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정근두목사 설교

    영상주소
    http://vod.upcweb.net/pastor/2019_0210_정근두.mp4
    성경본문
    계시록 11:1-2
    설교일
    2019-02-10

성전 측량

계시록 11:1-2

구주대망 2019210일 주일 찬송 20, 150, 492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여섯째 나팔과 일곱째 나팔 사이의 막간극을 살피고 있습니다. 막간극의 첫 번째는 요한이 작은 책을 받아먹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오늘 두 번째 환상은 독창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유대 묵시 문학의 상징과 사상이 반영되는 부분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계시록 11장은 계시록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계시록이 읽기 어려운 책이라는 일반적 평가가 왜 나왔는가를 실감나게 하는 부분입니다. 계시록 가운데서 가장 어려운 동시에 가장 중요한 부분의 하나이기에 지혜와 계시의 영, 분별의 영이 필요합니다.

 

다시금 여러분의 도움을 요청합니다. 이전 어느 때 보다도 여러분 앞에 선 설교자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토요새벽에 나오셔서 함께 기도해 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지금부터 계시록 마지막,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볼 때까지 막힘이 없이 설교를 할 수 있도록 기도로 도와주십시오.

 

우리 시대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이 되도록 설교자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하나님께서 제게 요한계시록을 통하여 말씀을 주시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그 말씀이 여러분에게 큰 확신으로 전달되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계시록을 빙자해서 성도들을 넘어뜨리는 이단 사설을 격파하는 하나님의 강력한 도구가 되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시대마다 계속 이런 종류의 거짓 가르침이 하나님의 교회를 미혹시킬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반드시 살펴야 합니다. ‘매우 난해한책이라고 제쳐 두는 것은 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낯설고 어려운 느낌 때문에 읽기조차 단념하는 것은 신랑을 맞이하는 신부의 태도로는 합당치 않습니다.

 

신랑의 얼굴에 가면을 씌워 둔 채로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오실 신랑을 맞이할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책임 회피일 뿐입니다. 우리는 성경 계시 전체를 완성시키는 요한 계시록을 살필 의무가 있는 동시에 오시고 있는 그 분을 대망할 특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선 11장 전체를 살펴봅시다. 1-2절은 성전을 측량하는 장면입니다. 3-6절에는 두 증인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7-10절에는 짐승의 출현과 그 짐승의 일시적 승리의 결과로 두 증인이 죽음을 당합니다. 11-13절은 다시 살아난 두 증인으로 인하여 회개가 이루어지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14-19절은 그리스도의 궁극적인 승리의 첫 묘사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14-19절의 마지막 사건은 막간극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 때 나타난 환상이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막간극 제2장면을 요약하면 1-2절은 서론이고 3-13절은 본론입니다. 오늘 말씀은 1-2절의 성전 측량에 한정하겠습니다.

 

성전측량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되 성전바깥 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은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11:1,2)

 

우선 환상 그 자체를 살펴봅시다. 이 막간극에서 요한은 더 이상 관람객이 아닙니다. 앞부분에서는 책을 갖다 먹는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여기서도 지팡이 같은 갈대를 받아서 성전을 측량하도록 배역을 맡습니다.

 

우선 요한이 받은 지팡이 같은 갈대가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이 글을 처음 읽었던 독자들에게는 달리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는 설명이 필요합니다.

 

당시 사회에서는 측량하는 도구로서 갈대를 사용하였습니다. 넓은 땅을 측량할 때는 밧줄을 사용했지만 대개는 갈대를 이용해서 측량을 했습니다. 요한이 받은 갈대는 길이가 약 8m 정도 되는 막대기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요한은 지팡이 같은 측량용 갈대를 받으면서, 동시에 무엇을 측량해야 하는지 지시를 받습니다.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되 성전 밖 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갈대로 측량해야 할 부분과 측량하지 말아야 할 부분을 구분해서 명령합니다.

 

, 그러면 요한이 본 환상 중의 성전 구조를 살펴봅시다. 본래 이스라엘 성전은 안 뜰과 바깥 뜰, 두 부분으로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한 당시 예루살렘에 건축된 성전은 네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바깥에서부터 안으로 들어가면 맨 먼저 이방인의 뜰이 있습니다. 이 구역에는 그 이름 그대로 모든 이방인들이 접근할 수 있습니다. 이방인의 뜰을 가로질러 가면 낮은 담이 있고 이 경계를 넘어서는 이방인은 죽임을 당할 것임이라는 경고문이 있음직한 구역이 나옵니다.

 

그곳이 여인들의 뜰입니다. 이스라엘 여자들이 예배하는 구역입니다. 이스라엘 여자들은 이방인 남자들보다 조금 더 나은 대접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이 이스라엘 남자라고 한다면 여인들의 구역을 지나 다음 구역까지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 곳은 남자들의 뜰입니다. 그리고 나면 마지막 구역이 있습니다. 제사장들의 뜰로 불리는 곳으로 거기는 이스라엘 남자 중 레위지파 제사장들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놋으로 만든 번제 단이 있고, 제비를 뽑아 제사장들만 들어갈 수 있는 성소 안에는 금으로 만든 향단이 있습니다.

 

, 그러면 이런 구획을 머리에 그려두고 요한에게 명해진 측량의 한계를 이해해 보십시오.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되 성전 밖 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지성소와 성소를 포함한 성전의 일부만 측량하고 성전 밖 마당, , 이방인의 뜰은 측량하지 말라고 명합니다.

 

측량의 이유

그러면 측량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구약 예언을 보면 몇몇 곳에 측량하는 환상이 나옵니다. 그런 부분을 염두에 두고 하늘의 음성이 요한에게 왜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라고 하는지 그 이유를 살펴봅시다.

 

측량을 하는 이유를 대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건축을 하기 위한 준비로써 측량을 합니다. 아파트나 빌라를 짓는 현장을 가보면 측량을 하고 땅에다 선을 친 후 공사를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신축 뿐 아니라 복구를 위한 준비로써 측량을 하기도 하는 것을 성경에서 읽어볼 수 있습니다(2:1-5, 40:-43:).

 

측량을 하는 두 번째 이유는 파괴하거나 제거하기 위한 준비입니다. 여호와께서 처녀 시온의 성을 헐기로 결심하시고 줄을 띠고 훼파함에서 손을 거두지 아니하사 성과 곽으로 통곡하게 하셨으매 그들이 함께 쇠하였도다.”(2: 8, 참조 왕하 21:13, 34:11).

 

재개발 사업을 하는 곳을 가보면 붉은 페인트를 칠한 그 지점까지는 파괴 할 지역으로 정해 놓습니다. 도로 공사 현장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말뚝을 박고 붉은 띠를 매어서 측량한 경계를 표시합니다. 형질을 변경시키거나 공사를 할 곳에서도 볼 수 있는 표시입니다.

 

그러나 본문에 나오는 측량의 목적은 복구나 신축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또한 파괴나 제거를 위한 준비도 아닙니다. 측량을 하는 제 3의 이유는 보호와 보존을 위함입니다. 기념할 만한 건물이든지 보존할 만한 수목 주위를 측량해서 한계를 설정하는 것을 지금도 볼 수 있습니다.

 

그 건물이나 수목을 보존하기 위해 한계를 설정합니다. 지금 요한이 갈대 측량자를 들고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는 것은 그들을 보호하고 보존하기 위해서입니다. 성전 밖 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버려두라는 것은 성전 측량의 목적을 역으로 설명해 줍니다.

 

성전 바깥 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은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측량을 금한 성전 밖 마당은 이방인에게 짓밟히게 됩니다. 그러나 요한이 측량한 지역은 이방인의 짓밟힘으로부터 보호되고 보존될 것입니다.

 

환상의 의미

지금껏 우리는 환상 그 자체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 그 환상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상징이 가리키는 바가 무엇입니까? 환상 중에 요한이 본 것은 지상의 예루살렘, 지상의 성전, 지상의 성소, 그리고 지상의 마당입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은 무엇을 상징하고 있습니까? 여러 가지의 해석이 있습니다. 그러나 크게 대별하면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성전, 제단, 경배하는 자들, 거룩한 성들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입장입니다.

 

세대주의자들은 성경에 엄격하기 때문에 문자적으로 지금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유대인 성전이 회복될 것에 관한 예언으로 봅니다. “, 보라 2천년동안 나라를 잃고 살던 유대인이 이제 국가를 이루지 않았느냐? 머지않아 성전이 재건되고 제사 의식이 회복될 것이다.” 그들은 확신을 가지고 주장합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측량의 목적은 보호와 보존이라기보다는 복구로 보아야 타당할 것입니다.

 

아주 철저히 문자적으로 보는 입장과는 달리 어느 정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입장이 있습니다. 이들은 요한이 본 환상의 의미는 장소의 회복이라기보다는 유대 민족의 보존과 궁극적인 구원에 관한 예언이라고 생각합니다.

 

민족으로서 유대인은 이방의 압제 아래 넘겨졌으나 남은 유대인 신자는 보존되고 회복된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로마서에서 고민했던 동족 이스라엘에 대한 고민이 풀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문자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상징적으로 이해합니다. 성전과 제단,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은 모든 민족으로 구성된 전 기독교 공동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계시록을 전체적으로 살펴 볼 때 성전은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된 메시야 공동체를 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저는 111-2절의 성전 측량의 의미를 72-3절의 인침의 기능과 동일하게 간주하고 있습니다.

 

7장에 나오는 막간극과 11장에 나오는 막간극은 그런 의미에서 서로 통하고 있습니다. 7장에서는 인을 치는 일이 있고 그 후에 큰 환난에서 부터 통과한 무리들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11장에서도 먼저 성전을 측량하는 일이 있고 나서 그들이 당하게 될 환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7장과 11장은 모두 막간극으로서 일곱째 인이 떼어지므로 써 사건이 시작되고 또한 일곱째 나팔이 울려 퍼짐으로 심판이 절정에 다다릅니다. 다른 상징을 통해서 동일한 사실을 강조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섯째 인과 일곱째 인 사이의 막간극이나 여섯째 나팔과 일곱째 나팔 사이의 막간극의 기능이 같다고 봅니다. 도래할 극심한 환난의 때를 보여주기 전에 환난 중에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기 위해 그들의 보호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도들의 궁극적 구원

요한은 이 환상을 통해서 당시의 극심한 핍박 중에 있던 성도들을 위로하기 원했습니다. 동시에 성령께서는 큰 환난의 날을 앞둔 성도들의 궁극적인 구원을 확신시키기를 원합니다.

 

이마에 인침을 당한 성도들은 결코 멸망하지 않는 것처럼 측량한 범위 내에 들어온 성도들은 결코 이방인에게 짓밟히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입니다. 극심한 핍박의 소용돌이에서 하나님께서 그 신실한 자들을 보존하실 것을 보여 주십니다.

 

하나님의 성전,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은 동일한 것을 지칭하는 각기 다른 상징입니다. 그 중심에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을 향해 훈계하고 있습니다(고전 3:16-17).

 

그들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에서도 동일한 진리를 분명히 선언합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니라.”(고후 6:16).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뿐만 아니라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도 동일한 진리를 강조합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2:20-22)

 

사도 베드로 역시 하나님의 백성을 신령한 집으로 지어져 가는 산돌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 2:5).

 

지금 요한이 환상 중에 갈대로 측량하는 성전은 바로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전부를 가리키는 상징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으로 측량을 하므로 써 하나님의 백성이 113절 이하에 나오는 무서운 시련의 시기에 보존될 것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환상 속에 나오는 제단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제단 역시 그리스도의 교회를 가리킵니다. 특히 여기서는 그리스도인의 봉사의 희생적 성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그 나라를 위해서 희생적으로 봉사하는 모든 자들은 하나님께서 측량하여 직접 살피시고 보호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가오는 큰 환난으로 부터 자기를 희생적으로 섬기는 모든 백성들을 직접 돌보실 것입니다.

 

요한이 측량한 제 3의 대상은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입니다. 엄격히 이야기하면 사람을 측량한다는 것은 조금 이상한 표현입니다. 그러나 측량한다는 것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고 진짜 측량하고자 하는 것은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이라는 것이 이야기의 본질입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백성의 고유적 성격을 보여주기 위해 또 다른 상징을 사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경배하는 자들이라고 한 이유는 교회는 그 본질 상 경배하는 무리들임을 보여 줍니다.

 

교회는 예배하는 공동체입니다. 이것은 다른 어떤 기능보다도 먼저 강조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나면 가장 첫째로 두어야 하는 의무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예배하는 공동체로서의 역할은 3절 이후에 나오는 증거 하는 공동체로서의 역할보다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공동체를 아끼십니다. 극심한 재난의 날에 그들을 아끼실 것입니다. 악행 하는 자들과 핍박하는 세상에 임하는 심판 때에도 하나님의 참된 백성 - 예배하는 공동체는 보호될 것입니다.

 

환난 속에서의 보호

물론 이것은 성도들은 아무런 어려움도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경은 성도이기에 고난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구약시대부터 신약시대에 이르기까지 성도들은 아무도 그런 삶을 살지 아니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성도이기에 극심한 환난을 당해야 했습니다. 성도들도 극심한 환난을 당할 것이지만 그러나 그들은 멸망되지 않고 영원한 파멸에서 부터 보호받게 될 것입니다. 성도들은 때로는 순교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상황 속에서도 그들이 사랑하고 섬기던 주님에 대한 신앙을 잃지 아니했습니다.

 

하나님의 측량권역 내에 들어간다는 것은 세상이 고달파질 때 믿는 성도들에게는 먹고 마실 것들이 풍성히 넘치리라는 약속이 아닙니다. 세상에 재난이 쏟아 부어질 때에 여러분도 동일한 환난 속에 빠져 들어갈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보호가 있으리라는 것이 성경의 말씀입니다. 때로는 순교자도 생길 것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는 결코 파멸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역사 속에 그 자취를 감출 뻔 한 일이 종종 있었으나 메시야가 오시기까지 그들을 지키셨던 하나님의 손길을 기억하십니까? 에스더를 통해 그 민족을 구출하셨던 것을 읽어보지 아니했습니까? 이스라엘 민족을 모두 죽이기로 한 칙령이 내렸으나 그것을 뒤엎는 반전의 역사가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교회는 극심한 환난 속에 빠져 들지만 예배하는 공동체는 이 땅에서 사라지지 아니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한 여러분은 세상에 의해서 분쇄되지 아니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그리스도의 보혈에 근거한 희생이 있다면 여러분은 결코 버림을 당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그리스도의 영으로 예배하고 하나님의 진리로 경배하는 한 여러분은 세상에 내어줌을 당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오직) 성전 바깥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은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하나님의 보호는 밖의 마당에 까지 미치지는 않습니다. 겉으로는 교회에 속하여 성도인 척하지만 참된 성도가 아닌 자들은 보호를 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 날 엄습해 오는 두려움에서 부터 설 수 있는 자가 되지 못합니다.

 

그 마음의 중심으로 그리스도와 자신이 어떤 관계가 맺어져 있는지를 아는 자만이 어떤 환난과 풍파 속에서도 오실 주님에 대한 소망이 그 마음에 분명할 것입니다. 세상은 이름뿐인 신자들을 짓밟지만 결코 진실한 하나님의 백성을 유린하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세상적인 교인들은 세상적인 것을 환영합니다. 세상적인 사고방식에 동조하고 세상과 짝합니다. 세상은 거짓된 교회를 침노하고 정복하고 그 소유로 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그들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마흔 두 달 동안

그러면 얼마동안 이런 상태가 계속됩니까? 마흔 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문자적으로 취할 것인지 상징적으로 취할 것인지 또 다시 선택을 하여야 합니다. 계시록에 나오는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마흔 두 달, 그리고 1260일은 모두 같은 기간을 의미합니다.

 

햇수로 말한 것을 달수와 날수로 풀어보면 모두 같은 기간입니다. 저는 계시록에 나오는 다른 숫자와 같이 상징적인 의미로 취하고자 합니다. 악이 기승을 부리는 마지막 기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교회는 지금껏 세상에서 핍박을 받아왔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승천 이후 재림까지를 말세라고 말합니다. 마지막 시대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항상 환난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가 가르쳤던 성도들을 향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미루어 초대 교회 성도들도 많은 환난을 통과한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어느 시대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신실하게 살고자 했던 성도 중 환난을 겪지 않았던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핍박 없이 살고 있다면 여러분은 지금 세상과 어깨동무하고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세상과 어울려 지내고자 한다면 세상은 여러분을 핍박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신실하게 살고자 할 때 우리는 세상이 우리의 목을 조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승천 이후 지금까지는 말세이고 성도들이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을 살펴보면 재난의 시작이라는 기간과 큰 환난의 날이 구분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지금껏 교회가 걸어 온 길은 재난의 시작에 동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기 직전 큰 환난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날에 우리를 보호해 주실 것이라는 약속이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 속에 있습니다. 세상은 계속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해 왔으나 마지막 한 기간이 되면 그 정도나 양상에 있어서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핍박이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환난이 있을 것이라는 의미에서는 저는 휴거를 거론하는 사람들과 입장을 같이 합니다. 그 환난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에 관해서는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히 앞의 시대와는 전혀 비교조차 될 수 없는 환난의 때가 있다는 것을 저는 말해야 합니다.

 

성경은 재난의 시작과 큰 환난의 날을 말하고 있습니다. 택한 자들을 위해서 그 날을 감하지 아니하면 아무 육체라도 구원을 얻을 수 없는 그런 환난의 기간이 있다는 것을 성경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갑자기 극심하고 특이하게, 비일상적으로 핍박을 해올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간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마흔 두 달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악랄하게 핍박하지만 정한 기간 동안만 허용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이 그 기간을 설정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을 위해 그 기간을 감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이 극심한 환난의 날들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공중에 들림 받아 환난을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가시밭에 백합화 같이 향기를 날리게 될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환난의 날에 함께 세상에 있을 것입니다.

 

환난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증거를 지킬 자들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 환난 가운데서도 그리스도의 증거를 위해서 우리는 세상에 남겨져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날들을 위해 준비하고 있습니까? 주님은 이 교훈을 말씀하시면서 기도로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이 모든 일들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깨어 있으라

그 날 성도들을 잠식할 위험들에 대해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방탕함과 술 취함, 생활의 염려로 그 날이 덫과 같이 임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극과 극을 달리는 양상이 나타날 것입니다. 곡식 값은 천정부지로 뛰는데 포도주와 감람유는 해치 말라 - 이것이 말세의 특징입니다.

 

풍요로운 사람들은 더욱 풍요로워질 것이고 그러나 어려운 계층은 더욱 어려운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말세에는 빈익빈 부익부의 격차가 훨씬 더 심해질 것입니다. 한편에서는 세상을 즐기느라고,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생활의 염려로 주님이 오시는 것에 대해 전혀 준비하지 못한 채 그날은 덫과 같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부자는 부자대로, 가난한 자는 가난한 자대로, 주님을 맞이하는 일에 깨어있지 못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그것이 양극화 될 뿐 입니다.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요한 당시의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은 그 재난의 시작을 맛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저와 여러분에게는 큰 환난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살아 있는 시대에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백성이라면 이 환난을 통과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경성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여기 하나님의 위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은 보호를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도 아래서 살아가는 자는 하나님 자신이 친수로 보호하실 것입니다. 친히 경계하시고 보존하실 것입니다.

 

공포와 고난의 바람이 불어오지만 하나님의 측량권내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보호와 보존을 받습니다. 시련과 순교와 죽음의 시기를 만날 것이지만 여러분의 궁극적인 구원은 그리스도 안에서 보장되어 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서 이리 뛰고 저리 뛸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외치는 소리를 따라 쫓아다닐 이유가 없습니다. 여러분 안에 계신 진리의 영이 여러분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것인가가 관건이 아닙니다. 보존되고 보호되는 것은 전제된 사실입니다. 그것은 서론에 불과합니다. 이 기간 동안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가 관건입니다. 환난의 날이 닥칠 때 우리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그것이 우리에게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예배하는 공동체를 이 땅에 남기신 주님의 뜻을 헤아려 보아야 합니다. 예배하는 공동체를 향한 주님의 부름이 어떤 것인지 들어야 합니다. 이전에 1992년처럼 주님이 재림하신다고 하니까 하던 일 다 팽개치고 모든 의무에서 벗어나는 것은 바른 방법이 아닙니다. 계획했던 선교까지 포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는 살아남을 수 있느냐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친수로 측량하셨기 때문에 그 문제는 하나님께서 주관하십니다. 보다 중요한 문제는 이 시기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듣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이 예배의 자리에 오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