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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근두목사 설교

    영상주소
    http://vod.upcweb.net/pastor/2019_0331_정근두.mp4
    성경본문
    계 12:3~6
    설교일
    2019-03-31

광야의 날들

12:3~6

구주대망 2019331일 주일 찬송 31, 154, 45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봄이 울산에 자리한 것 같습니다. 특히 어제 오후 울산의 하늘은 푸르고, 눈길이 가는 곳마다 벚꽃이 아름다웠습니다. 꽃송이 하나마다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고백입니다. 흐드러지게 핀 꽃들은 인간을 향한 무언의 함성입니다.

 

이제 계시록 12장 본문은 다시 한 번 하늘로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12장에서 맨 처음 우리가 보았던 하늘에 큰 이적은 태양을 옷 입은 한 여자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녀의 발아래에는 달이 있고 그녀의 머리에는 열두 별의 관을 쓰고 있었습니다.

 

태양을 옷 입고 그 발아래 달이 있고 그 머리에 열 두 별의 면류관을 쓴 여인은 신앙 공동체를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로 불리는 교회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하늘의 큰 이적은 보여주었습니다.

 

우리가 육신의 눈으로 교회를 볼 때에는 어떤 교회는 더 이상 교회라고 부를 수 없을 만큼 참혹한 처지에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구원 얻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신부와 같이 아름다운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들이 함께 모인 공동체를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런 존재로 보고 계십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3:1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는 여호와께서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잠잠히 사랑하시는 대상이요,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는 대상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건전한 자아상을 가지고 예배의 자리에 나아오실 때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건전한 자아상을 가지고 나아갈 때에 세상에 유익을 끼칠 것입니다.

 

지난주일 우리가 살핀 2절의 말씀은 그 여인의 해산의 고통입니다. 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를 쓰며 부르짖더라.”(2) 신체적인, 정신적인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여인의 모습이 크게 부각되고 있습니다. 애써 부르짖는 여인은 바로 구약 언약 공동체 이스라엘이요 그를 통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오셨습니다.

 

동시에 이 여자가 아파서 애써 부르짖고통의 의미는 신구약을 걸쳐 신실한 구원 공동체의 고통을 대변합니다. 그리스도 자신의 오심과 새 시대의 도래의 전조로서 고통받아온 신앙 공동체의 모습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계시록이 쓰인 당시의 교회들은 자기들이 당하는 이 고통이야말로 새 시대를 가져오기 위한 고통이라는 것으로 간주하고 견디어 내었습니다.

 

사도 바울 자신도 골로새 성도들을 위하여 괴로움을 기쁘게 받아드리는 것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의 육체에 채우는 것으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때론 이단에 휘둘리고, 때론 공동체 내의 미성숙한 사람들에 의해서 시달리고, 아니 자신의 부족함과 완악함으로 겪는 모든 고통조차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으로 간주하며, 그것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수용하는 자세가 우리 모두에게 오늘도 요구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위해서 우리 몫의 고난을 감당하고 있습니까? 오늘 교회가 교회되기 위해서, 성도가 성도되기 위해서 여러분의 각자의 몫을 감당해야 합니다. 동시에 내일 새로운 세상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여러분 자신의 육체에 받아드리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애써 부르짖는 그 여인처럼 자신의 삶에 그리스도께서 남긴 고난을 받아드려야 합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위해서, 성숙한 신앙공동체를 만들어가기 위해서 지금도 해산의 고통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마치 새 생명을 잉태하기 위해서 여자가 고통 하는 일을 반드시 겪어야 하듯이, 오늘 우리가 겪는 고통은 하나님의 새 시대가 오기 위한 고통이라는 것을 내어다 보면서 견디어 내어야 합니다.

 

애기를 낳는 여인의 고통과 같이 아파하는 공동체를 통해서 주님은 이미 오셨고 지금도 오시고 또한 장차 오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해산의 고통이 먼저 있어야만 새 시대가 올 수 있다고 교회는 항상 믿어왔습니다. 미성숙한 자신의 모습으로, 답답한 공동체의 수준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새 시대를 위한 고통이고, 오늘을 사는 신앙 공동체의 몫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질문했습니다. 새 시대를 위한 진통에 여러분은 참여하고 있는지를, 이 여자가 당하고 있는 고통과 상관관계가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오실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아픔이 오늘을 사는 여러분의 삶에 배어 있기를 바랍니다. 그 산고로 밤낮 부르짖는 기도가 각인된 삶을 살도록 권면했습니다.

 

한 큰 붉은 용

이제 오늘 123절부터는 하늘의 또 다른 이적을 보여줍니다.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면류관이 있는데 그 꼬리가 하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3-4)

 

한 큰 붉은 용이 등장합니다.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 개나 됩니다. 그 꼬리가 행사하는 능력을 보십시오.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 땅에 던지고 있습니다. 이 엄청난 괴물이 여자 앞에 버티고 서서 해산하게 되면 아이를 삼키려고 합니다.

 

용이 누구냐 하는 것은 길게 논할 여지가 없습니다. 9절에는 그의 정체와 속성이 나옵니다.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인 붉은 용이야말로 고대 신화 어디에서나 등장할법한 괴물입니다.

 

구약 성경 여기저기에 다른 이름으로 등장하는 괴물입니다. 이 신화적 악의 화신은 날랜 뱀 리워야단(27:1), 라합(89:10), (9:3), 악어(40:15 이하, 29:3), (7:12) 등 여러 가지로 구약에 묘사되고 있습니다.

 

12장만 살펴보아도 4절에는 큰 붉은 용이라고 했는데 9절의 설명을 보니까 옛 뱀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의 일곱 머리는 능력과 지식을 상징합니다. 그의 열 뿔은 파괴력을 가리킵니다. 그의 일곱 면류관은 권위에 대한 욕망을 나타냅니다. 비록 그가 면류관을 썼을지라도 승리의 관이 아니라 찬탈한 권세일 뿐입니다.

 

이 모든 묘사는 사탄의 엄청난 권세를 나타냅니다. “이 세상 신으로 군림하는 그의 위용을 보여줍니다. 사실 세세한 부분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묻는 것은 요한이 의도한 바가 아닙니다.

 

요한은 부분적인 의미보다 전체적인 인상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의 충만한 악과 엄청난 힘을 나타내는 것이 요한의 의도입니다. 4절도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의 꼬리로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그 꼬리로 하늘 별 삼분의 일을 땅에 떨어뜨릴 만큼 엄청난 용의 힘을 과시합니다.

 

아이를 삼키려는 붉은 용

, 이 무서운 괴물이 의도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사탄은 그리스도를 멸망시키려는 목적을 갖고 있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죽이려고 시도합니다.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4)

 

어떤 사람들은 이런 부분을 읽으면서 그런 질문을 하나 봅니다. “용이 참 어리석다. 여자를 통째로 삼켜버리지 아이를 낳으면 삼키려고 하다가 실패를 했을까?” 성경의 메시지가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으면 그런 것이라도 가지고 궁금하게 생각할지 모릅니다.

 

보십시오. 사탄의 기본 관심은 태어나는 아이를 삼키는것입니다. 사탄은 일찍부터 그 아이를 삼키려는 시도를 해 왔습니다. 구약 역사에는 사탄의 시도가 여러 번 나타나고 있습니다. 가인을 통해 아벨을 살해함으로써 새싹부터 짓이겨 버리려고 했습니다.

 

애굽에서 바로를 통해 유대인 가운데 태어나는 남자 아이를 다 죽이려는 시도도 이런 사탄의 책략입니다. 그런가 하면 이스라엘 열왕기에 나오는 이세벨의 딸 아달랴가 유다 왕손을 다 죽이려는 발악도 동일한 역사입니다. 에스더 서에 기록된 하만이 유대인을 모두 죽이려는 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구약 역사 뿐 아니라 신약에서도 동일한 시도가 계속됩니다. 헤롯왕의 음흉한 흉계에서도 동일한 시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끔찍한 영아 학살의 배후에도 이런 사탄적인 의도를 발견합니다. 그러나 사탄의 시도는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5,6) 하지만 여자가 아들을 낳자마자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좌 앞으로 올려진 아이

때가 차매 그 아이는 태어났습니다. 때가 차매 그 아이는 태어난 임무를 완수하셨습니다. 때가 차매 그 아이는 용이 삼킬 수 없는 영역으로 옮겨졌습니다.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리기로 예언된 그 아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아이의 탄생에서 아이의 승천으로 이야기가 급진전하고 있습니다. 요한의 의도는 그 아이가 누구인지 밝히기만 하면 충분합니다. 그 아이는 다름 아닌 하나님 아버지의 보좌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여러분과 제가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마다 고백하는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계신 바로 그 분이시라는 것을 여기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방 신화의 주인공이 아니라 구약 예언이 보여준 메시아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 앞과 보좌 앞에서 우리를 위해서 능력을 행사하시고 계시는 그 분이시라는 것을 요한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를 낳으매 보좌로 옮겨져 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나머지의 생애를 다 생략해도 신앙 공동체가 그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알아들을 것이라고 요한은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자요 승리자이십니다. 그는 대적 사탄의 의도대로 패배한 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사탄의 의도를 무산시키시고 하늘 보좌 위에 등극하신 주의 주요 왕의 왕이십니다.

 

여러분은 지금 인류 역사의 가장 핵심 되는 내용을 한 편의 그림 속에 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구속사의 핵심을 요한의 환상을 통해 대하고 계십니다. 삼키려고 하던 용의 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가 승리하셨습니다.

 

세기를 걸쳐 노력한 사탄의 시도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이를 삼키려는 시도가 끝났다고 순순히 물러설 사탄이 아닙니다. 여자에게 남은 분풀이를 하려고 달려들 것입니다. 그 아이를 낳은 여자를 공격 목표로 삼을 것은 극명한 일입니다.

 

그러나 싸움의 판도는 정해졌습니다. 한 번 밀리기 시작한 사탄의 시도는 성공할리 없습니다. 결정적인 실패를 이미 겪은 그에게 또 한 번의 실패가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본문을 계속 읽어 보십시오: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천이백육십 일 동안 그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어쩌면 닭 좇던 개 지붕 쳐다보듯이 하늘로 올라간 아이로 인해 분을 품고 아이가 사라진 하늘을 바라본 사이 그 여자마저도 용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것 같이 느껴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탄의 시도는 실패하도록 운명 지워져 있습니다. 사악한 시도는 물거품이 되도록 정하셨습니다. 공의의 하나님은 사악한 모든 시도는 물거품이 되도록 하십니다. 엄청난 위용과 막강한 능력으로 아이를 삼키려 했던 사탄의 시도는 무산되었습니다.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분은 태어나셨고 승천하셨습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그가 승리자로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고 거듭 말하고 있습니다. ‘앉는다.’는 것은 여러분이 앉아있는 그런 의자에 앉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통치자의 보좌에 등극하셨다는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 . .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12:2)고 선언합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 . .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1:3)고 선포합니다.

 

모든 싸움을 끝내고 그가 왕으로서 통치자의 보좌에 앉으셨다는 의미입니다.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그 분은 세상에 오셨고 자기 일을 완수하셨고, 다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 분입니다. 그가 승리하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치의 오차 없이 당신의 계획을 이루어가십니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광야

여기에 본문이 성도들에게 주던 위로가 있습니다. 극심한 황제숭배의 핍박 속에 시달리는 초대 교회 성도들을 향한 위로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여자는 광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지만 거기는 바로 하나님이 정하신 도피처입니다. 일천 이백 육십 일 동안 그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옛 언약 아래서, 즉 구약시대에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광야에서 보호되고 보존되었듯이, 신약시대 새 언약의 공동체도 광야에서 보호되고 양육될 것입니다. 광야는 하나님이 그 백성을 위해서 예비하신 피난처입니다.

 

거기에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보호하시고, 날마다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시던 곳입니다. 그러기에 본문은 그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으로 광야를 지칭합니다. 용을 피하여 도망친 거기야말로 하나님이 그 여자를 위하여 예비하신 곳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속 도시에의 연민과 집착이 여러분을 붙잡지 못하게 하십시오. 세상에 대한 사랑이 여러분의 영혼을 망치지 않도록 깨어있어야 합니다. 광야를 사랑하고, 광야의 보호와 양육의 묘미를 느끼는 순례자로서 세상을 살아갑시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서 이스라엘은 반드시 광야를 통과해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늘의 가나안을 바라보고 여러분이 나아갈 때에 여러분도 반드시 여러분의 광야를 통과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 항상 머무는 곳 거기가 광야입니다. 구름기둥, 불기둥이 그 백성을 떠나지 않던 곳이 바로 광야입니다. 구름 기둥 없이 하루 낮을 보낼 수 없는 곳이고, 불기둥 없이 하루 밤도 지낼 수 없는 그 곳이 바로 광야입니다. 그러기에 항상 그 분의 보호를 갈망하는 곳, 거기야말로 오늘 신약 공동체가 살아가야 할 장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 한 시도 마음 놓을 수 없는 고달픈 길을 걷고 계신 분은 없습니까? 그러면 그 일로 인해서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여러분이 걷는 그 힘든 길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장소입니다. 절박한 호소, 절박한 도움 없이는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다면 거기야말로 하나님이 그 지혜 가운데 마련한 안전지대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오로지 하나님을 향해 있을 때 하나님의 비상한 도움의 손을 비로소 경험할 것입니다. 아이는 하늘에서 안전을 얻었다면 여자는 광야에서 보호를 받습니다. 장소는 다르지만 방법은 다르지만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이라는 면에서는 동일합니다.

 

계시록 말씀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자가 정신없이 도망치기 전에 그 일을 내다본 눈이 있습니다. 여자가 도달하기 전에 그녀가 필요한 것을 준비한 손길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애에도 동일한 눈이, 동일한 손길이 예비 되어 있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일천 이백 육십 일! 여러분이 세상에서 증거를 하는 그 날수가 다하도록 이 여자는 광야에서 하나님의 보호와 하나님의 양육을 받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일천 이백 육십 일 그 날마다 이 여자는 보호를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녀를 날마다 보호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급박한 상황 속에 살아가던 이천 년 전 성도들을 위로하신 그 말씀이, 갈수록 끔찍한 세상 속에서 나그네와 행인으로 지내는 여러분의 나날에 동일한 위로의 말씀이 되기를 바랍니다.

 

광야이기에 외로움이 있지만 광야이기에 하나님의 손길을 가까이 느끼는 여러분의 순례 걸음이기 바랍니다. 인간적으로 외롭고 고달픈 길일지라도 하나님께서 동행하는 길이기에 그 분의 위로와 능력이 여러분의 마지막 걸음까지 공급될 것입니다. 보좌 앞으로 올라간 그 분이 승리하셨듯이 광야에서 순례 길을 걷는 여러분 모두도 그 분의 승리에 동참할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