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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근두목사 설교

    영상주소
    http://vod.upcweb.net/pastor/2019_0324_정근두.mp4
    성경본문
    계 12:1-2
    설교일
    2019-03-24

해산의 진통으로 울부짖는 여자

12:1-2

구주대망 2019324일 주일 찬송 27, 151, 357

 

주일마다 계시록 말씀을 사모하는 성도 여러분, 다시 한 번 우리가 살피는 계시록의 흐름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요한 계시록 제 1, 1장에서 11장까지의 주제는 교회와 세상과의 투쟁입니다. 이제 12장부터 시작되는 제 2부는 그 싸움의 보다 깊은 내막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지금껏 계시록에서 보아온 교회와 세상 간의 투쟁그리스도와 사탄과의 싸움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시간과 역사 속에 벌어지는 교회와 세상 사이의 투쟁은, 영원과 우주 속에서 벌어지는 예수 그리스도와 사탄과의 싸움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그리고 12장부터 14장까지는 요한 계시록에서 가장 실질적인 막간 사건입니다. 이 부분의 막간 사건은 그 길이나 위치 뿐 아니라 내용상으로 보아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본문은 교회와 세상 사이에 있는 싸움의 깊은 내막과 본질을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이 부분은 당대 성도들이 겪는 로마 황제와의 투쟁을, 악한 세력과 하늘의 하나님과의 유서 깊은 투쟁이라는 맥락에서 설명합니다.

 

12장부터 14장까지의 의미 깊은 일곱 이적을 흐르는 중심 사상은 하나님 나라와 사탄의 왕국 사이의 투쟁입니다. 왜 하나님의 백성은 환난과 핍박을 당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궁극적인 대답으로 영원 세계 속에서 벌어지는 하나님 나라와 사탄의 왕국 사이의 투쟁이라고 말합니다.

 

그 투쟁의 결과로 나타나는 환난과 박해는 계시록의 중심 주제의 하나일 뿐 아니라 신약 전체를 흐르는 사상이기도 합니다. 신약 성경에 의하면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일반적인 경험으로서 환난과 박해가 기술됩니다.

 

영적 세계에서 일어난 커다란 전쟁을 기록함으로서 땅위에서 고난 받는 성도를 위로합니다. 땅위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왜 그들이 극심한 핍박을 지금 당하는 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땅 위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그들의 대적 사탄이 이미 정복된 것을 확신시키려고 합니다. 그리하여 땅 위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도 어린 양의 피와 그들의 증거 하는 말로 인하여 사탄을 이길 수 있음을 보여주려고 합니다.

 

특히 요한은 계시록 12장에서 우리에게 묵시 문학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이 하늘의 이적을 고도의 신화적 용어를 사용해서 기술합니다. 마치 요한은 온 세상의 신화들을 다 섭렵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요한 당시까지 알려진 모든 고대 신화들을 통달한 후 그가 원하는 기독교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방 종교가 바라던 모든 소망이, 이스라엘이 바라보던 모든 희망이 그리스도 한 분에게 있다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늘에 오르사 전능자의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만이 구세주라는 것을 부각시켜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무이의 구원자이십니다. 그가 하신 일을 힘입고 주께 가기만 하면 영원한 삶을 얻습니다. 십자가에 달려서 예수께서 고난 보셨기에 우리를 구원하실 분은 그 분 한 분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또 한 번 계시록 12장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확인합시다. 세 장면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막은 아이의 탄생이 기록되어 있고, 2막은 용이 추방당한 사건이 기록되어지고, 3막은 여자와 그 후손에 대한 용의 공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지난주와 마찬가지로 계시록 12장 제 1막에만 한정됩니다. 여기에는 여자와 아이와 용이 주요 등장인물입니다. 등장인물을 중심으로 차례로 살펴봅시다. 지난주일에는 계시록 121절을 중심해서 태양을 옷 입은 여자에 이어서 오늘은 2절을 중심으로 애써 부르짖는 여자라는 제목으로 말씀하려고 합니다.

 

태양을 입고 그 발아래 달이 있고 그 머리에 열 두 별의 면류관을 쓴 여인은 신구약 모든 시대에 걸친 신앙 공동체를 가리킵니다. 이 여자를 묘사한 1절의 기록은 그리스도의 신부로 불리는 교회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는 신구약에 걸쳐서 택함 받은 족속이요. 고귀한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요.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신부라고 성경은 묘사합니다.

 

세상에서는 교회가 영광스럽고 아름다워 보이질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종종 조롱과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늘의 관점에서 보면 여러분이 믿기지 않을 만큼 아름답고 영광스럽습니다.

 

모든 아름다운 꽃으로 단장한 5월의 신부처럼 하늘이 가지고 있는 모든 발광체를 가지고 그의 아름다움을 묘사하기에 여기 부족함을 느끼는 여자, 그를 성경은 교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태양으로 옷을 입은 것은 영광스럽고 고귀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발아래 달이 있는 것은 다스리는 권세가 그녀에게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열 두 별로 장식된 면류관을 쓴 것은 승리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향한 우리의 시각을 교정할 필요가 있다고 지난주일 말씀드렸습니다. 교회를 볼 때에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으로 판단하지 아니하고 믿음의 눈으로 그녀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어야만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상승기류를 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의 눈으로 교회를 볼 때에는 어떤 교회는 더 이상 교회라고 부를 수 없을 만큼 참혹한 처지에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는 구원 얻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신부와 같이 아름다운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함께 모인 공동체를 보실 때에, 하나님의 눈에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런 존재입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3:1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는 여호와께서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잠잠히 사랑하시는 대상이요,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는 대상입니다. 건전한 자아상을 가지고 여러분이 예배의 자리에 나아오셔야 합니다. 건전한 자아상을 가질 때에 여러분이 세상에서 유익을 끼칠 수 있는 성도들이 될 것입니다.

 

해산의 고통

, 그러면 이 여자의 행동을 묘사한 오늘 본문 2절로 가 봅시다. 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써 부르짖더라.” 이 아이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동안 계시록을 보면 어떻게 그렇게도 구절마다 학자들의 입장들이 나누이는지 모르겠습니다. 마치 길이 뚜렷이 나 있지 않은 밀림 속에서 길을 찾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 본문에서는 모든 전통의 학자들이 일치한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실 구원자에 관한 성경 최초의 예언이 여자가 낳은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3:15)이라고 선언합니다. 그 성경 최초의 예언을 우리가 기억한다고 하면 여자가 낳은 아이가 누구를 가리키는지 알 것입니다. 신앙 공동체는 그 분이야말로 구원자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아이를 주 예수 그리스도로 보는 것이 옳다는 것은 이 아이가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는 5절로도 입증이 됩니다.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5) 이 아이는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리기 위해서 세움 받은 자입니다.

 

이것은 시편 2편의 말씀에 의하면 바로 약속된 메시야를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2:9). 두아디라 교회를 향해서 주님이 자기를 나타내실 때에 하신 말씀과도 일치합니다.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2:27).

 

문제는 여자가, 교회가 남자 아이를, 그리스도를 낳는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에 있습니다. 쉽게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를 낳았다고 하는 말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구약에 이스라엘은 해산의 고통을 겪는 여인으로서 종종 나타납니다. 여호와여, 잉태한 여인이 산기가 임박하여 산고를 겪으며 부르짖음 같이 우리가 주 앞에서 그와 같으니 이다”(26:17)

 

시온은 진통을 하기 전에 해산하며 고통을 당하기 전에 남아를 낳았으니 이러한 일을 들은 자가 누구이며 이러한 일을 본 자가 누구이냐 나라가 어찌 하루에 생기겠으며 민족이 어찌 한 순간에 태어나겠느냐 그러나 시온은 진통하는 즉시 그 아들을 순산하였도다.”(66:7-8)

 

딸 시온이여 해산하는 여인처럼 애써 구로하여 낳을지어다.”(4:10) 뿐만 아니라 본문은 환상이기에 너무 문자에 메일 수 없습니다. 또한 이것이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만약 그렇게 본다면 이 여인은 교회라기보다는 마리아로 보아야 될 것입니다.

 

오히려 로마서 95절을 기억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9:5)

 

살펴본 바대로, 성경은 구약 공동체를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약 언약 공동체 이스라엘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오셨습니다.

 

특별히 2절에서 강조점은 해산의 고통입니다. 신체적인, 정신적인 고통이 크게 부각되고 있습니다. 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를 쓰며 부르짖더라.”(2)

 

2절의 강조점은 이 여자가 아파서 애써 부르짖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녀의 고통의 의미는 신실한 구원 공동체의 고통을 대변합니다. 그리스도 자신의 오심과 새 시대의 도래의 전조로서 고통받아온 신앙 공동체의 모습을 여기서 떠 올릴 수 있습니다.

 

계시록이 쓰인 당시의 교회들은 자기들이 당한 이 고통이야말로 새 시대를 가져오기 위한 고통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견디어 내었던 사람들입니다. 바울 사도도 자신의 고통과 고난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1:24)

 

사도 바울 자신도 골로새 성도들을 위하여 괴로움을 기쁘게 받아드리는 것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의 육체에 채우는 것으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위해서 우리 몫의 고난을 감당하고 있습니까? 오늘 교회가 교회되기 위해서, 여러분의 각자의 몫을 감당해야 합니다. 동시에 내일의 새로운 세상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받아드리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자신의 삶에 그리스도께서 남긴 고통을 받아드리십시오.

 

초대교회 성도들, 계시록이 쓰인 당시의 교회들은 자기들이 당한 이 고통이야말로 새 시대를 가져오기 위한 고통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견디어 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떠합니까? 오늘 우리는 신앙 때문에 겪는 박해가 없는 세상을 아직은 살고 있습니다. 적어도 사회적 현상으로 드러난 박해는 없어 보입니다. 종교의 자유라는 헌법의 표현으로 보장되고 있습니다.

 

물론 신실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려고 하면 여전히 개인적으로 겪는 어려움은 지금도 피해갈 수 없습니다. 마치 새 생명을 잉태하기 위해서 여자가 고통 하는 일을 반드시 겪어야 하듯이, 우리가 겪는 오늘의 고통은 하나님의 새 시대가 오기 위한 고통이라는 것을 내어다 보면서 견디어 내어야 합니다.

 

애기를 낳는 여인의 고통과 같이 아파하는 공동체를 통해서 주님은 이미 오셨고 또한 장차 오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해산의 고통이 먼저 있어야만 새 시대가 올 수 있다고 교회는 항상 믿어왔습니다. 그러기에 새 시대를 위한 고통이야말로 오늘을 사는 신앙 공동체의 몫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질문합니다. 새 시대를 위한 진통에 여러분은 참여하고 있습니까? 이 여자가 당하고 있는 고통과 여러분과 상관관계가 있습니까? 오실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아픔이 여러분의 삶에 배어 있습니까?

 

적당히 세상과 어울려 사는 것은 음녀의 처신입니다. 날마다 나타나는 새로운 남자와 더불어서 지내는 것은 음녀의 짓입니다. 세상의 풍조에 휩쓸려서 이리 치닫고, 저리 따라 사는 것은 음녀의 생활 방식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을 여러분도 추구하고 산다면, 여러분은 세상을 짝사랑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주는 것에 빠져 산다면 여러분이 세상과 더불어서 열애하고 있는 중입니다.

 

세상이 약속한 것을 얻으려고 삶을 소모한다면 더 이상 그리스도는 여러분의 구원자가 아닙니다.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4: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과 제가 신앙 공동체의 일원이라면 오늘 우리는 세상이 치닫는 길로 달려가서는 아니 됩니다. 오히려 새 하늘과 새 땅, 새로운 공동체를 지향하는 성도들이라면 해산하는 고통을 각자가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과 서로 짝할 수 없습니다. 우정을 나누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원수된 사이인 것을 기억하고 올곧게 살아가야 합니다. 일찍부터 에덴동산에서 선언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기억하십시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희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고 선언하신 것을 꼭 기억하십시오.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18:6,7)

 

그 밤낮 부르짖는 과부의 소원을 들어주시리라고 말씀하실 때에 거기에 나타난 과부가 바로 교회의 모습니다. 여러분, 그런 간절한 소원을 갖고 부르짖는 한 해가 되길 바랍니다. 그러므로 고통 속에 애써 부르짖는 간구가 성도된 여러분의 입술을 밤낮 떠나지 않아야 합니다.

 

이제부터는 세상의 환영을 보면서 더 이상 살지 않게 하시길 바랍니다. 이제는 우리의 눈을 세상을 향해서 감기를 바랍니다. 하루 스물네 시간을 보낼 때에 세상을 향해서 잠깐이라도 눈을 감고 거룩하신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거룩한 환상을 보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오늘 본문을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귀가 참 알아듣기 힘든 부분을 대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본문의 말이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계시록이라서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의 삶이 너무 세상에 물들었기 때문에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더 이상 세상의 환영을 좇아서 사는, 세상의 신기루를 좇아서 사는 우리들로 하여금 세상 역사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시길 간구합시다.

 

오늘 여기 예배의 자리에 나온 우리 모두가 거룩한 소명을 가진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기 위해서 그 고통을 자신의 몸에 채우기로 소원하는 사람들이 울산교회 예배의 자리에 모여들기를 함께 부르짖기 바랍니다.

 

이 땅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신부입니다. 그 본질적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쉽게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인 소위 교회들이 무수히 등장하는 말세이지만 울산교회는 거룩한 신앙 공동체의 모습을 흐리지 않고 회복하기를 함께 간구합시다.

 

차라리 떠날 자들을 떠나보내고, 아버지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 의가 보금자리를 트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이 땅에 나타나는 것을 보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몸에 채워가는 주의 백성들로서 여기에 순결한 신앙 공동체를 세워가길 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되는대로 세상을 따라 살아가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깨어있지 못하면 다른 성도들은 더 큰 부담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야만 합니다. 여러분 때문에 비난의 돌팔매를 맞으면서, 여러분의 몫까지 자신이 계산해야 하는 것처럼 깨어 기도하는 부담을 안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함께 공동전선에 서 있다는 그 부담감이 여러분 각자에게 자리하고 있어야만 합니다. 부르짖는 성도, 열매 맺는 사역이란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성도 여러분, 의가 보금자리를 트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위해 해산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지금 받아들이십시오. 그러면 후일에 그 날의 영광스런 기업을 누릴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