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not see this page without javascript.

메뉴 건너뛰기

정근두목사 설교

    영상주소
    http://vod.upcweb.net/pastor/2019_1215_정근두.mp4
    성경본문
    요한 계시록 22:10-15
    설교일
    2019-12-15

예언의 말씀을 덮어두지 말라

요한 계시록 22:10-15

구주대망 20191215, 찬송 9, 105, 268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주간 동안 살면서 요한이 밧모 섬에서 받은 놀라운 환상을 가끔 묵상해 보셨습니까? 새 하늘과 새 땅을 배경으로 하늘에서 내려온 새 예루살렘은 요한이 밧모 섬에서 주의 날 받았던 계시의 영광스런 절정이었습니다.

 

이제 요한이 밧모 섬에서 받은 계시는 완성되었고, 요한은 그것을 성도들에게 충실히 증거 했습니다. 이제 계시록을 끝맺는 부분에서 마지막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이 놀라운 장면을 보도록 인도했던 바로 그 천사가 요한에게 말합니다.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고 명합니다. 왜 인봉하지 말라고 명령을 할까요? 그 첫째 이유는 1 성취의 때가 임박했기 때문입니다. 때가 가까우니라.” 유대 묵시 문학에서는 대개 그 반대의 명령을 합니다. 때가 올 때까지 받은 계시를 당대의 사람들로부터 봉하여 두라고 명하곤 합니다.

 

구약의 계시록인 다니엘서 826절을 예를 들어 볼 수 있습니다. 이미 말한바 주야에 대한 환상은 확실하니 너는 그 환상을 간직하라 이는 여러 날 후의 일임이라 하더라.”(8:26)

 

다니엘에게 주신 명령과는 대조적으로 요한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다니엘에게 주어진 계시는 여러 날 후의 일에 관한 것이고 요한에게 주신 예언의 말씀은 그 성취의 때가 가깝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다니엘의 계시는 후대의 사람을 위한 것이고, 요한의 계시는 당대인을 위한 것입니다. 요한은 자기 당대의 사람들에게 주의 이름으로 공개적으로 말했습니다. 요한의 예언은 먼 후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당대를 위한 것이요 또한 그 이후 모든 세대의 성도들을 위한 것입니다. 2천년 동안 주님의 백성들은 이 계시의 말씀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므로 당대의 사람들의 눈으로부터 예언의 말씀을 인봉해야할 이유가 없습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책에 담긴 약속과 경고는 봉인되지 말고 모두가 읽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들어야만 합니다. 듣고 모두 가까이 다가온 심판과 구원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1:3, 개역) 매일 이 예언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십시오. 주일마다 나아와서 듣고 복을 받으십시오. 들은 말씀을 지켜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의심할 바 없이 초대 교회는 주님의 임박한 기대 재림을 대망하며 살았습니다. 곧 다가올 심판의 때를 의식하고, 임박한 보상의 날을 갈망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세대의 그리스도인들도 마땅히 주의 재림을 대망하며 살아야 합니다. 심판과 구원의 큰 날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때 이후 모든 성도들은 때는 가까운데 끝은 아직 아닌 긴장 속에 살아갑니다. 지혜로운 자는 주님의 오심을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여러분은 구주 재림을 대망하고 살아가십니까? 그의 오심을 기다리는 자들에게는 놀라운 복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자 그러면 곧 이어서 나오는 11절의 말씀은 무슨 의미입니까?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11) 처음 읽어보면 수수께끼 같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이 말씀은 처음 보기보다 단순합니다.

 

다시 한 번 다니엘의 예언에 뿌리박은 말씀입니다. 다니엘아 갈지어다 이 말은 마지막 때까지 간수하고 봉함할 것임이니라 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하게 하며 희게 할 것이나, 악한 사람은 악을 행하리니, 악한 자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되 오직 지혜 있는 자는 깨달으리라.”(12:9,10)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11) 이 말씀은 아주 무서운 경고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대로 불의하게 두라” “그대로 더럽게 두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11)그가 불의를 자행하는 것을 말리지 말라’ ‘그 불의를 계속하는 것을 방해하지 말라’ ‘더러운 자는 그 더러운 짓을 하도록 그대로 두라는 심판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언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를 거부하는 자에게 기다리는 것이 무엇입니까? 계속 회개하지 아니하는 자는 어떻게 됩니까? 끝까지 불의한 삶을 집착하면 그 마지막이 무엇입니까? 다만 심판으로 나가게 될 것입니다. 불의한 삶에는 최후 심판이 기다립니다. 더러운 삶의 종국에는 파멸만이 기다립니다.

 

하지만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의 최후는 다릅니다. 계속해서 의를 행하게 될 것입니다. 더욱 더 거룩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영광 가운데 썩지 아니할 기업을 향해서 달려갈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3-4).

 

모든 인생은 지금 양자택일을 해야 합니다. 때가 오면 회개의 기회가 사라질 것입니다. 마지막 때의 비극은 지금껏 형성된 습성에서 개인의 인격이 고착된다는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돌이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회개의 기회가 남아 있지 아니할 것입니다. 너무 때가 임박해서 변화가 더 이상 불가능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든지 반대하든지 그 선 자리에서 돌이킬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언의 말씀을 봉해 둘 수 없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는 두 번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2 영원한 심판의 날이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12-13) 이 말씀은 다시 한 번 주님 자신의 말입니다.

 

그러면 온 세상의 심판 주께서 자신을 어떻게 소개합니까?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주 하나님 곧 전능자께서 자신을 소개한 동일한 호칭으로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나타냅니다.

 

계시록 18절을 보십시오.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1:8) 동일한 칭호 알파와 오메가를 사용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만 속한 심판의 대권을 행사하십니다. 그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나오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는 말은 알파와 오메가라는 말을 적절히 정의합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주님이 오시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는 심판주의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서 오십니다. 곧 이사야 예언의 성취입니다.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의 앞에 있으며”(40:10) 상급과 보응을 하시려고 오십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오늘 우리의 신앙고백대로 말하면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려 오십니다.” 거기로부터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려 오십니다.”고 우리가 고백하는 진리대로 입니다.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우편에서 심판하는 권세를 가지고 계십니다. 거기로부터오셔서 모든 인생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오시는 그 날은 계산하는 날입니다. 월급날 정도가 아닙니다. 한 평생 살아온 모든 것을 정산하는 날입니다. 주님이 오셔서 어떻게 계산하실까요?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12, 현대인의 성경) 일한 것에 따라서 지불하십니다.

 

세상에서는 일을 적게 하고도 많은 월급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일은 많이 하고도 받는 것은 적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날은 공의롭게, 정당하게 계산될 것입니다. 성경에는 계속 동일한 가르침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 . .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2:6-8 ).

 

로마에 보낸 바울의 편지 뿐 아니라 주께서 두아디라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도 나타납니다. “. . .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2:23).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더라. . . 또 사망과 음부도 불 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 못이라”(20:12-13).

 

그러면 계시록의 관점에서는 상급을 받을 만한 선한 행위는 무엇입니까? 환난 중에 참는 것입니다. 핍박 가운데 견디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끝까지 신실한 것입니다.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관건입니다.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고 약속합니다.

왜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아야 합니까? 셋째로 3 모든 인생의 영원한 운명이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14-15).

 

여기 계시록 마지막 복이 선언됩니다.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요한은 축복을 선언합니다. 생명나무에 나아갈 권세를 얻으며라는 표현은 법정에서 사용되는 것입니다. 여기는 심판이 면제되는 축복을 의미합니다. 누구에게 선언된 복입니까?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여러분, 옷은 왜 빨아 입지요? 더러워진 것을 깨끗케 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래 입어서 더러워지기도 하고, 요리를 하다가 더럽히기도 하고, 논밭의 일을 하거나, 작업장에서 일을 하다 보면 더러워집니다.

 

더러운 옷을 입고 외출을 하거나, 특별히 초청 받은 자리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더러워진 옷은 빨아서 입습니다. 다시 깨끗한 옷을 갈아입고 초대에 응하는 것은 일상적인 우리의 경험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의 바탕 위에서 고귀한 진리를 선언합니다.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14)

 

옷을 빨아 입는 것을 죄사함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동일한 표현을 우리는 계시록 714절에서도 접할 수 있습니다.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이며 또 어디에서 왔느뇨?”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모든 죄로부터의 씻음은 오직 어린 양되신 그리스도의 피로 성취됩니다. 그 피로 속죄함 받았네.”를 노래하십시오. 믿기 전에 지은 죄든지, 믿은 후에 지은 죄든지, 모든 죄의 씻음은 오직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습니다.

 

이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는 모든 죄를 없이할 뿐만 아니라 깨끗케 하는 효능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의 보혈 능력 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 주의 보혈 그 어린 양의 매우 귀중한 피로다 이런 찬송을 마음에 믿고 입으로 찬양하십시오.

 

, 그러면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 누리는 복을 어떻게 묘사합니까? 생명나무에 나아갈 권세를 얻는다고 표현합니다. 인간은 죄를 범한 후 생명나무가 있는 동산에 나아갈 길을 제한 당했습니다. 범죄한 이후로는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그 길은 봉쇄되어 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나 그 두루마기를 어린 양의 피에 빠는 자들은 이제 생명나무에 나아갈 권세를 얻습니다. 이는 무슨 뜻입니까? 이는 주의 보혈을 믿는 자들은 충만한 생명을 누리는 자리에 이르는 것을 말합니다. 낙원의 삶이 주는 기쁨을 성도들이 마음껏 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의 백성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권세를 누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삶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의 백성과 어린 양의 교제로부터 나옵니다.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 누리는 복을 무엇이라고 또 달리 표현합니까?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얻는다고 말합니다. 생명 강수가 그 성의 한 가운데를 흐르고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는 그 성에 들어갈 특권을 누립니다.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빤 사람 외에는 그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힘입고 우리는 그 성으로 들어갈 권세를 얻습니다. 우리 위해 죽었다가 살아나신 그분을 믿는 사람만이 죄 용서를 얻고,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는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요한은 이미 우리에게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비전을 보여준 바 있습니다. 새 예루살렘의 영광을 기술한 바 있습니다. 이제 그는 우리에게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마지막 복을 선언한 후에 마지막 경고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도성에서 누리는 지극한 생명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15).

 

성 밖의 삶을 묘사합니다. 거기 성 밖에도 사람들이 사느냐고 묻지 마십시오. 몇 차례 말씀드린 대로 계시록의 모든 말들을 문자적으로 취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요한은 지금 여러 가지 그림 언어를 통해서 동일한 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버림받은 자들에 대해서 요한은 이미 묘사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21:8).

 

오늘 본문에는 다만 성 밖에 있으리라고 말하지만 여기는 불과 유향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라고 밝힙니다. 요한은 그때그때 어울리는 묘사로서 동일한 진리를 전달합니다.

 

단지 성 밖에 있는 것이 그들이 받는 파멸의 전부가 아니라 그들은 불 못에 던져질 것입니다. 마귀와 짐승과 거짓 선지자와 함께, 사망과 음부도 함께 불 못에 던져질 것입니다. 이것을 둘째 사망이라고 부릅니다.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20:15)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15) 누구를 가리켜서 개들이라고 부릅니까? 우리 문화나 유대인의 문화나 이점에서는 서로 비슷합니다. 사람을 가리켜 개라고 부르는 것은 아주 모욕적인 언사입니다.

 

흔히 유대인들은 이 단어로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을 모두 불렀고, 특히 이방인을 부르곤 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지금 이 단어를 이방인과 대조되는 유대인을 두고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열방과 족속 가운데서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무리들과 대조해서 나라와 민족 가운데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모든 자들을 부릅니다.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들은 적그리스도의 충동을 받아 악한 짓거리에 동참하는 자들을 일차적으로 지칭합니다. 이들은 적그리스도의 거짓을 사랑하고 실천하며 증진시키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적그리스도를 닮습니다. 거짓의 아비인 자를 닮아 거짓말은 좋아하고 거짓말을 지어냅니다. 이들은 그 옷을 어린 양의 피에 씻어 깨끗케 한 하늘 성도들과 대조를 이룹니다.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15). 모든 악한 자들은 거기 들어갈 수 없습니다. 모든 악은 거짓되고 진리를 거역합니다.

 

악을 좋아하고 완고하게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그 성에 들어갈 권리가 주어지지 아니합니다. 거룩한 성에는 더러운 것이 자리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기 죄인 전혀 없으니 거룩한 자 뿐이라 주가 주신 면류관 쓰고 거룩한 길 다니리라고 노래합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거짓을 사랑하고 거짓된 삶을 사는 자들의 최후는 죽음입니다. 불 못에 던져지는 것입니다. 둘째 사망에 참예하는 것입니다. 이는 성경이 줄기차게 가르치는 바입니다.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8:11-12, 참조 마 22:13, 25:30). 적그리스도를 추종하고 거짓을 일삼는 자들은 생명나무에 나아감을 얻는 권세를 스스로 박탈합니다. 그보다 더 비참한 최후는 없습니다.

 

여기서 요한이 의도하는 바는 두 부류의 사람들을 생생히 대조시키는 것입니다. 성 안에 들어가는 사람과 성 밖에 있는 무리들을 그려줌으로 묵시적인 호소를 합니다. 성 밖의 무리로 간주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구속받은 새 예루살렘 시민이 되라고 암시적으로 호소합니다. 악한 삶을 떠나서 의로운 자가 되라는 의미입니다. 요한은 지금 독자로 하여금 하나님으로부터 거부당하는 자가 되지 말라고 호소합니다.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상속을 받아 누리도록 간곡히 요청합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습니까? 성안으로 들어갈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성 밖에 여러분의 현주소입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삶을 살아가십니까?

 

여러분의 종착지가 불 못입니까 아니면 새 예루살렘 성안입니까? 바깥 어두움 속에 던지지는 대신 빛 속에서 주를 섬기는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썩지 아니하고 쇠하지 아니하고 변하지 아니하는 하늘의 영원한 기업을 누리시는 복이 여러분의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