗이 태어난 마을이요 이제 그 다윗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가 예언 성취로 태어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때 베들레헴에 태어나신 분은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서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 성취로 오셔서 여러분과 저를 하나님의 아들들로 삼으셨습니다.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은 또 한 번 약속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때가 차매 그 아들을 구주로 보내신 그 동일한 하나님이 또 한 번 때가 차면 그 아들을 심판주로 보내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탄절을 기다리는 것은 옛날이야기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옛날에 있었던 일을 살펴보려는 것이 아니라 그 옛날 사건이 오늘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를 알기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약속을 따라 그가 오셔서 구주가 되신 분은, 약속을 따라서 다시 오실 때에 우리를 심판하실 분이시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기회가 되어야만 합니다.

 

예수께서 그의 능력으로 천사들과 함께 불꽃 가운데 오실 그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에 대해서 들어서 알고 있지만 복음에 대해서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역사는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것이 아닙니다. 작년에 기쁘다 구주 오셨네하고 노래 불렀는데 올해도 또 한 번 반복되는, 내년에도 또 반복되는, 돌고 도는 것이 역사가 아닙니다.

 

역사는 하나님이 쏘신 화살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목표를 향해서 날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약속에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약속을 따라서 세상에 구원자를 보내신 절기가 크리스마스라고 하면, 약속을 따라서 세상에 심판자 보내실 최후의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 날을 준비하십시오? 복된 성탄을 축하하면서 내일 오실 그분의 영광을 기다리십시오.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영광의 날을 대망하시기를 바랍니다. 구주 대망 2019년이 이제 곧 밝아오고 있습니다.

 

마지막 장면 탄생, 그 자체를 살펴보십시오.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7)

 

우선 그의 출생이 여느 아이와 같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가 잉태된 것은 기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셨기에 남자를 알지 못한 처녀에게 기적적인 잉태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출생은 여느 아이들과 같이 때가 찼을 때 어머니가 분만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그의 잉태가 기적이라고 하면 사람의 아들이기에 그의 출생은 자연적인 분만 절차를 거치고 있습니다.

 

왜 그 만삭된 아내를 데리고 베들레헴으로 올라갔는지 여러분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여자가 호적하기 위해서 직접 출두해야 했는지, 아니면 남자가 가서 대표로 호적을 해도 되었지만 같이 데리고 올라갔는지, 여러분 어느 쪽이라고 생각합니까?

 

헬라어 원문은 오히려 만삭할 때가 되었기 때문에 같이 올라갔다는 극적인 뉘앙스를 풍겨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이 낳을 때가 되니까 마리아 혼자 자기 동네 나사렛에 두고 갈 수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집에 데려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만삭이 되었기 때문에 여자를 그대로 두고 갈 수 없었던 상황이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그 따가운 눈초리에서부터, 비난의 이야기에서부터, 남편으로서 마리아를 보호하기 위해서 함께 올라갔다고 보는 것이 어쩌면 무리 없는 생각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아주 간결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을 낳았다. 강보로 쌌다. 구유에 뉘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세 가지 동사를 가지고 아주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록이 간결한 만큼 비천한 상황 속에 오신 그 구주의 모습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 하였으나.”(1:9~11)

 

어디든 사람들이 몰려드는 곳에서는 방 잡기가 쉽지는 않죠? 한 곳으로 일시에 몰려들다 보면 방 값이 몇 배씩 뛰어오르게 됩니다. 모두 다 안락한 곳을 원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가난한 약혼자로서는 방을 차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예배자 여러분, 보십시오! 태어나실 때부터 인간 세상에 몸 둘 바를 찾지 못하신 분이 여러분과 저의 구주이십니다. 세상을 인해서 거절당하실 앞날을 미리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단지 그 날 밤 여인숙에 있을 자리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세상 어느 곳에도 그가 발붙일 자리를 얻지 못할 그 앞날을 내어다보는 기록처럼 보입니다.

 

성탄연극 속에서 보면 그 구유는 아름답습니다. 조명을 하고 장식을 해 놓으면 다 그럴듯합니다. 그러나 실제 상황은 그렇게 낭만적인 상황이 아닙니다. 목가적인 분위기도 아닙니다. 연극으로 보면 괜찮은 배경이 됩니다. 그러나 실제 상황은 그렇게 멋있는 분위기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결혼을 했는데, 방을 하나 제대로 구하지 못해 짐승들의 마굿간에서 첫 아들을 낳았다고 하면 평생 가슴에 못 자국으로 남을 것입니다. 그 아이를 볼 때마다 늘 미안해 할 것입니다. 아들이 다 자라서 결혼시킬 때 주례자 앞에 서 있는 아들을 보면서 저 아이 가졌을 때 내가 너무 가난해 가지고 기저귀 하나 제대로 마련해 주지 못했지라고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비천한 상황 속에 태어난 구주 예수님의 이야기가 여러분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크리스마스 전야를 밝히는, 축하하는 연극 무대를 그럴듯하게 꾸미기 위한 배경으로서 이 이야기가 기록되어져 있겠습니까?

 

많은 사람을 섬기기로 세상에 오신 그분의 출발점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바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을 섬기러 오셨기에 그는 모든 사람보다 낮은 자리에서 그 생을 시작하셔야만 했습니다. 섬김은 자신을 낮출 때에 가능합니다.

 

서양 사람들은 이런 고백을 합니다. "We are saved to serve." "우리는 섬기려고 구원받았다"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해서 구원받은 자들이라고 하면 여러분이 어디에서 여러분의 삶의 터전을 찾아야 할 지 생각해 보셔야만 합니다.

 

여러분이 정말 섬기기 위해서, 구주를 대신해서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서 여러분이 구원받은 자들이라고 하면 여러분의 생의 시작이 어디가 되어야 할 지 여러분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섬기는 첫 걸음은 낮아지는데 있습니다. 섬기는 첫 걸음은 포기하는데 있습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기득권의 포기가 없으면 새로운 섬김이 불가능합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금 주어져 있는, 내가 미리 잡고 있는 그 방을 포기하지 않는 한 주님은 여전히 마구간에서 밖에 태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해마다 연례행사로서가 아니라 우리가 가진 것을 무언가 구체적으로 포기하면서 이 성탄을 맞이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울산교회는 이번 성탄절 헌금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일에 사용하려고 합니다. 올해는 가까이 우리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 멀리 알바니아의 가난한 신자들을 위해서, 그리고 오늘 오시면서 달라진 것을 확인한 이웃과 함께 하는 공간 리모델링 비용을 위해서 사용하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는 본래 부유하던 자였습니다. 본래부터 갈 곳이 없어서 나사렛에 오신 분이 아닙니다. 본래부터 사글세 방 밖에 마련할 수가 없어서, 아니 장기방조차 마련할 수 없어서, 그것도 안 되어서 마굿간에서 출발한 것이 아닙니다.

 

본래 그는 부유하셨던 분이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8:9) 본래 부요하시던 분이 가난하게 되심은 우리를 부요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당신이 본래의 영광을 포기하지 않는 한 우리는 여전히 죄악 가운데서 비참하게 살아야만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저 하나님 없이 세상 속에, 비참 속에 살아야만 했기 때문에 그는 하늘의 영광을 포기하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그가 짐승의 밥그릇, 구유에 누임은 우리로 하여금 왕좌에 앉히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되신 것은 사람의 아들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려 하심입니다. 그가 구유에 누인 것은 여러분과 저로 하여금 왕좌에 앉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영광을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여러분의 삶은 다른 사람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오늘을 살고 있는 여러분의 삶이 주위에 있는 사람에게 어떤 의미가 되고 있습니까? 다가오는 성탄절은 사랑을 나누는 절기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나누는 사랑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듭니다.

 

기득권을 포기하는 곳에, 희생하는 곳에 기쁨과 평강이 찾아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해서 구원받았습니다. 하늘 영광을 포기하고 낮고 천한 구유에 그 몸을 누이신 구주를 본받읍시다. 부족하지만 우리도 가진 것을 포기할 때에 이웃을 섬길 수 있습니다.

 

이틀 후이면 구주 탄생을 축하하는 예배에 나아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세상을 사는 의미를 새롭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가 구유에 뉘었다는 이야기는 성탄 연극을 하기 위한 배경 제공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을 살아갈 때에 여러분의 삶의 자리에 대해서 진지하게 점검하도록 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섬김의 삶을 살기 위해 여러분은 무엇을 포기해야 하며 어디서 출발해야 할지 생각하는 이번 성탄 축하 예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다 같이 기도합시다.

거룩하신 주님. 우리는 주님의 사역의 혜택을 받은 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것을 포기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받을 수 있는 대접을 포기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영광을 포기하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구속의 혜택을 받았기 때문에 더 나은 자리의 유혹을 포기하고 오늘도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고난을 받는 자리에 서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받는 수모를 회피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그날에 주의 영광에 동참하는 것 외에는 다른 소망을 품지 않게 하옵소서. 그 날까지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섬긴 주님을 따라 섬김의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오늘 봉사신청서를 작정할 때도 우리의 신앙이 묻어나게 하여주십시오. 섬기러 오신 주님 마음으로 작정하게 하여 주십시오. 우리를 구원하고 섬기려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