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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근두목사 설교

    영상주소
    http://vod.upcweb.net/pastor/2019_0217_정근두.mp4
    성경본문
    계시록 11:3-6
    설교일
    2019-02-17

두 증인의 사역

계시록 11:3-6

구주대망 2019217일 주일 찬송 21, 144, 499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 역시 일곱 번째 천사가 나팔을 불기 전에 보여 준 막간극입니다. 막간극 제 1막과 제 2막이 끝나고 제 3막이 시작됩니다.

 

1막과 2막에서 요한은 관객으로서 환상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환상 속에서 배역을 맡아 작은 두루마리를 받아먹기도 하고, 지팡이 같은 갈대로 성전을 측량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3절부터 시작하는 제 3막에서는 요한은 다시 관람석에서 관중으로서 두 증인의 환상을 보고 있습니다. 그가 맡은 측량사로서 배역은 끝났습니다.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고 성전 밖 마당을 남겨 두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까지도 하나님의 교회는 세상으로 부터 핍박을 받아 왔지만, 앞으로 전개될 극심한 환난의 날에 특별한 보호를 약속받고 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서 이리 뛰고 저리 뛸 이유가 없습니다.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찾아다닐 이유가 없습니다.

 

성전 측량의 환상을 통해서 우리는 예배하는 공동체를 남기실 주님의 약속을 봅니다.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것인가가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 받고, 교회는 전능자의 능력으로 보존될 것입니다. 성전 측량의 환상으로 그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오늘 두 증인의 환상으로 연결됩니다.

 

두 증인의 환상

지금 우리의 관심사는 이 기간 동안 무엇을 할 것인가에 있어야 합니다. 예배하는 공동체를 마지막 시대를 위하여 지상에 남기신 주님의 뜻을 물어야 합니다. 이 물음에 대해서 주님은 서슴지 않고 대답해 주십니다.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11:3)

 

여기 등장하는 두 증인이 누구입니까? 3절은 두 증인이라고 부르고 10절은 그들을 가리켜 두 선지자라고 부릅니다. 4절은 이들을 보다 상징적으로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라고 말합니다.

 

이들은 누구를 가리킵니까? 요한이 갈대로 성전을 측량했던 성전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해석보다도 더 많은 해석들이 있습니다. 사람이 가진 상상력이 엄청 풍성함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측량해서 보호된 하나님의 성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밝혀진 이상 두 증인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밝히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두 증인이 무엇인지 입증하기 위해 죽음에서부터 살아난 역사적인 인물들로부터 두 단체, 나아가서는 두 가지의 원리나 이념까지 사람들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 교부인 터툴리안은 죽음에서 살아난 에녹과 엘리야가 말세에 나타날 두 증인이라고 보았습니다. 다른 많은 사람들은 유대의 전통에 따라 모세와 엘리야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5절과 6절에 나오는 이적들을 보면 모세와 엘리야를 떠올리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특히 모세와 엘리야는 함께 변화 산에서 주님과 대화하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두 단체로 보는 이들은 유대인 교회와 이방인 교회를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두 원리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좀 더 다양한 제안들을 제시합니다. 율법과 선지서, 율법과 복음, 그리고 구약과 신약, 얼핏 보면 갖다 붙이는 대로 무한한 제안들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두 증인 - 증거 하는 공동체

두 증인이라고 해서 두 가지를 갖다 붙이는 것은 상징과 그 상징이 의미하는 바를 서로 혼돈하기 때문입니다. 두 증인이라고 해서 무엇인가 두 가지 무엇을 찾는 것은 이런 혼동에서 기인합니다.

 

두 증인은 상징이고 그 상징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밝히면 됩니다. 굳이 뭔가 두 가지를 찾아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두 증인이 의미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며 세상과 싸우는 교회라고 봅니다. 두 증인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에 신실한 교회를 의미합니다.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모든 주의 백성들을 의미하는 상징입니다. 그 중에서는 요한처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귀양을 가기도 하며 그 수가 차기까지 동무 종들, 형제들과 함께 죽임을 당한 순교자들도 있습니다.

 

그 안에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하고 행동하며, 신실한 증인의 삶을 사는 모든 성도들을 가리키는 상징으로 생각됩니다. 두 증인은 오순절 이후 성령의 권능으로 사역하는 모든 세대의 교회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요한은 계시록 초두에서 보호 받는 하나님의 교회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증거 하는 신실한 교회를 보여 줍니다.

 

두 증인의 사역

그러면, 두 증인의 모습과 활동을 살펴봅시다.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 이백 육십일을 예언하리라.” 두 증인은 예언하는 권세를 부여 받습니다.

 

이 두 증인의 사역은 일천 이백 육십일 동안 지속됩니다. 달로 환산하면 마흔 두 달, 연수로 말하면 36개월 즉,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수난 받는 기간 전부를 가리킬 뿐만 아니라 동시에 복음 전파 시대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왜 같은 기간을 2절에서는 달로, 3절에서는 날로 표현했을까요? 2절에서는 포위되고 빼앗기고 짓밟히는 성에 관해서 말합니다. 흔히 도시가 포위되는 기간은 달로 표현합니다.

 

그런데 3절에서 예언과 관련해서 날수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러한 표현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바가 큽니다. 왜냐하면 증거는 날마다 행해져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 세대에 걸쳐 우리 성도들은 매일 매일 증언하도록 부름 받은 자입니다.

 

굵은 베옷을 입고

그들은 굵은 베옷을 입고 등장합니다. 굵은 베옷이라고 하니까 여름에 시원한 좋은 옷이라고 생각 한다면 여러분은 본문의 의미를 바로 파악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옛 맛을 살린 멋쟁이 옷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과 신약을 통틀어 굵은 베옷의 의미는 이와 다릅니다. 70~80대 이상 되는 어르신들이라면 굵은 베옷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바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을 당해 슬픔의 때에 굵은 베옷을 입어 본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두 증인은 그들의 메시지와 부합하는 옷차림을 하고 등장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모습은 우리의 임무를 반영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의 차림새까지도 우리의 증거와 무관할 수 없습니다. 두 증인은 지금 다가오는 멸망에 대해 증거 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차림새나 거동은 그 메시지와 일치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삶 전체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향락을 추구하며, 안일하게 살고 있다면 우리가 어떤 말을 전해도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사는 모습이 우리가 전하는 메시지를 부인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디어는 메시지라는 말을 했나 봅니다. 우리의 사는 모습이 우리의 증거와 얼마나 일치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회개하는 교회라야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큰 두려움과 큰 슬픔이 교회에 있을 때 교회는 세상 속에서 제 구실을 감당합니다. 안락한 교회, 편안한 마음으로 다닐 수 있는 교회는 세상을 움직일 만한 능력을 상실한 교회입니다. 세상을 일깨워 구원을 얻도록 하는데 실패합니다. 세상의 반대를 유발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지지를 이끌어 내지도 못합니다.

 

교회의 임무는 증거 하는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모습은 거기에 부합해야 합니다. 굵은 베옷을 입고 회개를 선포하는 기관이 교회입니다. 비단옷을 걸치고 회개를 선포하는 우스꽝스런 사람들의 모임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

두 증인에 대한 설명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 땅의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계시록을 대하다 보면 참으로 난감할 때가 많습니다. 감람(올리브)나무를 재배해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쉽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상징이 앞에서는 두 증인으로, 여기에서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로 바뀝니다. 그러나 상징이 나타내는 대상은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증거 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증거 하는 공동체의 능력의 원천이 무엇인지 이 두 감람나무가 보여줍니다.

 

감람나무의 환상의 원천은 스가랴 43절입니다. 당시는 석유를 사용하던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당시에도 땅 속에는 석유가 있었겠지만 사용할 줄을 몰랐습니다. 전기로 어두움을 밝히던 시대는 더 더구나 아니었습니다. 불을 밝히기 위해서는 감람유를 사용했습니다.

 

감람유는 풍성한 기름의 공급원이었습니다. 특별히 팔레스틴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감람나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밤에 불을 밝힐 수 있는 자원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했습니다.

 

스가랴서에는 기름과 성령이 서로 관련되어 나오고 있습니다. 일곱 등잔의 주발 좌우편에 있는 두 감람나무의 환상을 보여 준 후에 설명을 합니다. 이는 힘으로도 되지 아니하고 능으로도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4:6).

 

두 감람나무의 비유를 이야기하면서 거기에 공급되는 기름이 바로 나의 신()이라고 말합니다. 등대 좌우의 두 감람나무의 뜻이 무엇이냐는 스가랴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합니다. 이는 기름 부음 받은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서 있는 자니라.”(4:14)

 

요한의 표현을 다시금 들어 봅시다. 이 땅의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라고 유사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스가랴가 환상을 보았을 때는 이제 막 포로에서부터 귀환하여 허물어진 예루살렘을 건축할 시기였습니다.

 

성전을 재건하는 일 - 그것은 해도 해도 끝이 없고 사람들을 지치게 만드는 작업이었습니다. 본당 리모델링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힘든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 때에 스룹바벨과 여호수아, , 정치적 지도자와 종교적 지도자가 어디서 힘을 얻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힘을 얻어 성전을 건축하는 역사를 공동체와 함께 이뤄 내리라는 것을 환상을 통해 보여 줍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사명을 완성하는 데에는 힘으로도, 능으로도 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신으로 된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재건하는 일이 하나님의 신으로만 된다는 것은 불변하는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의 신에 사로잡힌 자들을 통해서 지금도 되어져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신에 사로잡힌 자들을 통해서 지금도 세워집니다. 하나님의 나라 확장은 하나님의 신에 붙잡힌 자들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교회당만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선교사만 보낸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때로는 교회가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선교사들이 하나님의 역사에 걸림돌 노릇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에 사로잡히지 아니할 때 그가 누구든지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내지 못합니다. 구약의 훼파된 성전을 재건하는 것은 오실 메시야에 대한 예표입니다. 구약의 성전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반드시 건축되어야 하고 아름답게 지어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그러한 성전을 지어야 할 의무가 없습니다. 이곳에서 땅을 닦고 큰 건물을 세우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과한 임무가 아닙니다.

 

구약시대 성전의 기능이 무엇입니까? 성전은 죄인과 하나님이 만나는 장소입니다. 죄인과 하나님이 만나는 일이 여기에 큰 건물을 세움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죄인이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그 일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십자가에서 그가 피를 흘림으로써, 그가 삼 일만에 살아남으로써 인생이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통로가 완성되었습니다. 더 이상 건물을 아름답게 지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솔로몬 성전이 아름다웠으니까 우리도 성전을 이름답게 지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지의 소산이거나, 아니면 사악한 무리들의 속임수입니다. 우리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목적에 적합한 건물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서 예배하고 교제하고 교육받기에 적합한 장소이면 됩니다. 그 정도의 공간만 제공될 수 있으면 족합니다. 기능에 따라 마련되어야 하는 것이지 보기에 현란한 건물을 교회는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죄인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장이 마련되어 있는 시대입니다. 장엄한 공간이 없어도 하나님과 그 백성이 만날 수 있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이 거룩한 만남의 역사는 지금도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에 의해 계속되어집니다. 생명은 생명을 통해 전수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의 성령에 사로잡힌 자들만을 통해서 전수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에 사로잡힌 자 - 성령의 기름 부은 자들에 의해 하나님의 사역이 이뤄질 것을 이미 스가랴 시대에 보여주었습니다.

 

세상을 향한 교회의 증거

그렇다면 요한의 환상의 강조점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 역시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의 환상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두 감람나무로부터 기름을 공급받는 두 촛대는 어두움의 세상을 밝혀줄 것입니다.

 

요한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교회의 증거가 결코 사라지지 아니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결코 하나님의 성령의 기름 부음으로 사역하는 교회의 불빛을 꺼버릴 수 없습니다.

 

요한에게 있어서 촛대가 교회를 상징한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입니다. 계시록 처음 두 장에서 촛대가 6번 등장합니다. 모든 경우마다 교회를 가리킵니다.

 

교회의 기본 사명이 세상을 밝히는 것이기 때문에 촛대라는 상징을 통해 교회를 가리킵니다. 여러분과 저의 사명은 세상을 밝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도로서 세상의 빛인 것을 명심하십시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십시오. 더 밝게 비칠 것입니다. 성령께 더 의존하십시오. 더 멀리 비치게 될 것입니다.

 

온 세상의 주, 이 땅의 주라는 표현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온 세상을 창조하신 주님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 땅에 있는 만민을 지으신 분입니다. 따라서 사람 사는 곳, 어디에나 주님은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마태는 교회의 사명을 진술하면서 이런 관점에서 그 범위에 하늘과 땅을 포함시키고, 모든 족속을 사역의 대상으로 규정합니다. 동시에 마태는 우리가 사역하는 날이 세상 끝 날까지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크신 하나님입니다. 하늘 아래 모든 땅의 주인이십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일천 이백 육십일 하루도 빠짐없이 우리는 증거 해야 합니다.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기까지 우리의 임무는 이 땅에서 결코 끝나지 않습니다.

 

성령으로 증거 하십시오. 성령으로 밝히십시오. 어두움이 있는 곳마다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처럼 빛을 발하십시오. 여러분의 임무를 완수하기까지 세상은 결코 여러분의 빛을 꺼버릴 수 없습니다.

 

인간의 힘은 한계가 있습니다. 사람의 능력은 다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은 무한합니다. 그 분의 능력은 다함이 없습니다.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여기 여러분에게 권세를 주리라는 약속이 있습니다. 이 땅의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의 역할을 감당하십시오.

 

두 증인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

이제 두 증인이 그 사역을 감당하는 동안 행사할 권세를 알아봅시다. 만일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서 그들의 원수를 삼켜 버릴 것이요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반드시 그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그들이 권능을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가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능을 가지고 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

여기서는 먼저 하나님께서 그 종 선지자들을 어떻게 보호하실 것인지 밝혀줍니다. 그들의 사명이 완수되기까지는 아무도 그들을 해할 수 없는 권세를 소유합니다. 이전에 선지자들을 지키신 그 하나님께서 지금 두 증인을 지키실 것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을 보호하신 동일한 하나님께서 신약시대, 마지막 시대의 선지자들을 보호하실 것입니다.

 

이 상징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말세에 여러 가지 권능을 행할 역사적 인물의 등장으로 저는 보지 않습니다. 그 입에서 나온 불은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합니다.

 

원수를 문자 그대로 태워 죽이는 일은 마지막 시대의 증인인 우리들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우리는 입에서 불이 나와 사람들을 태워 죽이는 권능들을 행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메시지의 위력이 어떠할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엘리야의 말대로 제물을 태움으로써 그가 선지자임을 입증했듯이 그 입에서 나오는 불은 그들이 하나님이 보내신 증인임을 입증하는 상징적인 묘사입니다.

 

증인들의 입에서 나온 심판의 메시지가 그대로 성취됨으로써 그들이 하나님이 종인 것이 입증될 것입니다. 그들이 말한 심판의 메시지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성취됨으로써 아무도 대항할 자가 없을 것입니다.

 

엘리야든 모세든 다시 문자적으로 회생할 필요가 없습니다. 일찍이 세례 요한이 엘리야의 영으로 사역했듯이 모세와 엘리야의 정신과 능력으로 사역할 교회를 보여줍니다. 이들이 그 맡은 사명, 증명하는 일을 완수하기까지 아무도 그들을 해하거나 죽이지 못할 것입니다.

 

교회가 선지자적 사명을 다 완수하기까지 지상의 어떤 세력도, 공중의 어떤 권세도 교회를 해하거나 망하게 할 수 없습니다. 그 예언 하는 날 동안에 하늘과 땅에 징조를 베풀 것입니다. 교회가 그 직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는 동안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로 보호될 것입니다.

 

그 임무에 충실한 교회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맡은 임무를 망각한 교회는 능력을 상실하고 맙니다. 그 맡은 임무에 충실한 교회는 믿음으로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세상을 치는 권세를 소유합니다.

 

어쩌면 교회가 그 직무에 충실한 자체가 세상을 응징하는 하나님의 방법의 하나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임무를 기억하십시오. 지금은 굵은 베옷을 입고 예언할 때입니다. 곧 임할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를 해야 하는 때입니다. 러기에 우선 여러분의 삶의 모습이 달라져야 합니다.

 

나아가서 여러분은 여러분이 가진 자원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구약 하나님의 종, 모세와 엘리야가 가졌던 그 엄청난 능력의 원천이 여러분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환난의 시작 뿐 아니라 큰 환난의 날까지 하나님은 여러분을 지키실 것입니다. 아무도 어떤 세력도 여러분을 그 본연의 임무, 예언하는 일에서부터 막을 수 없습니다. 극심한 환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여러분을 보호하실 것입니다. 그 사명을 완수하기까지 여러분의 생명은 전능자의 장중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예언할 권세를 주셨습니다. 원수를 소멸할 권세를 주셨습니다. 하늘을 닫을 권세를 주셨습니다. 물을 변하게 하여 피되게 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칠 권세를 교회에게 주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명에 신실할 때 이 권세는 여러분의 것입니다. 다만 보호될 뿐만 아니라 땅을 칠 권세까지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그 예언하는 날 동안 하늘 위에나 하늘 아래 우리를 해할 권세가 없습니다.

 

정해진 기간 동안 주님의 능력과 권세로써 세상의 빛으로 비취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정한 적법한 증인들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비취는 촛대입니다.

 

일천 이백 육십일, 하루하루를 증거의 기회로 사용하십시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는 것이 마지막 시대를 사는 성도의 사명입니다. 어떤 사람은 복음을 전하기에 아주 좋은 기회를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때를 얻은 사람은 때를 얻은 대로 증거 해야 합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한 사람에게조차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 무척 어려운 상황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는 것이 우리의 부름입니다. 마지막 시대를 사는 성도의 사명, 거기에 우리의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무서운 재난의 날 도피할 수 있을까에 관심을 두는 것은 겁쟁이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이 악해질 때, 마지막 하늘의 문이 닫히기 전에, 기회가 마감되기 전에 한사람이라도 더 복음을 들을 수 있을까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받은 권세로써 세상에 나아가 증거 하는 대열에 함께 서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