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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근두목사 설교

    영상주소
    http://vod.upcweb.net/pastor/2019_0609_정근두.mp4
    성경본문
    롬 15:13
    설교일
    2019-06-09

희망을 주시는 하나님

15:13

구주대망 201969일 찬송 44, 90, 390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복된 예배의 자리에 함께 나아오신 이웃 여러분, 주일 예배에 오늘 나아오신 여러분들에게 우리 삶의 최고의 가치인 하나님을 알아가는 시간이 있기를 바랍니다.

 

2차 세계대전 말에 미국 잠수정 한 척이 본국의 기지에 도착했습니다. 항구에 도착할 즈음에 심각한 기계적 잘못이 생겨서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긴급구조대가 파송되었습니다. 배 안에 타고 있는 승무원들을 구하기 위해서 출동한 것입니다.

 

잠수부들이 잠수함 가까이 다가가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살피려고 잠수함 주위를 헤엄치고 있는데 잠수함 안에 있는 한 기발한 생각을 한 승무원이 망치를 가지고 모스 부호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 메시지는 희망이 있습니까?”라는 것이었습니다.

 

희망이 있습니까?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삶의 중요한 질문입니다. 검진결과를 듣기 위해 찾아간 의사에게 희망이 있습니까?”라는 묻습니다. 병실의 환자용 침대 곁에 서서 희망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습니다. 몇 달째 부부 문제로 갈등하면서 속으로 희망이 있을까?”라고 묻기도 합니다.

 

사업이 부도로 치닫는 상황에서 희망이 있을까?”라는 불안이 사로잡기도 합니다. 어린아이를 찾지 못한 채 밤을 새운 부모들은 희망이 있을까?”라고 불안해합니다. 어디로 치달을지 모르는 불안한 정국을 바라보며 우리나라에 과연 희망이 남아 있을까?”라고 걱정합니다.

 

사람들은 음식을 먹지 않고 40일은 살 수 있습니다. 물을 마시지 않고도 사흘은 견딜 수 있습니다. 숨을 쉬지 않고도 8분을 버팁니다. 그러나 희망이 사라지면 사람은 한 순간도 버티지 못합니다. 희망이란 우리의 삶에서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세계 제 2차 대전 중 미국 어떤 의과대학에서 희망이 신체적으로 미치는 영향을 연구했습니다. 25,000명의 포로들을 대상으로 희망이 그들에게 어떤 차이를 만드는지를 상당한 기간에 걸쳐서 연구를 했습니다.

 

그런데 25,000명 가운데 한 그룹의 전쟁포로들은 수용소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습니다. 구타, 고문, 독방에 가두는 것을 비롯해서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았지만 아무런 영향을 입지 않았습니다. 전쟁포로수용소라는 극한 상황에서도 망가지지 않았습니다. 마음도 몸도 모두 건강했습니다.

 

그들은 일상적인 여전히 평온하게 일상적인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연구팀은 이 그룹을 면밀히 조사를 하니 그들은 모두 희망지수가 탁월했습니다. 희망이 이와 같은 놀라운 차이를 만듭니다. 생의 위기를 극복하는 엄청난 에너지를 공급합니다.

 

그래서 이런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사람은 희망을 가지면 믿을 수 없는 무게의 짐과 잔인한 형벌을 받아도 견디어 낸다. 그러나 희망이 사라지면 사람들은 무너져 내린다. -감정적으로, 심리적으로, 영적으로도 파괴되고 만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 삶의 근본적인 필요를 채워주시는지를 계속 살피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필요한 도움과 희망을 발견하기 위해서 어디를 바라보고, 어디로 가야할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에 역사하실 것에 대한 희망을 반드시 가지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형편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도와주실 것을 꼭 믿기를 바랍니다.

 

지금 우리 사회 곳곳에는 희망결핍증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거짓희망에 집착하는 병적현상도 심각합니다. 하루도 인터넷 접속을 하지 않으면 불안한 청소년들이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내려가는 계단에서부터 누군가에게 연결을 시도하는 이들까지 모두 병적인 현상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면 희망을 어디서 발견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희망의 원천입니다. 희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희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15:13).

 

달리 말해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그가 여러분에게 평안과 기쁨과 희망을 주신다는 말입니다. 저는 행복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평안과 기쁨, 희망이 넘치기 때문입니다. 괜히 묻지도 않는 사람을 붙잡고 나는 행복합니다.”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합니다. 예배하는 여러분 모두에게 이런 마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통해서 희망을 잃고 사는 사람들에게도 전달되길 원합니다.

 

주의 이름이 선하므로라는 주의 이름에 희망을 가집니다.”(시편 시52:9, N.I.V.)라는 시편 구절이 있습니다. 이름에 희망을 둔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어떻게 이름에 희망을 둘 수 있습니까? 고대 문화에서는 이름은 한 사람의 인격을 규정하는 역할을 합니다. 주어진 이름은 그 사람과 어울리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이름 따로, 사람 따로 놀지 아니했습니다.

 

성경 곳곳에는 여러 가지 하나님의 이름이 나옵니다. 여호와 살롬 무슨 의미입니까? 평화를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면 놀라운 평화를 허락하십니다. 세상이 알 수 없는 평화,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화를 선물하십니다.

 

여호와 이레 무슨 뜻입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준비하신 수양으로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를 드리면서 불렀던 이름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의 모든 쓸 것을 날마다 채우실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가장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 삶에 가장 필요한 희망을 주십니다. 날마다 희망의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평강과 기쁨, 즐거움을 체험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알아가는 것보다 더 감동적인 일은 없습니다. 아는 만큼 여러분은 그 이름이 주는 복을 받습니다.

 

왜 희망의 하나님이 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언제나 살피시기 때문입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성도들은 삶이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을 더욱 실감합니다. 게다가 우리의 미래는 불확실하며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희망을 갖습니다. 하나님의 복된 약속을 알기 때문입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41:10)

 

여기에 복된 소식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여러분과 저는 홀로 대처하지 않습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 때문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붙들 수 있는 삶의 확실한 부분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붙잡을 때 여러분은 희망 가운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삶에는 여러 가지 불확실한 것이 많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사람들이 우리를 떠나간다는 사실입니다. 친구들이 이사를 갈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사별 할 수도 있습니다. 적어도 사는 날 동안 함께 하리라는 서약하고 믿었던 배우자마자 떠나가는 일이 드물지 않는 슬픈 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여기 분명한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떠나지 아니할 것입니다. 목회현장에서 특히 장례식장에서 말없이 쳐다보는 눈 빛 속에서 어떻게 살지 막막해요, 어떻게 다음 발걸음을 옮겨 놓을 수 있을까요?”라는 질문을 듣기도 합니다.

 

거기에 대한 대답은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이란 진리입니다. 함께 하실 뿐 아니라 우리를 살피시고 돌보신다는 사실입니다. 주께서 말씀하신다. 네가 가야 할 길을 내가 너에게 지시하고 가르쳐 주마. 너를 눈여겨보며 너의 조언자가 되어 주겠다.”(32:8, 표준새번역)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그리고 성도 여러분, 여러분과 저는 미래를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미래를 통제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미래를 아시고 미래를 주관하십니다. 미래를 아시고 주관하시는 분께서 우리에게 갈 길을 안내하고 도움말을 주시겠다고 약속합니다. 여기에 희망이 있습니다.

 

날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우리가 모르고 그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우리는 모르지만 이 모든 것을 아시고 다루시는 하나님을 믿기만 하십시오. 우리의 삶을 아시고 이해하시고 인도하시고 도움말을 주실 하나님과 함께 하루하루를 살아갑시다. 여기 그 분의 놀라운 약속이 있습니다.

 

중심에 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애가3:21-23)

 

여기 새로운 한 주간을 희망 가운데 펼쳐갈 놀라운 약속이 담겨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손을 한 번 붙잡은 다음에는 결코 하나님이 우릴 사랑하는 것을 중단시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아침마다 새롭습니다. 믿고 날마다 새로운 하루를 열어 가십시오. 새 희망으로 여러분이 살기를 하나님은 바라십니다.

 

왜 희망의 하나님이 되십니까? 둘째로 2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삶의 목적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상관이 없습니다. 좋은 일, 나쁜 일, 힘든 일, 괴로운 일 그 어떤 일에도 하나님의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수용하기도 극복하기도 어려운 일을 우리는 만납니다. “왜 하나님, 제게 이런 일이 . . . ?”라고 질문합니다.

 

어떤 흐름도 이유도 발견할 수 없는 엉뚱한 사건이 터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사건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으면 견뎌낼 희망을 가집니다. 엄청난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하나님의 목적은 거기에 있습니다. 상황이 나빠져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일을 행하시고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한 번 더 여러분이 잘 아는 구절을 살핍시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8:28) 어려움을 겪을 때 여러분이 이미 잘 아는 사실을 다시금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그 진리는 여러분이 상상하거나 기대하는 것이 아니고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희망은 우리가 이미 알고 붙잡고 있는 진리에 근거합니다. 하나님, 그 분은 온 우주의 설계자와 시공자요 유지 보수하는 분이십니다. 그 분이 만사를 주장합니다. 결코 요행이나 재수가 여러분의 앞날을 주장하지 않을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장하십니다. 여기에는 어처구니없는 사건들도, 실패도, 실직도, 파산도, 이혼도, 사별도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가 한 어리석은 실수조차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전체 그림을 그리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위해서 그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하십니다. 맛있게 구워진 빵을 먹어보신 적이 있지요? 그러나 굽기 전에 재료하나 하나는 설탕 말고는 별로 먹을 만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넣고 굽고 나면 맛있는 빵이 됩니다.

 

하나하나의 사건은 결코 유쾌한 경험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들을 통해서 당신의 작품을 이루어가십니다. 수를 놓은 작업도 마찬가지 입니다. 양탄자 밑에서 쳐다보면 아무런 의미도 아름다움도 발견하지 못합니다. 십자수도 마찬가지고 동양자수도 마찬가지입니다. 밑에서는 아름다움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을 통해서 당신의 작품을 수놓고 있습니다. 위에서 내려다보시면 한 땀 한 땀을 보시면서 만족해하십니다. 다만 그 연결을 보지 못하고 밑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의미 없는 일처럼 느껴질 뿐입니다. 그러나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8:28) 하나님은 여러분의 인생을 어두운 색실로, 밝은 색실로 섞어가면서 수놓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에 지금 밝은 색실로 수놓고 계시면 감사하며 찬송하십시오. 어두운 색실로 수놓고 계시면 견디며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의 기쁘신 뜻 안에 들어온 당신의 자녀들의 삶에는 우연이란 없습니다. 운명이 우리를 가지고 놀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뜻대로 사는 자들에게는 새로운 삶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혹시 이 자리에 오시긴 했지만 너무나 힘든 처지에 계신 분은 없습니까? 여러분의 느낌이나 감정에 따라서 결론을 내리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해서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너희를 두고 계획하고 있는 일들은 오직 나만이 알고 있다. 내가 너희를 두고 계획하고 있는 일들은 재앙이 아니라 번영으로서, 너희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는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29:11, 표준새번역)

 

지금 고통스런 자리에 있습니까? 아무런 쓸모없는 고난을 겪고 있다는 생각이 드십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두고 계획하고 있는 일들은 재앙이 아니라 번영으로서, 우리에게 미래의 희망을 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려움이 극한 때에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너무 멀리 떠나와서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갈 길이 보이지 않습니까? 여기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1:6).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에 무언가 선한 일을 시작하셨습니까? 그렇다면 그 일을 아름답게 끝내실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희망의 원천이 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삶의 목적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언제나 살피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시면 여러분의 마음속에 희망이 피어납니다. 텔레비전에만 시간을 보내시면 더 희망을 잃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묻습니다. 왜 희망의 하나님이 되십니까? 3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복된 장소를 마련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도무지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느껴집니까? 더 이상은 버틸 수 없는 지점에 도달했습니까? 우리의 궁극적인 희망은 하늘나라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14:1-2) 예수께서는 하늘이란 마음의 상태가 아니라 특정한 장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의 세계, 니르바나가 아닙니다. 몸도 없고 영혼도 없고 나도 없고 너도 없는 세계가 아닙니다. 하늘나라는 실제로 존재하는 곳이요 주께서 당신 백성을 위해서 준비한 곳입니다. 하늘나라는 평안과 안식이 주어지는 곳입니다. 두려움이 없고 고통이 없고 문제도 갈등도 없는 곳입니다.

 

성경 마지막 책에서 잠깐잠깐 보여주는 곳입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 이러라.”(21:4)

 

거기에 우리의 희망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의 마지막 판정은 바로 여기서 됩니다. 여러분은 죽음을 장례식을 어떻게 맞이합니까? 일이 잘 될 때는 아무라도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삶의 종착역인 장례행렬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거기 둘러선 사람들의 눈빛 속에 절망이 자리하면 희망을 잡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에게 있어서 장례식은 축제입니다. 그래서 영결식이라고 부르는 대신 우리는 천국환송예배라고 부릅니다. 성도가 세상을 떠날 때 우리는 그가 어디에 갔는지를 알기에 기뻐합니다. 동시에 우리가 슬퍼하는 이유는 떠난 사람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 사람을 다시는 여기 땅에서 보지 못하고 만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떠나면 우리는 그 사람 때문에 슬퍼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더 좋은 곳으로 갔습니다. 우리 모두가 결국 가게 될 더 좋은 곳으로 갔기에 그를 인해 슬퍼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희망을 가지지 못한 사람처럼 슬퍼하지 말아야 합니다.

 

갑자기 남편을 잃고 혼자 아이들을 키운다고 하는 것은 결코 사소한 불편이 아닙니다. 사람이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충격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그런 와중에서도 놀라운 평화를 누립니다. 어디서 오는 평화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아는 사람만이 누리는 평화입니다.

 

성도 여러분, 혹 여러분 가운데 희망이 다 사라진 것처럼 느끼신다면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세심하게 돌보시고 있는지를 잊어버린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상황에서도 감정을 붙들지 말고 말씀을 붙잡기를 바랍니다.

 

야곱 집이여 이스라엘 집의 남은 모든 자여 나를 들을지어다. 배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품기운 너희여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안을 것이요 품을 것이요 구하여 내리라 너희가 나를 누구에 비기며 누구와 짝하며 누구와 비교하여 서로 같다 하겠느냐”(46:3-5)

 

파탄으로 치닫는 부부생활로 인해서 고민합니까? 모든 방법을 다 동원했지만 좌초하고 말았습니까? 희망이 없는 암으로 인해서 발버둥 칩니까? 이 회사 저 공장으로 뛰어다녀도 아무데도 자리를 얻지 못하고, 어디에도 여러분에게 적합한 곳은 보지지 않습니까?

 

원인을 알 수 없는 질병으로 인해서 절망하고 있습니까? 빗나간 자녀로 인해서 아무런 희망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경제생활이 절망적입니까? 빚을 갚기보다는 더 많은 빚 속으로 빠져들기만 합니까? 한 달 한 달 더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듭니까? 극복하기에는 너무 무력하고, 희망조차 모두 사라진 처지에 혼자 계신 분은 없습니까?

 

모든 문제를 예수님께 맡기십시오. 그러면 새 희망이 여러분의 삶에 자리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새 희망이 가득할 것입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벧전1:30).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절망적 상황에서 새 희망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키셨다면 여러분의 결혼생활도 다시 일으키실 수 있습니다. 죽어버린 꿈도 사라진 희망도 되살릴 수 있습니다. 예수, 우리 삶에 희망이십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들은 진리를 붙잡으십시오. 한두 가지라도 붙잡기만 하면 절망이 변하여 희망이 됩니다. 왜 우리는 희망의 하나님을 믿습니까? 첫 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삶의 목적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항상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 없이 아무 때도 여러분은 홀로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어쩌면 하나님이 곁에 계신 것처럼 느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여러분과 함께 계시고 돌보시고 도우십니다. 세상을 살아갈 때 여호와 삼마- 언제나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은 아무 때고 혼자 가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왜 우리는 희망의 하나님 믿습니까?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언제나 살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의 보살핌을 우리는 어떻게 체험합니까? 우리가 속한 구역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돌보심을 체험하는 좋은 교회를 만들어갑시다. 구역에 속하시고 구역을 통해서 하나님이 성도를 돌보심을 나타내 보입시다.

 

이렇게 예배에만 참석하면 구경꾼으로 남기가 쉽습니다. 바라보기만 해서는 교회가 주는 유익을 다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위기의 순간에 함께 하는 소그룹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어려울 때 여러분과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래서 가정 같은 구역, 동고동락하는 교회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우리의 희망이 되시는 이유는 우리를 위해 준비한 하늘나라 때문입니다. 거기가 성도의 마지막 희망의 원천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하나님의 임재는 여러분을 떠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실패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위해서 영원한 안식처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희망을 가지고 살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40:31).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마십시오. 절망이란 결코 신앙인의 삶에 자리할 수 없습니다. 아멘

 

다함께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분명히 오늘 이 자리에도 절망적인 형편에 처한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더 이상 희망을 갖지 못한 채 이 자리로 나온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지난 몇 주 동안에 일어난 일들로 인해 낙심하고 침체된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절망의 수렁에서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 인해 자기 목숨조차 끝내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 분들을 이 예배의 자리로 인도하시고 당신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그들을 무척 사랑하셔서 함께 기도드릴 수 있도록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분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분들이 주님께 자신의 삶을 위탁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새 희망과 새 삶을 시작할 수 있게 하옵소서.

 

(이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마음을 열고 기도드리십시오. 이미 하나님은 여러분의 모든 생각을 알고 계십니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아십니다. 마음으로 이렇게 기도해 보십시오. 들어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주님은 지금 제 심정을 정확히 알고 계십니다. 내 안에 있는 혼란과 슬픔도 보셨습니다. 오늘 이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드립니다. 당신만이 나의 희망이십니다. 항상 나와 함께 계심을 보다 잘 알아채도록 도와주시옵소서. 나를 보살피고 있음을 잘 알도록 하옵소서.

 

그동안 내가 잘 알지 못하고 느끼지 못했으나, 나의 모든 고통과 문제 한 가운데서도, 내 인생 가운데 역사하심을 감사합니다. 나를 향한 당신의 집요한 사랑과 불변하는 목적을 인해서 감사드립니다. 주님을 더 잘 알기를 소원하며 나의 삶을 향한 당신의 크신 목적을 알아가기를 원합니다.

 

내 삶을 주님께 드리오니 받아주셔서 당신을 알아가는 새로운 관계를 허락하옵소서. 그리하여 내가 세상을 떠날 때에도 나를 받아주시고 영원토록 함께 하여 주옵소서. 내 모든 희망은 주께 있습니다. 하늘의 희망에 모든 것을 겁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