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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근두목사 설교

    영상주소
    http://vod.upcweb.net/pastor/2019_0224_정근두.mp4
    성경본문
    계 11:7-13
    설교일
    2019-02-24

두 증인의 죽음, 부활, 승천

11:7-13

구주대망 2019224일 주일 찬송 22, 145, 407

 

증거하는 공동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계속해서 막간극을 살피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여섯째 나팔과 일곱째 나팔 사이에 그가 본 환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 환상의 마지막 장면을 보고 있습니다.

 

111-2절에서 교회가 무엇인지, 하나님의 백성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들이 받는 하나님의 보호가 어떤 것인지 살펴보았습니다. 참 하나님의 백성은 끝까지 보호될 것이라는 전제 위에 요한의 환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113-13절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교회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두 증인의 활동을 통해서 하나님의 교회는 증거 하는 공동체임을 살펴보았습니다. 법적 효력을 발휘하는 증언은 두 명의 증인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므로 두 증인이란 역사적이고 실제적인 두 인물이 아니라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를 상징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는 성령의 능력으로 세상을 밝힐 교회를 가리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3절에서 13절은 복음시대를 관통하는 교회사의 전경입니다. 일천 이백 육십일을 증거 하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여기 1214절의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2절의 마흔 두 달, 3절의 일천 이백 육십일은 강조점을 달리해서 같은 기간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교회는 그 모든 기간 동안 날마다 증거 해야 할 부름을 받습니다. 적대적인 이 세상 속에서 증거 하는 부름을 감당하도록 이 환상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이 환상은 교회의 사명이 무엇인가 뿐만 아니라 교회의 영원한 운명이 어떤 것인지 보여 줍니다.

 

이 환상의 목적은 마지막 날 나타날 감람나무가 누구인지 궁금증을 일으키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 환상은 여러분과 저로 하여금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사명과 장차 받을 영광이 무엇인지 보여줌으로써 마지막 날을 살면서 충성하도록 권면하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을 살 동안 주님을 증거하고 진리를 선포할 사명이 여러분과 저에게는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구주를 선포하고 세상 속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야 할 사명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두 감람나무가 누구를 가리키는지, 두 촛대가 누구인지, 그리고 두 증인이 어떻게 나타날 것인지를 생각할 것이 아니라 두 증인은 바로 여러분의 모습이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는 바로 여러분의 자아상이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전하는 선포의 핵심은 회개에 있습니다. 굵은 베옷을 입고 예언하는 모습은 이 사실을 부각시킵니다. 지난주일 우리가 살핀 두 증인의 사역은 하나님이 주신 권세로써 그 임무를 수행하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듯 복음은 무력한 것이 아닙니다. 적진을 쳐서 격파하는 하나님의 강력입니다. 복음이 가진 힘과 영광은 두 증인의 사역을 통해 드러납니다. 복음은 그것을 대적하는 모든 세력을 격파할 약속을 갖고 있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한 분은 세상과 함께 한 자보다 훨씬 강한 분이십니다. 그 분이 주신 권세로써 증거의 임무를 완수해야 합니다. 복음은 연약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결코 무력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패배하지 않습니다.

 

복음에는 하늘을 닫고 땅을 치는 권세가 있습니다. 애굽인이 신성시 했던 나일강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 수많은 재앙들로 애굽을 쳤던 모세의 사역은 다만 시작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오고 오는 세대에 당신의 종들을 통해서 그와 같은 사역을 계속해 가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정하신 모든 뜻을 다 이루실 것입니다. 교회의 증거를 막을 세력은 하늘에도, 땅에도, 땅 아래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교회는 그 임무를 완수할 때까지 무적의 능력을 발휘할 것입니다.

 

세상 끝까지 증거 될 복음

, 그러면 오늘 본문을 살펴봅시다. 오늘 본문은 그 내용상 세 장면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장면은 7절입니다. 2 장면은 8-10절입니다. 3 장면은 11-13절입니다.

 

첫 장면의 주제는 두 증인의 살해입니다. 둘째 장면의 주제는 버려진 시체를 둘러싼 축제입니다. 그리고 셋째 장면의 주제는 증인들의 회생에 잇따른 사건입니다. 두 증인의 부활, 승천과 함께 잇따른 재앙입니다.

 

이제, 첫 장면과 그 메시지를 살펴봅시다. 그들이 그 증언을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이기고 그들을 죽일 터인즉”(7) 여기에서 그들이 그 증언을 마칠 때에 라는 표현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그들의 증거는 도중에서 단절되지 않습니다. “마친다.”는 말은 그 목표에 도달했다는 의미입니다. 그 주어진 목적을 달성했다는 뜻입니다. 복음 증거는 결코 중간에서 끝나 버리지 않습니다.

 

미완성 작품으로 증거의 사역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은 세상 끝까지 증거 될 것입니다. 그 때에야 비로소 세상 끝이, 주님이 오실 것입니다. 복음은 달리던 코스를 남겨두고 중간에서 기권하여 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먼저 세상 끝까지 복음증거가 완료되어야 합니다. 비로소 그 때에 무저갱에서 올라온 짐승이 세력을 발휘하기 시작합니다.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이기고 그들을 죽일것입니다.

 

두 증인의 사역이 완료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이 죽임 당하는 것을 허용하십니다. 이것은 집단적인 교회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개인적인 성도의 삶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남은 사명이 있는 한 우리는 결코 죽임을 당하지 않습니다. 온 세상이 우리를 죽이려고 달려들지라도 우리는 결코 패배하지 않습니다.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가야할 길을 가리라고 주님이 말씀하셨듯이 우리에게 오늘의 사명, 내일의 할일, 그리고 모레 완수해야 할 과업이 있는 한 우리가 걷는 길을 아무도 막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7절은 패배의 기록이 아닙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죽도록 충성한 교회의 승리의 기록입니다. 무저갱에서 올라온 짐승에 의해서 개죽음을 당한 증인들의 최후의 기록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증거를 마치기까지 어떤 세력도 그들을 해칠 수 없었다는 역설적인 승리의 기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때와 기한을 정하신 분이십니다. 1260일간 권세를 가지고 증거 할 사명을 교회에 주신 분이십니다.

 

그 역사를 완수하기까지 아무도 교회를 정복하지 못합니다. 그 역사가 완성된 후 반드시 한 때 악의 세력이 기승을 부리도록 허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로마 군병에 의해서 못 박히도록 허용하셨듯이 그의 백성을 짐승에 의해서 패배와 죽임을 당하도록 또한 허용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하나님의 정하신 때와 기한에 따라서 될 일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본문의 속뜻을 파악하고 나면 어떤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위로를 받습니다. 맹렬한 박해를 당한 모든 세대의 교회를 위로했던 말씀인 동시에 특히 마지막 시대 - 큰 환난의 날을 만날 교회를 위한 위로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복음은 시대마다 여러 가지 우여곡절의 역사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분명한 활력이 넘치는 기간이 있었는가 하면 패배와 무력감이 팽배했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힘이 솟고 활기가 넘치는 시기가 있었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서야 했던 때도 있었습니다.

 

수천 명이 일시에 회개하는 시기가 있는가 하면 아무리 외쳐도 반응이 없는 시기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말씀의 사역이 무력해진 교회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큰 환란의 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대마다 지역마다 하나님의 교회는 악의 세력에 의해 박해를 받고 그 활동이 제한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시기 직전에는 그 양상이 무척 악화될 것입니다.

 

주님은 이 모든 재난의 시작큰 환난의 날을 구분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재난의 시작뿐만 아니라 큰 환난의 날을 만날 것입니다. 선교기관으로서 그 활동이 완전히 마비될 것입니다. 공적이고 공개적인 복음 증거는 완전히 침묵을 당하고 무저갱에서 나온 짐승이 그 세력을 지금보다 훨씬 떨치게 될 것입니다.

 

그 결과로 악의 세력에 의해 질식사를 당한 교회의 시체가 도시마다 그 길거리 마다 즐비하게 늘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미 그런 양상이 나타나고 있는 서구 교회의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큰 교회 건물마다 음산한 죽음의 세력이 조용히 지배하고 날이 갈수록 텅텅 비어가는 교회당 모습이 마치 증인들의 시체처럼 큰 거리 어귀마다 버려져 가고 있습니다.

 

지금도 무저갱에서 올라온 짐승은 활동하고 있지만 그 활동이 더욱 맹렬해질 때가 우리 앞에 다가올 것입니다. 그들의 공격이 맹렬해지고 큰 성과를 거두는 시기가 닥칠 것입니다.

 

요한의 환상을 통해서 그런 장면을 살펴봅시다. 그들의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보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이 두 선지자가 땅에 사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사는 자들이 그들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사악과 억압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는 세상 도시의 대명사입니다. 주를 십자가에 못 박은 그 세상은 주를 증거 하던 두 선지자의 시체로 인해서 기뻐 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고,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거역하는 세상을, 본문은 소돔, 애굽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빠져들 도성, 그 곳을 소돔, 애굽이라고 일컫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고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모든 세상은 동일한 정죄와 심판 아래 빠져들 것입니다.

 

세상은 그 본성상 증인들의 죽음을 즐거워합니다. 세상은 그 본질상 증인들의 시체를 두고 기뻐합니다. 교회의 생명이 끝날 때 크게 기뻐하고 선물을 주고받고 잔치를 벌입니다.

 

증인들의 증거를 받아들이지 않던 그들로서는 증인들의 죽음만큼 속 시원한 일은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이들은 교회가 무력해질 때 신명이 나는 자들입니다. 영적 활력을 잃고 외형만 남은 교회는 귀신들과 세상을 즐겁게 할 뿐입니다. 세상은 언제나 죽은 교회를 좋아합니다.

 

악인들은 언제나 성도가 넘어지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을 보고 기뻐하던 악인들은 오늘도 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서로를 원수처럼 여기던 헤롯과 빌라도마저 친구가 되는 축제일이 예수의 죽음의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악인들의 축제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고작 사흘 반에 불과합니다. 두 증인이 증언했던 일천 이백 육십일과 대조적인 기간입니다. 보십시오. 삼년 반 동안 증인들은 능력으로 신실하게 사역했습니다. 그러나 악인이 기승을 부리는 기간은 고작 사흘 반에 불과합니다. 그들의 승리는 순간적입니다. 악인들의 승리는 결코 진정한 승리가 아닙니다.

 

그러면 이 축제에 동참하여 즐거워하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8절에는 소돔 거민, 애굽 백성, 주를 십자가에 못 박은 예루살렘 거민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9절을 보면 조금 다른 측면에서 이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들은 더 이상 한 지역만의 주민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백성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나온 사람들이라고 밝힙니다.

 

8절만 보면 그들이 한 특정 지역의 주민인 것처럼 오해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9절은 분명히 각 백성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나온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0절을 보면 더 분명하게 그들의 정체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땅에 거하는 자들을 두 선지자가 괴롭게 했기에 땅에 거하는 자들이 그들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서로에게 예물을 보내리라고 말합니다.

 

계시록에서 땅에 거하는 자들이란 모든 불신자를 지칭하는 표현입니다. 땅에 거하는 자들 즉, 하늘의 백성과 대조적인 무리들을 의미합니다. 증인들의 시체를 두고 기뻐하는 무리들은 더도 덜도 아닌 땅에 거하는 자들 모두입니다.

 

하늘 시민과 대조되는 땅에 거하는 자들이 악의 축제에 가담하고 있습니다. 죽임을 당한 증인의 시체로 인해 기뻐하는 자들은 땅에 거하는 모든 인류를 가리킵니다.

 

더불어 짝할 수 없는 세상과 교회

그러므로 본문은 다시 한 번 계시록의 주제인 세상과 교회 사이의 적대감을 보여 줍니다. 그 시체를 짓밟고 온갖 모욕을 퍼붓는 무리는 다름 아닌 인류 전반의 모습입니다. 악의 승리를 기뻐하는 모든 무리들은 본질상 무저갱에서 나온 짐승과 같은 자들입니다.

 

이들이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이유는 10절에 밝혀져 있습니다. 이 두 선지자가 땅에 사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사는 자들이 그들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신실한 복음증거는 결코 악한 자들을 유쾌하게 하지 않습니다. 회개치 않는 자들은 참된 복음전파를 좋아할 리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신실한 설교자가 떠나면 양심의 괴로움을 당하던 무리들은 함께 기뻐합니다.

 

하지만 교회는 세상과 더불어 짝할 수가 없습니다. 신실한 성도는 세상 사람과 더불어 평안히 동행할 수가 없습니다. 이 악한 세상에서 평안히 살 수 있는 신자는 자신이 그 사명에 얼마나 신실한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세상을 귀찮게 하지 않는 성도의 존재는, 세상에 아무런 유익도 끼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생기로 새로워지는 교회

버려진 시체, 그것이 요한이 본 환상의 마지막 장면이 결코 아닙니다. 삼 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그들 속에 들어가매 그들이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11)

 

하나님의 개입만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무기력한 교회, 큰길가에 버려진 시체를 일으키는 능력은 전능자에게서만 나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그들 속에 들어가매 그들이 발로 일어서니

 

여러분에게 소중한 분의 죽음 앞에, 슬피 울며 바라보던 시체가 벌떡 일어서면, 여러분은 얼마나 놀라겠습니까? 이 세상은 교회의 죽음을 축하해 왔지만 교회가 그 멸절의 위기에서 다시 일어나는 것을 목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어떤 분(윌슨)이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사는 교회의 회생의 역사입니다. 중세기의 암흑시대가 끝나고 종교개혁의 새 날이 밝아 왔던 것을 여러분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영국의 청교도 운동과 뉴잉글랜드의 대 각성 운동은 이런 역사의 증거입니다. 18세기 잉글랜드와 웨일즈의 부흥역사는 하나님의 생기가 그 속에 들어간 역사입니다. 이 세상이 이겼다고 생각하는 그 때에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생기로써 새로워집니다.

 

이 일이 일어나기 위해서 교회는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교회가 교회답지 못해서 성도들이 이 곳 저 곳을 방황할 때 여러분과 저의 사명은 하나님께서 생기를 교회에 부어주시도록 간구하는 것입니다.

 

주일날 우리끼리 예배당에 모여서 만족하고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땅에 있는 교회를 새롭게 해주시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할 때 교회다워질 수 있습니다.

 

시체와 같이 버려져 있는 교회는 세상의 조롱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은 그런 교회를 짓밟고 모욕하고 기뻐 날뜁니다. 하나님의 교회의 안타까운 모습으로 인해 이곳에 모인 여러분이라면 하나님의 교회가 살아나기까지는 여러분의 부르짖는 사명이 완수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생기, 그것이 교회를 새롭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소망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이리로 올라오라는 마지막 부름을 받을 때 까지 죽음을 딛고 다시 일어날 것이며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 같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강력한 군대들로서 새로워질 것입니다.

 

11절의 장면 묘사는 모두 과거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미래에 일어날 일이지만 너무나 분명한 사건이기에 과거형으로 예언합니다. 요한은 이 미래에 있을 사건들이 이미 일어난 사건처럼 바라보고 있습니다.

 

마지막 불빛이 꺼졌다고 생각되는 그때에 하나님의 생기로 밝게 비치는 역사, 그것이 2천년 교회의 과거사였습니다. 동시에 그것은 영광 중에 소생할 하나님의 교회의 미래사이기도 합니다.

 

이리로 올라오라큰 음성을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장면은 고난 중에 있는, 소멸의 위기에 처한 교회와 성도를 위로하기 위한 하나님의 영광스런 약속입니다.

 

요한의 편지를 처음 받았던 소아시아 일곱 교회가 이 환상을 통해 위로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시대마다 멸절의 위기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던 성도들이 위로 받았던 소식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듣고 저희가 올라가는 그 장면이 주님의 승천을 바라보았던 그들의 마음속에 분명했을 뿐 아니라 그것은 곧 주님의 영광에 참여 하게 될 자신의 모습인 것을 깨닫고는 그들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원수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여러분의 미래상을 기억하십니까? 원수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여러분의 미래상을 바라보십시오. 그 때 여러분은 새로운 각오와 힘을 얻을 것입니다.

 

그 날이 오기까지

그러면 이제 두 증인의 활동과 수난, 부활과 승천을 다시 한 번 요약해 봅시다. 교회는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무리들입니다.

 

그리스도의 활동에 동참할 뿐만 아니라 그의 수난에도 동참합니다. 권세를 가지고 활동할 동안뿐만 아니라 그의 사명을 다한 후에 여러 수난과 모욕을 당하는 순간에도 주님을 따르는 백성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고난을 받으신 우리 주님이 남기신 고난의 발자취를 따라 가는 걸음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받는 수난을 기쁨으로 감당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마지못해 수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승리한 자들로서 그 수난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자신의 몸에 채우는 것을 지극한 영광으로 여기는 무리들이 교회입니다.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승천에도 운명을 함께 나누는 자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인 이상 모든 과정에서 그리스도와 분리될 수 없습니다. 2천 년 전 지상에서의 그리스도의 모습은 앞으로 지상에서 살아야 할 여러분의 모습입니다.

 

능력을 가지고 삼 년 동안 증거 하시던 주님의 모습은 일천 이백 육십일 동안의 여러분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수난을 당하고 부활, 승천하셨던 그 모습 역시 우리가 동참하게 될 영광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인 이상 그리스도와 그 모든 과정에서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삶이 우리의 것이라면 그의 죽음도 우리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이 우리의 것이 될 때에 그리스도가 누리게 될 영광 역시 우리의 것입니다. 영광의 기약이 이를 그 날까지 우리에게 주어진 길을 담대하게 걸어 나가야 할 소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기에 우리는 찬송합니다. 구주와 함께 나 죽었으니 구주와 함께 나 살았도다. 영광의 그날이 이르도록 언제나 주를 바라봅니다.”(407) 일곱 번째 천사가 나팔을 불기 전에 보여준 막간의 환상은 교회의 사명 뿐 아니라 교회가 누리는 영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상이 큰 두려움에 휩싸일 때에 여러분과 저는 영광 중 주님을 만날 것입니다. 큰 지진과 엄청난 사상자로 인하여 두려워 떨 때에 여러분과 저는 영광중에 들릴 것입니다.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며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더라.”

 

그 날 모든 무릎이 주님 앞에 꿇게 되고 그 날은 모든 입술이 주님을 시인케 될 것입니다. 그 날이 오기까지 그리스도와 함께 권세를 가지고 사역하도록 그리스도인은 부름을 받았습니다. 또한 그 수난과 죽음에도 함께 하십시오.

 

주께서 끝까지 신실하셔서 사흘 만에 살아나시고 영광 중에 승천하신 것처럼 여러분과 제가 끝까지 소명에 충실하다면 죽임을 당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우리의 (역사의) 마지막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생기로 살아나며 하나님의 명령으로 구름을 타고 하늘에 올라가는 영광의 기약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일천 이백 육십일 동안 그 날수가 차기까지 두려워 떨 자들이 아닙니다. 두 증인의 수난과 활동뿐만 아니라 부활과 승천과 모든 영광을 우리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광의 중한 것을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